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붕당정치의 발생
3. 붕당정치의 변질
4. 탕평론의 대두
5. 탕평책의 전개
(1)영조의 탕평책
6. 결론
〈참고 문헌〉
2. 붕당정치의 발생
3. 붕당정치의 변질
4. 탕평론의 대두
5. 탕평책의 전개
(1)영조의 탕평책
6. 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인조 반정을 단행한 서인으로서, 그들은 남인을 비롯한 여타의 붕당과 공존체제를 구축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붕당정치는 현실사회의 모순에 본질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한 한계가 있지만, 그 이전에 비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세력의 폭이 커졌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치형태라 할 수 있고, 정치집단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갈등과 대립을 완화하고 조절하는 등의 정치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 정석종 등 공저, 앞의 책, p119∼120
초기의 붕당은 상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붕당의 원칙을 형식적으로라도 따랐다.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붕당 그 자체가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은 붕당의 개념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데 이것은 사림집단 자체를 진붕으로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림의 집권으로 그 어떠한 붕당이라도 그들이 사림을 기반으로 하고 성리학적 체계를 이념으로 내세운다고 하면 용인되었으며, 따라서 붕당정치의 전개는 필연적이었다. 실제로 17세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붕당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안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척신세력이 크게 대두하면서 성리학의 이념체계가 퇴색되고 상대세력의 공존을 생명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원칙은 깨어져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일당전제의 추세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일당전제의 추세와 정치의 무질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첫째, 붕당의 역하관계가 깨지면서 특정 붕당의 비대화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갔다. 둘째, 붕당은 공당으로서 위치를 상실하고 점차 사당(私黨)화되어 갔다. 이러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국왕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은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시도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숙종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탕평책은 영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곧 탕평을 실시하였으나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당시 정쟁의 초점은 신임사화의 판결문인 임인옥안(壬寅獄案)에 대한 시비문제였으나 시비의 문제는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충역과 흑백의 논리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당쟁만을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영조는 이러한 정국을 수습하는 길은 왕권의 강화. 안정에 있다고 보아 노소론을 자의로 조정하면서 군제개혁,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확실히 조성하였다. 특히 영조는 붕당 사이의 역학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탕평을 명분으로 내세워 누누히 탕평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는 왕권을 제약하는 힘의 요소로서의 기존의 붕당을 해체하고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 이른바 ‘찬탕파’를 구성, 그들을 왕권의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특별한 배려 속에서 찬탕파는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그 구성은 대체로 노론과 소론의 온건자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영조의 왕권안정과 더불어 그 기반을 굳히며 당시 노론.소론 사이의 원인이었던 신임사화 시비에 대한 절충적 판정이 이른바 사유처분을 단행토록 하여 노론, 소론이 보합하고 병용하는데 성공하여 정국이 안정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국은 이젠 노론, 소론의 대립이 아니라 찬탕파, 반탕파의 대립으로 변해갔다. 반탕론의 제기는 노.소의 대립 속에서 영조의 즉위로 집권의 명분을 찾아 소론을 제거하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던 노론이 찬탕파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자당의 입장을 강화하고자 한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반탕론 자체는 다른 한편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그것에 제약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정국 운용은 영조가 의도하듯이 찬탕파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찬탕파가 척신화되면서 결국 영조 말년의 정치형세는 척신정치로 이행되게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들은 왕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기반이 해체되지 않는 한 정조가 비록 권신과 척신을 배제하고 왕권의 강화를 새로이 시도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쉽게 이룩될 수 없었다. 나아가 다음 시대에 척족정치, 즉 외척세도정치가 전개됨은 이미 영조 말년 경에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17세기에 있어서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17세기 말 이래로 붕당이 척신과 결부되면서 그 본질이 변화되면서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사당적 붕당은 자당의 이해관계와 세력증대를 위하여 왕위계승문제에 적극 개입하기에 이르러 결국 노, 소론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 와중에서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정상화를 시도하여 탕평을 내세우고 찬탕파를 육성하였다. 이와 같이 영조는 정국의 안정을 꾀하면서 그와 동시에 세제의 개혁과 양역의 변통과 같은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필자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그것이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을 주도할 수 있게 한 정국의 흐름이 존재하였던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정조대의 탕평책도 개혁적인 정책의 추진이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탕평책이 정국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하여 제시되었고, 정치세력을 재조정을 통해 국왕권의 강화를 그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정치생명을 건 시비 논쟁, 계층적 분열과 지역적 분열, 도덕과 인심의 타락, 원칙이 일관성 없이 뒤집히는 현상 등 17세기 말∼18세기 초 당쟁시절의 정치·사회적 병폐와 유사한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탕평정치를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참고 문헌〉
정석종 등 공저, 《한국사 9 : 중세사회의 해체 1》, 한길사, 1994년
