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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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룬 것이다. 또한 그 집에서 정계 인사와 면식을 얻고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정치에 대한 야망을 잊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직업은 성직자였으나 야망이 정치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양대 정당인 휘그당과 토리당을 전전하면서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고 신랄한 풍자로 정적을 공격했기 때문에 정계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이러한 그의 정치활동의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최초의 시는 대단한 것이 못되어, 드라이든(Dryden)이 이것을 보고 '여보게 스위프트, 자네는 결코 시인이 되지는 못하겠네.'라고 했다지만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산문인 '서적의 싸움(The Battle of the Books)'과 '통 이야기(A Tale of a Tub)'는 극히 중요한 작품이다. 템플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논제를 들어 <고전과 근대학문>이라는 글을 썼는데, 고전편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의 논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스위프트는 이러한 논전을 풍자와 유머가 가득 찬 필치로 다루고 있다. 고전편에는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영도하에 템플이 지휘관이 되고 근대편에서는 밀턴, 드라이든, 데카르트 등이 참가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고전편이 약간 유리하나 입씨름은 끝나지 않고 미해결인 채 남게 된다.
'통 이야기'는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선원들이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면 빈 통을 던져서 난을 피한다는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당시 종교와 정부의 약점을 파고들어 공박하는 패들을 피해야 할 빈 통이라는 암시인 것이다. 이 풍자 작품에서, 어떤 아버지가 피터, 마틴, 재크에게 각각 코트를 물려 주고 절대로 변형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는데 피이터는 카톨릭을, 마틴은 마르틴 루터를, 재크는 비국교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삼형제는 코트가 유행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이것을 변형할 구실을 각각 아버지의 유언장에서 찾는다.
스위프트는 피터에게 가혹한 화살을 보내고, 재크는 경멸하는 태도로 대했으며 자기가 속해 있는 마틴은 온당하게 다루었지만 이 역시 그다지 경건한 태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 자체에 대한 풍자인 것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다.
스위프트의 무어 파크 시대는 그와 한평생 기묘한 관련을 지녔던 스텔라를 그가 가정교사로 가르친 시기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템플 가에 기식하고 있던 과부의 딸이었는데, 그는 염세주의자답지 않은 순수한 애정으로 일생을 두고 그녀를 대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아일랜드에서 스텔라와 문서상 결혼한 형식을 취했으나 같이 생활한 일은 없고 밤에는 제삼자가 있는 곳에서만 둘이 만났다고 하니까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치가 않다.
그가 부사제직을 맡아 더불린으로 가고 난 후에도 정치 문제에 관심을 보인 팜플렛을 많이 써서 풍자정신이 왕성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걸작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를 1726년에 발효하지 않았다면 아마 스위프트는 18세기의 미미한 산문가의 한 사람으로서의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불분명)
'걸리버 여행기' 에 대하여
그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모형사회를 빌어서 궁전의 허례, 왕족의 교만, 고관들의 아첨, 정치의 부패, 정당과 종파의 무의미한 싸움, 학문의 편협, 재판의 불공평, 교육의 무능 등등-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문물·관습을 뼈아프게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제 4 부인 말 나라에서는 인간 및 인간성 자체를 매도하고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풍부한 유머에 미소가 떠오르고 예리한 풍자에 쾌감을 느끼지만 ,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처가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듯한 아픔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술한 '서적의 싸움' 또는 '통 이야기'에 비해서 이 작품이 탁월한 것은, 먼저 두 작품은 풍자를 위한 풍자에 그쳤고, 풍자하는 대상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으면 어지간히 무미건조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는 문학적 흥취를 느낄 수 있고, 보다 근원적이고 공통성이 있는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립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역사적 예비지식 없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해서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동화가 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스위프트의 염세주의는 과연 절망의 표시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생활의 근거를 이루는 정신적 토대였을까? 그의 성품이나 생활태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명랑하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온화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술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풍자의 목적이 개정에 있지 결코 파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스위프트 자신이 '풍자는 결함의 지적이 아니라 누구나가 고칠 수 있음을 말한다'라고 그의 진의를 시로 읊은 일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결함에 대해 싸늘한 경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분노는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정의감이 밑받침이 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스위프트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그 뒤에 숨은 연민까지도 느끼는 것이다.
1728년 정월 어느 일요일 손님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스텔라의 부음을 들었다. 몸이 불편해서 장례식에 나가지 못하고 그날 밤은 교회의 촛불이 안 비치는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냈다. 그는 그 후에도 20년을 더 살았으나 승원의 구석진 방에서 적막한 그날그날을 보낼 뿐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현기증과 귀울림(난청)이 있었는데, 이것이 차차 정신착란증으로 악화되어서 정신병자의 고통 속에서 수년을 더 살다가 1745년 10월에 영면했다. 유해는 유언대로 밤중에 스텔라와 나란히 매장되었으며, 유산은 정신병원 설립에 기증되었다.
그는 인류를 향해서 독화살을 쏜 셈이지만, 2백여 년간을 인류를 즐겁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까지도 이 화살을 가지고 놀게 되었으나 이것은 스위프트가 뜻한 바는 아닐 것이다. '이제 분노가 그 가슴을 괴롭히지 않는 곳에 잠들었노라'라고 스스로 묘비명을 붙인 무덤 속에 스위프트의 분노는 고이 잠들어 있다.

키워드

  • 가격1,400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03.10.31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9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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