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중국과 화교와의 관계
- 1949년 이전
- 1949년 이후
- 개방-개혁의 선도자
2. 세계경제에서 화상의 비중
-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
- 북미 및 대양주의 화교
- 미국 *호주 *기타지역
3. 화상 자본력에 대한 평가
4. 중국, 대만, 홍콩간 경협실테 및 화교의 대중국 투자
5. 동남아 각국에서 성공한 화교기업들
6. 화상에 성공요인
1)사업성공요인
2)경영방식
3)현지정부와 화교
4)유교영향
7. 한국 화교117년 역사(1882-1930년)
8. 한국화교에 대한 규제
Ⅲ. 결 론
Ⅱ. 본 론
1. 중국과 화교와의 관계
- 1949년 이전
- 1949년 이후
- 개방-개혁의 선도자
2. 세계경제에서 화상의 비중
-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
- 북미 및 대양주의 화교
- 미국 *호주 *기타지역
3. 화상 자본력에 대한 평가
4. 중국, 대만, 홍콩간 경협실테 및 화교의 대중국 투자
5. 동남아 각국에서 성공한 화교기업들
6. 화상에 성공요인
1)사업성공요인
2)경영방식
3)현지정부와 화교
4)유교영향
7. 한국 화교117년 역사(1882-1930년)
8. 한국화교에 대한 규제
Ⅲ. 결 론
본문내용
중국 광동성과 산동성 출신 청 상인과 일반 노무자, 농민의 수도 급속히 증가했다. 1883년 162명에 불과하던 화교는 10년후인 1893년에는 2천182명으로 급증한다.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조선의 총수입액에서 화교가 차지한 비중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청주 서원대 윤해동 박사(한국경제사)는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상무위원으로 조선에 남아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며 화상들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그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일대에 화상들을 위한 집단 거주지를 마련, 중국인거리(chinatown)가 형성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화교 상인의 특권이 사라지면서 장사 목적으로 이주하는 화교의 수는 줄어든 반면, 노무자와 채소 농사를 짓는 농민은 증가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 1만명이던 화교 인구는 1927년 5만명으로 5배 늘어 당시 조선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3%에 달했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대 식민지 산업정책의 하나로 추진한 도로, 철도, 항만, 수리시설과 같은 대형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은 화교의 조선이주를 촉진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발표된 조선국유철도 12개년계획(1927∼1939년)은 총 3억2천만원의 자본을 투입, 1천706㎞의 국유철도를 신설하는 대형사업이었다.
부산 경성대 김종한 교수는 “일제는 모자라는 노동력을 중국 동북지방과 산동성에서 모집해 데리고 왔다”고 설명한다. 1928년 화교 노동자 2만6천496명중 약 80%는 토목, 건축관계의 인부로 일했다. 화교 1세들은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해 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20년대 화교 상인들은 자본을 많이 축적했다. 화교 한 사람이 내는 영업세와 소득세는 일본인과 조선인에 비해 많았다. 화상 탕지에성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인물이었다. 화교가 소유한 제조업체의 평균 생산액은 조선인과 일본인 소유업체보다 더 높았다. 화교는 1910∼1920년대를 한국 화교자본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화교자본에 위협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20년대 후반부터 공장에 화교 노동자를 3분의 1이상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중국산 비단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규제를 강화했다.
8. 한국화교에 대한 규제
회교는 한국에 살고 있는 장기거류 외국인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는 사실상 화교에 대한 규제나 다름없었다. 화교들과 중국관련 전문가들은 과거 정부규제가 화교자본 형성의 토대를 없애 버렸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첫쩨로 67년 실시된 '외국인 토지 소유권 제한조치'. 이 조치는 외국인 이 점포는 50평 이상, 가옥의 경우 200평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외국인은 자신의 점포를 임대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사업규모를 확장할 길이 차단된 화교들은 결국 소규모 영세상으로 주저 앉아야 했다.
둘째로 열주권 제도이다. 국적취득 요건도 너무 까다롭다. 5급 이상 공무원 2명의 보증을 받아야 하고, 애국가 4절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하는 등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셋째로는 경색된 재입국 제도이다. 거류증을 가진 화교도 출국 땐 반드시 재입국 허가를 받아야하고, 또 정해진 기한내 들어와야 한다. 기한을 초과하면 거주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해외여행중 갑자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넷째로는 정기간행물 발행과 출판사 운영도 금지돼 있다. 현재 화교신문 2개와 잡지 1개가 있지만 모두 한국인의 명의를 빌린 것이다. 해방직후 무역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화교 무역상들도 외국인에게 무역상 등록을 허가하지 않도록 한 법이 나오면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현재 화교들의 가장 큰불만은 3가지. 우선, 아파트 청약, 당첨권이 없다. 둘째, 은행대출이 너무 어렵다. 셋째, 사업 자격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것이다. 화교들은 "병역의 의무를 제외한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다"며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 우리들에게 내국인 대우를 해달라" 고 호소하고 있다.
Ⅲ. 결론
19세기 중엽, 청나라는 중국인의 해외이주를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화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 1949년 이후 공산정권의 수립이후 해외화교와 국내 화교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변화하였다. 중국은 토지개혁에서 집체화 과정에 이르는 사회주의 개조가정에서 국내화교들은 지주계급으로 간주해 토지와 집을 몰수하고 송금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였다.
중국과 화교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와 화교의 관계를 살펴볼 때, 화교들은 주로 주재국과의 관계변화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역시도 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이 정책에 따라 화교의 중국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거주국과 중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주로 주재국의 정책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가 변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는 화교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개선될 때에는 화교 역시 중국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적으로 화교는 '제2의 중국혁명'이라 불리우는 경제개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제 5의 현대화라는 정치제도의 개혁에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화교의 역할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중국사회 전체의 미래를 고려할 때, 화교들은 다방면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존재들이다.
