목차
Ⅰ.들어가는 말
Ⅱ.가깝고도 면 이웃 일본, 그 교류의 역사
Ⅲ.앞으로의 일본에 관한 태도
Ⅱ.가깝고도 면 이웃 일본, 그 교류의 역사
Ⅲ.앞으로의 일본에 관한 태도
본문내용
일본 열도 개척과 일본 고대국가 성립의 역사였던 것이다.
2) 중세의 한일 관계
헤이안시대 이래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 1185-1333] 기간 동안의 소강기를 거쳐 한일 관계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1333-1573]에 이르러 그 두번째 장으로 접어든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 건국후 1403년(태종 3) 조선이 명(明)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도 책봉을 받으면서 조선·중국·일본간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선국왕과 아시카가[足利]·토요토미[豊臣]·도쿠가와[德川] 등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대등한 처지에서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사절을 서로 교환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通信使),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한다. 통신사는 조선국왕의 명에 의해 서계(書契)와 예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막부장군을 접견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최초의 통신사가 파견된 이래 1811년(순조 11)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될 때까지 19차례에 걸쳐 보통 400-500명 규모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양국 사절의 파견 목적을 살펴보면, 먼저 임진왜란 전의 경우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구리[銅]를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조선의 쌀·콩·목면과 대장경·범종 등을 가져가는 경제·문화적인 교류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의 사절은 왜구의 금지요청과 수호관계 수립 등 대개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임진왜란직후인 1607·1617·1624년 세차례에 걸쳐 도쿠가와의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은 통신사라는 칭호 대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일본측 사절의 상경도 허가하지 않았다. 무로마치기[室町期] 일본 사절의상경로를 따라 토요토미의 침략군이 단번에 서울로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명.청(明.淸) 교체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조선과 일본이 연대하여 대륙의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대등외교를 수립할 필요성이 커감에 따라 1636년의 사절단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다. 통신사의 목적과 서계·예단·여정 등 내용과 형식이 정례화된 것도 역시 이때부터였다.
정사·부사·종사관의 3사단(使團)으로 구성된 통신사의 행렬은 오사카에 남겨 놓은 수부 1백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370-380명에, 일행을 호위하는 쓰시마 번사(蕃士) 8백여 명, 각 번(蕃)에서 동원된 가마꾼이 1천여 명, 그리고 8백여 두의 말과 마부가 참가하는 대행렬이었다. 영접 역시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방의 번주(蕃主)들이 막부의 명령으로 에도로부터 자기 번으로 돌아와 몸소 미리부터 그 준비를 주관할 정도로 극진한 것이었다. 한양→부산→쓰시마[對馬島]→후쿠오카[福岡]→오사카[大阪]→쿄토[京都]를 거쳐 에도[江戶:東京]에 이르는, 통신사가 지나는 길과 숙소 주변에는 일본의 정치담당자들은 물론 일반무사를 비롯한 문인·묵객·서민들이 몰려들어 서화·시문·글씨 등을 청한다 하여 북적거렸으며, 통신사의 행렬도는 병풍·회권·판화 등으로 만들어져 일본내에 널리 유행 되었다. 이 시기 조선통신사는 다름아닌 학술·사상·기술·예술상의 문화 전파자였던 것이다.
3) 근대의 한일 관계
비록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기는 하였지만, 한반도계의 도래인과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펼쳐진 고대·중세의 한일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전개된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인해 깨어지고, 그 대신 일제 36년이라는 침략과 저항, 대립과 증오로 얼룩진 왜곡과 굴절의 역사가 한일관계의 세번째 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국인 노동력 수탈의 결과로 생겨난 수십만 재일교포의 오늘날의 모습은 바로 그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Ⅲ.앞으로의 일본에 관한 태도
나치스 독일의 유태인 학살 현장으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용서합시다. 그러나 잊지는 맙시다." 물론 과거에 연연해하면서 앞날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바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와 반성이다. 그런데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일본정부의 각료들 가운데서조차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망언들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것을 본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분노와 증오, 배척 일변도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능사라 할 수는 없다. 막연한 분노와 증오, 배척의 그 이면에는, 해방 이후에도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버젓이 부귀와 권세를 누렸던 친일세력들과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 식민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과거 국민들의 배일감정을 자신들의 독재정권의 강화를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했던 일부 정치가들의 불순한 의도가 남아 있고, 말로는 일본을 경멸하고 증오하면서도 일제 상품이라고 하면 사죽을 못쓰는 일부 한국인들의 이중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본 군국주의이지 일본사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일본문화의 유입을 차단하고 있는 속에서 오히려 일본의 저질문화들이 음성적으로 활개를 치는 지금의 현상을 그대로 앉아서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21세기 호혜 평등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내다보며, 우리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우리 나라와 일본의 문화교류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선린우호에 바탕한 교류의 자취를 더듬어 나가는 발길이었음을 알고 일보문화의 전면 개방에 앞서 피해의식 속에 잠겨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야 할 것이다.
