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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관점의 설정
제2부 기독교 세계관의 구조
제3부 세계관의 실천적 의미
제2부 기독교 세계관의 구조
제3부 세계관의 실천적 의미
본문내용
은 과거를 재현하되, 어떻게 상당히 구조화된 방식으로 하느냐에 강조점이 있다.)
놀이는 모든 삶의 영역에 파고드는 것이지, 결코 삶의 어느 한 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유희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놀이(Play)란 전포괄적인 것이며 어떤 특정한 활동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놀이와 인간의 본성
놀이의 보편성의 빛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의 놀이의 정당한 위치와 목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대립적 태도가 존재한다.
어떤 이는 놀이란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요, 심지어는 우리를 특징짓는 특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즉, 사람은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이고, 이 인간적인 유희에서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신에게 심취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이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것을 유희, 즉 자기중심적인 놀이일 뿐이고, 놀이의 윤리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존재, 제작자로 정의하는 이들도 있다. 즉, 놀이가 아니라 일(노동)이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놀이란 단지 우리가 책임에서 벗어날 쉴 수 있는 휴가시간(즉, 공허한 시간-vacation의 어의에 따라)이 끝나고 나면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휴식과 기분전환(recreation)을 제공하는 도피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인간됨의 의미는 노동(일)이나 놀이-그 어느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제작자'도 아니고, '유희자'도 아니다. 따라서 노동을 다시 인간화시키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사람은 그의 심정 깊은 곳에서 '종교적인 존재'로서 그의 삶을 하나님께 대해 책임있는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의 가장 특정적인 활동은 노동도 놀이도 아닌 예배이다. 예배에도 놀이의 요소가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과 놀이 모두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삶의 종교적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놀이의 윤리'의 근거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 있는 관계란 놀이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이의 신학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놀이의 깊은 목적을 더 깊이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신학과 놀이
(1) 놀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놀이는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놀이가 놀이다우려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심령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 특성이다.
칼빈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극장(무대)이라고 하였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각기 자기의 역할을 하는 연기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자체가 찬양이다.
(2) 안식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잊고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준비 안에 안식하도록 명령받았다. 이 날은 휴일(vacation)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거룩한 날(holiday)'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구속을 기념하면서 그들은 과거를 상기하며, 안식일이 예견하는 미래를 위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 삶이란 우리의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놀이와 충만한 상태로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희년제도는 경제적 공평과 기쁨의 자유, 그리고 평화를 동반한 그 하나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놀이와 이에 상당하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들 안에서만 그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가 있다. 성경은 낙원에서의 삶으로 시작하여 즐거움에 찬성(城)으로 끝마쳐진다. '놀이(Play)'는 우리의 소명의 한 부분이며, 창조 명령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있는 관계 가운데에서 기쁨과 축제를 누리는 것이다. 놀이는 자유로운 시간이란 의미보다는 자유로운 정신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놀이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첫째로 마음의 태도이다. 둘째로 다양한 여러 활동이다.
놀이(여가선용)의 윤리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점에 대해 세 가지 주의사항을 지적했다. 첫째, 바르지 못하고 부정한 놀이에서는 기쁨을 찾지 말고, 둘째, 정신적·정서적 균형과 자기통제를 잃지 말고, 셋째, 시기나 인격에 맞지 않는 놀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종류의 놀이도 그 자체로서는 인격을 바르게 구성하게 할 수 없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놀이 그 자체는 개인의 발전을 위한 선악간의 가능성의 활동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놀이는 인간됨에 기여해야 하며, 건강과 복지와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놀이도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놀이가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며, 우리가 그가 준비하신 것 안에서 안식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놀이에 대한 나의 이론조차도 그렇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놀이가 그런 성격을 지는 것이라면, 그 놀이에서 내가 이기든 지든 간에 나는 나의 자리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생명과 나의 생명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 대한 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승리만이 최선의 것은 아니며, 그것이 주된 것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들의 '놀이적 태도(Playful attitude)'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여가의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명령한(Playfull) 태도로 일하며, 놀고, 가르치며, 배우고, 살며,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분명히 오고야 말 '평화(Shalom)'의 나라를 선취(先取, anticipate)하여 살고,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놀이는 모든 삶의 영역에 파고드는 것이지, 결코 삶의 어느 한 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유희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놀이(Play)란 전포괄적인 것이며 어떤 특정한 활동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놀이와 인간의 본성
놀이의 보편성의 빛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의 놀이의 정당한 위치와 목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대립적 태도가 존재한다.