전수병, 김갑동 공저,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 서경문화사 , 1998년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한국사 9 : 조선 : 양반관료국가의 성립》,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이기남, 〈光海朝初期의 政治勢力과 權力構造: 朋黨政治 定着에 있어서 初期段階의 一樣相〉 국민대학교, 1988년
이상백, 진단학회 편, 《韓國史 3 : 近世前期》, 을유문화사, 1962년
) 정석종 등 공저, 앞의 책, p119∼120
초기의 붕당은 상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붕당의 원칙을 형식적으로라도 따랐다.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붕당 그 자체가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은 붕당의 개념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데 이것은 사림집단 자체를 진붕으로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림의 집권으로 그 어떠한 붕당이라도 그들이 사림을 기반으로 하고 성리학적 체계를 이념으로 내세운다고 하면 용인되었으며, 따라서 붕당정치의 전개는 필연적이었다. 실제로 17세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붕당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안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척신세력이 크게 대두하면서 성리학의 이념체계가 퇴색되고 상대세력의 공존을 생명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원칙은 깨어져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일당전제의 추세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일당전제의 추세와 정치의 무질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첫째, 붕당의 역하관계가 깨지면서 특정 붕당의 비대화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갔다. 둘째, 붕당은 공당으로서 위치를 상실하고 점차 사당(私黨)화되어 갔다. 이러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국왕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은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시도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숙종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탕평책은 영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곧 탕평을 실시하였으나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당시 정쟁의 초점은 신임사화의 판결문인 임인옥안(壬寅獄案)에 대한 시비문제였으나 시비의 문제는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충역과 흑백의 논리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당쟁만을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영조는 이러한 정국을 수습하는 길은 왕권의 강화. 안정에 있다고 보아 노소론을 자의로 조정하면서 군제개혁,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확실히 조성하였다. 특히 영조는 붕당 사이의 역학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탕평을 명분으로 내세워 누누히 탕평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는 왕권을 제약하는 힘의 요소로서의 기존의 붕당을 해체하고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 이른바 ‘찬탕파’를 구성, 그들을 왕권의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특별한 배려 속에서 찬탕파는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그 구성은 대체로 노론과 소론의 온건자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영조의 왕권안정과 더불어 그 기반을 굳히며 당시 노론.소론 사이의 원인이었던 신임사화 시비에 대한 절충적 판정이 이른바 사유처분을 단행토록 하여 노론, 소론이 보합하고 병용하는데 성공하여 정국이 안정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국은 이젠 노론, 소론의 대립이 아니라 찬탕파, 반탕파의 대립으로 변해갔다. 반탕론의 제기는 노.소의 대립 속에서 영조의 즉위로 집권의 명분을 찾아 소론을 제거하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던 노론이 찬탕파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자당의 입장을 강화하고자 한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반탕론 자체는 다른 한편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그것에 제약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정국 운용은 영조가 의도하듯이 찬탕파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찬탕파가 척신화되면서 결국 영조 말년의 정치형세는 척신정치로 이행되게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들은 왕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기반이 해체되지 않는 한 정조가 비록 권신과 척신을 배제하고 왕권의 강화를 새로이 시도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쉽게 이룩될 수 없었다. 나아가 다음 시대에 척족정치, 즉 외척세도정치가 전개됨은 이미 영조 말년 경에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17세기에 있어서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17세기 말 이래로 붕당이 척신과 결부되면서 그 본질이 변화되면서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사당적 붕당은 자당의 이해관계와 세력증대를 위하여 왕위계승문제에 적극 개입하기에 이르러 결국 노, 소론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 와중에서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정상화를 시도하여 탕평을 내세우고 찬탕파를 육성하였다. 이와 같이 영조는 정국의 안정을 꾀하면서 그와 동시에 세제의 개혁과 양역의 변통과 같은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필자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그것이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을 주도할 수 있게 한 정국의 흐름이 존재하였던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정조대의 탕평책도 개혁적인 정책의 추진이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탕평책이 정국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하여 제시되었고, 정치세력을 재조정을 통해 국왕권의 강화를 그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정치생명을 건 시비 논쟁, 계층적 분열과 지역적 분열, 도덕과 인심의 타락, 원칙이 일관성 없이 뒤집히는 현상 등 17세기 말∼18세기 초 당쟁시절의 정치·사회적 병폐와 유사한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탕평정치를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참고 문헌〉
정석종 등 공저, 《한국사 9 : 중세사회의 해체 1》, 한길사, 1994년
전수병, 김갑동 공저,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 서경문화사 , 1998년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한국사 9 : 조선 : 양반관료국가의 성립》,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이기남, 〈光海朝初期의 政治勢力과 權力構造: 朋黨政治 定着에 있어서 初期段階의 一樣相〉 국민대학교, 1988년
이상백, 진단학회 편, 《韓國史 3 : 近世前期》, 을유문화사, 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