참고 도서
▷ 일본 문화 바로 보기
▷ 국정교과서 국사 상·하
▷ 자료로 보는 한국사
▷ 일본어 사전
참고 문헌
▷ 기나이 지방 (오사카, 아스카, 나라, 쿄토)의 문화
2) 중세의 한일 관계
헤이안시대 이래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 1185-1333] 기간 동안의 소강기를 거쳐 한일 관계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1333-1573]에 이르러 그 두번째 장으로 접어든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 건국후 1403년(태종 3) 조선이 명(明)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도 책봉을 받으면서 조선·중국·일본간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선국왕과 아시카가[足利]·토요토미[豊臣]·도쿠가와[德川] 등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대등한 처지에서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사절을 서로 교환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通信使),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한다. 통신사는 조선국왕의 명에 의해 서계(書契)와 예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막부장군을 접견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최초의 통신사가 파견된 이래 1811년(순조 11)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될 때까지 19차례에 걸쳐 보통 400-500명 규모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양국 사절의 파견 목적을 살펴보면, 먼저 임진왜란 전의 경우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구리[銅]를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조선의 쌀·콩·목면과 대장경·범종 등을 가져가는 경제·문화적인 교류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의 사절은 왜구의 금지요청과 수호관계 수립 등 대개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임진왜란직후인 1607·1617·1624년 세차례에 걸쳐 도쿠가와의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은 통신사라는 칭호 대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일본측 사절의 상경도 허가하지 않았다. 무로마치기[室町期] 일본 사절의상경로를 따라 토요토미의 침략군이 단번에 서울로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명.청(明.淸) 교체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조선과 일본이 연대하여 대륙의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대등외교를 수립할 필요성이 커감에 따라 1636년의 사절단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다. 통신사의 목적과 서계·예단·여정 등 내용과 형식이 정례화된 것도 역시 이때부터였다.
정사·부사·종사관의 3사단(使團)으로 구성된 통신사의 행렬은 오사카에 남겨 놓은 수부 1백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370-380명에, 일행을 호위하는 쓰시마 번사(蕃士) 8백여 명, 각 번(蕃)에서 동원된 가마꾼이 1천여 명, 그리고 8백여 두의 말과 마부가 참가하는 대행렬이었다. 영접 역시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방의 번주(蕃主)들이 막부의 명령으로 에도로부터 자기 번으로 돌아와 몸소 미리부터 그 준비를 주관할 정도로 극진한 것이었다. 한양→부산→쓰시마[對馬島]→후쿠오카[福岡]→오사카[大阪]→쿄토[京都]를 거쳐 에도[江戶:東京]에 이르는, 통신사가 지나는 길과 숙소 주변에는 일본의 정치담당자들은 물론 일반무사를 비롯한 문인·묵객·서민들이 몰려들어 서화·시문·글씨 등을 청한다 하여 북적거렸으며, 통신사의 행렬도는 병풍·회권·판화 등으로 만들어져 일본내에 널리 유행 되었다. 이 시기 조선통신사는 다름아닌 학술·사상·기술·예술상의 문화 전파자였던 것이다.
3) 근대의 한일 관계
비록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기는 하였지만, 한반도계의 도래인과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펼쳐진 고대·중세의 한일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전개된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인해 깨어지고, 그 대신 일제 36년이라는 침략과 저항, 대립과 증오로 얼룩진 왜곡과 굴절의 역사가 한일관계의 세번째 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국인 노동력 수탈의 결과로 생겨난 수십만 재일교포의 오늘날의 모습은 바로 그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Ⅲ.앞으로의 일본에 관한 태도
나치스 독일의 유태인 학살 현장으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용서합시다. 그러나 잊지는 맙시다." 물론 과거에 연연해하면서 앞날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바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와 반성이다. 그런데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일본정부의 각료들 가운데서조차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망언들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것을 본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분노와 증오, 배척 일변도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능사라 할 수는 없다. 막연한 분노와 증오, 배척의 그 이면에는, 해방 이후에도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버젓이 부귀와 권세를 누렸던 친일세력들과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 식민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과거 국민들의 배일감정을 자신들의 독재정권의 강화를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했던 일부 정치가들의 불순한 의도가 남아 있고, 말로는 일본을 경멸하고 증오하면서도 일제 상품이라고 하면 사죽을 못쓰는 일부 한국인들의 이중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본 군국주의이지 일본사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일본문화의 유입을 차단하고 있는 속에서 오히려 일본의 저질문화들이 음성적으로 활개를 치는 지금의 현상을 그대로 앉아서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21세기 호혜 평등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내다보며, 우리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우리 나라와 일본의 문화교류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선린우호에 바탕한 교류의 자취를 더듬어 나가는 발길이었음을 알고 일보문화의 전면 개방에 앞서 피해의식 속에 잠겨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야 할 것이다.
참고 도서
▷ 일본 문화 바로 보기
▷ 국정교과서 국사 상·하
▷ 자료로 보는 한국사
▷ 일본어 사전
참고 문헌
▷ 기나이 지방 (오사카, 아스카, 나라, 쿄토)의 문화
추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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