어떤 이는 놀이란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요, 심지어는 우리를 특징짓는 특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즉, 사람은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이고, 이 인간적인 유희에서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신에게 심취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이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것을 유희, 즉 자기중심적인 놀이일 뿐이고, 놀이의 윤리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존재, 제작자로 정의하는 이들도 있다. 즉, 놀이가 아니라 일(노동)이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놀이란 단지 우리가 책임에서 벗어날 쉴 수 있는 휴가시간(즉, 공허한 시간-vacation의 어의에 따라)이 끝나고 나면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휴식과 기분전환(recreation)을 제공하는 도피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인간됨의 의미는 노동(일)이나 놀이-그 어느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제작자'도 아니고, '유희자'도 아니다. 따라서 노동을 다시 인간화시키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사람은 그의 심정 깊은 곳에서 '종교적인 존재'로서 그의 삶을 하나님께 대해 책임있는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의 가장 특정적인 활동은 노동도 놀이도 아닌 예배이다. 예배에도 놀이의 요소가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과 놀이 모두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삶의 종교적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놀이의 윤리'의 근거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 있는 관계란 놀이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이의 신학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놀이의 깊은 목적을 더 깊이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신학과 놀이
(1) 놀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놀이는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놀이가 놀이다우려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심령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 특성이다.
칼빈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극장(무대)이라고 하였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각기 자기의 역할을 하는 연기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자체가 찬양이다.
(2) 안식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잊고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준비 안에 안식하도록 명령받았다. 이 날은 휴일(vacation)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거룩한 날(holiday)'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구속을 기념하면서 그들은 과거를 상기하며, 안식일이 예견하는 미래를 위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 삶이란 우리의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놀이와 충만한 상태로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희년제도는 경제적 공평과 기쁨의 자유, 그리고 평화를 동반한 그 하나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놀이와 이에 상당하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들 안에서만 그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가 있다. 성경은 낙원에서의 삶으로 시작하여 즐거움에 찬성(城)으로 끝마쳐진다. '놀이(Play)'는 우리의 소명의 한 부분이며, 창조 명령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있는 관계 가운데에서 기쁨과 축제를 누리는 것이다. 놀이는 자유로운 시간이란 의미보다는 자유로운 정신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놀이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첫째로 마음의 태도이다. 둘째로 다양한 여러 활동이다.
놀이(여가선용)의 윤리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점에 대해 세 가지 주의사항을 지적했다. 첫째, 바르지 못하고 부정한 놀이에서는 기쁨을 찾지 말고, 둘째, 정신적·정서적 균형과 자기통제를 잃지 말고, 셋째, 시기나 인격에 맞지 않는 놀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종류의 놀이도 그 자체로서는 인격을 바르게 구성하게 할 수 없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놀이 그 자체는 개인의 발전을 위한 선악간의 가능성의 활동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놀이는 인간됨에 기여해야 하며, 건강과 복지와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놀이도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놀이가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며, 우리가 그가 준비하신 것 안에서 안식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놀이에 대한 나의 이론조차도 그렇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놀이가 그런 성격을 지는 것이라면, 그 놀이에서 내가 이기든 지든 간에 나는 나의 자리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생명과 나의 생명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 대한 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승리만이 최선의 것은 아니며, 그것이 주된 것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들의 '놀이적 태도(Playful attitude)'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여가의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명령한(Playfull) 태도로 일하며, 놀고, 가르치며, 배우고, 살며,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분명히 오고야 말 '평화(Shalom)'의 나라를 선취(先取, anticipate)하여 살고,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