참고문헌
* 보이지 않는 제국, 화교-중국인 이야기,Sterling seagrave, 프리미엄북스, 1994년
* 화교에 상술에는 불황이 없다, 다카기 게조, 바다출판사
* 華僑네트워크, 머레이 와이텐바움 ,사뮤엘 휴즈 공저, 세종연구원, 1996년
*Internet Media Company Joins.com
*한국경제신문 <화교에 대한 기획기사> 1996년 5월 13-14일자
*김원태 <홍콩반환:중국경제의 팽창> 논문 UNTIEL 자료검색 97년
*한정휴 <화교에 대하여> UNITEL 자료검색 97년 亞洲週刊 97년
청주 서원대 윤해동 박사(한국경제사)는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상무위원으로 조선에 남아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며 화상들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그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일대에 화상들을 위한 집단 거주지를 마련, 중국인거리(chinatown)가 형성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화교 상인의 특권이 사라지면서 장사 목적으로 이주하는 화교의 수는 줄어든 반면, 노무자와 채소 농사를 짓는 농민은 증가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 1만명이던 화교 인구는 1927년 5만명으로 5배 늘어 당시 조선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3%에 달했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대 식민지 산업정책의 하나로 추진한 도로, 철도, 항만, 수리시설과 같은 대형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은 화교의 조선이주를 촉진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발표된 조선국유철도 12개년계획(1927∼1939년)은 총 3억2천만원의 자본을 투입, 1천706㎞의 국유철도를 신설하는 대형사업이었다.
부산 경성대 김종한 교수는 “일제는 모자라는 노동력을 중국 동북지방과 산동성에서 모집해 데리고 왔다”고 설명한다. 1928년 화교 노동자 2만6천496명중 약 80%는 토목, 건축관계의 인부로 일했다. 화교 1세들은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해 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20년대 화교 상인들은 자본을 많이 축적했다. 화교 한 사람이 내는 영업세와 소득세는 일본인과 조선인에 비해 많았다. 화상 탕지에성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인물이었다. 화교가 소유한 제조업체의 평균 생산액은 조선인과 일본인 소유업체보다 더 높았다. 화교는 1910∼1920년대를 한국 화교자본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화교자본에 위협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20년대 후반부터 공장에 화교 노동자를 3분의 1이상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중국산 비단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규제를 강화했다.
8. 한국화교에 대한 규제
회교는 한국에 살고 있는 장기거류 외국인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는 사실상 화교에 대한 규제나 다름없었다. 화교들과 중국관련 전문가들은 과거 정부규제가 화교자본 형성의 토대를 없애 버렸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첫쩨로 67년 실시된 '외국인 토지 소유권 제한조치'. 이 조치는 외국인 이 점포는 50평 이상, 가옥의 경우 200평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외국인은 자신의 점포를 임대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사업규모를 확장할 길이 차단된 화교들은 결국 소규모 영세상으로 주저 앉아야 했다.
둘째로 열주권 제도이다. 국적취득 요건도 너무 까다롭다. 5급 이상 공무원 2명의 보증을 받아야 하고, 애국가 4절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하는 등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셋째로는 경색된 재입국 제도이다. 거류증을 가진 화교도 출국 땐 반드시 재입국 허가를 받아야하고, 또 정해진 기한내 들어와야 한다. 기한을 초과하면 거주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해외여행중 갑자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넷째로는 정기간행물 발행과 출판사 운영도 금지돼 있다. 현재 화교신문 2개와 잡지 1개가 있지만 모두 한국인의 명의를 빌린 것이다. 해방직후 무역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화교 무역상들도 외국인에게 무역상 등록을 허가하지 않도록 한 법이 나오면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현재 화교들의 가장 큰불만은 3가지. 우선, 아파트 청약, 당첨권이 없다. 둘째, 은행대출이 너무 어렵다. 셋째, 사업 자격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것이다. 화교들은 "병역의 의무를 제외한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다"며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 우리들에게 내국인 대우를 해달라" 고 호소하고 있다.
Ⅲ. 결론
19세기 중엽, 청나라는 중국인의 해외이주를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화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 1949년 이후 공산정권의 수립이후 해외화교와 국내 화교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변화하였다. 중국은 토지개혁에서 집체화 과정에 이르는 사회주의 개조가정에서 국내화교들은 지주계급으로 간주해 토지와 집을 몰수하고 송금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였다.
중국과 화교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와 화교의 관계를 살펴볼 때, 화교들은 주로 주재국과의 관계변화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역시도 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이 정책에 따라 화교의 중국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거주국과 중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주로 주재국의 정책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가 변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는 화교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개선될 때에는 화교 역시 중국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적으로 화교는 '제2의 중국혁명'이라 불리우는 경제개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제 5의 현대화라는 정치제도의 개혁에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화교의 역할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중국사회 전체의 미래를 고려할 때, 화교들은 다방면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존재들이다.
참고문헌
* 보이지 않는 제국, 화교-중국인 이야기,Sterling seagrave, 프리미엄북스, 1994년
* 화교에 상술에는 불황이 없다, 다카기 게조, 바다출판사
* 華僑네트워크, 머레이 와이텐바움 ,사뮤엘 휴즈 공저, 세종연구원, 1996년
*Internet Media Company Joins.com
*한국경제신문 <화교에 대한 기획기사> 1996년 5월 13-14일자
*김원태 <홍콩반환:중국경제의 팽창> 논문 UNTIEL 자료검색 97년
*한정휴 <화교에 대하여> UNITEL 자료검색 97년 亞洲週刊 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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