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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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치

2. 사회·경제

3. 문화

4. 고려·조선과의 관계

본문내용

의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도안(圖案)에도 산수·인물·화조(花烏) 등 변화를 보였다. 건축은 명초에 난징[南京]에 축조한 황성·궁성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를 본뜬 베이징의 궁성이 남아 있어 현재도 베이징 경관(景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도 이 시대에 축조되었고,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대탑(大塔)의 형식을 본뜬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세워져 대정각사(大正覺寺:五塔寺)의 탑(1473 건립)이 그 유구(遺構)로 남아 있다.
<고려·조선과의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년(공민왕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 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를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몽골풍 머리(剃頭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오빠인 기철(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실지(失地)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9년 명으로부터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오자 이를 환영하고 성준(成准) 등을 처음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명태조의 성절(聖節:생일)을 축하하였고, 앞서 일시 정지한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다시 폐지하였다. 70년, 고려는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원과 절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북원(北元:1368년 이후 원을 북원이라 함)에서도 꾸준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계속하였고, 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 정권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親元)으로 급변, 이 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은 고려의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되고,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등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가는 명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 고려는 명·북원에 등거리 외교로 대처하다가 85년에 이르러 명사(明使)가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通聘)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으며, 87년에는 원복(元服)을 폐지하고 명제(明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착된 양국관계도 수년 후 고려왕조의 붕괴로 끝났다. 92년 조선왕조를 세운 이태조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 또 국호의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국호와 국왕의 칭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93년 태조는 말 9,800필을 보내고 고려 때 명으로부터 받았던 고려국왕의 금인(金印)을 반환하였으나 명은 여진(女眞) 및 세공(歲貢)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국왕의 인신(印信)을 쉽사리 보내 주지 않다가 태종이 즉위한 1400년에 조선국왕의 고명(誥命:왕위승인문서)과 인장을 보내와 대명(對明) 외교관계는 조선왕조 수립 후 8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408년에는 이태조가 죽자 명은 고려 공민왕 이후 처음으로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와 이후 조선은 역대의 국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명에 주청(奏請)하여 ‘책봉(冊封)’이라는 승인을 받았고, 국왕의 사후에는 이를 고하여 시호를 받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또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가의 주요 대사를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등 ‘사대(事大)’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내정·외교에 근본적인 제약이 없고 자주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종주·종속관계도 아니고, 명은 명목상 종주적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에의 세공문제(歲貢問題)는 처음에 금 150냥, 은 700냥의 과중한 부담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다른 토산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다가 29년(세종 11) 이를 면제하고 우(牛)·마(馬)·포(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후부터 조선과 명은 경제·문화의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그 후 200년간 별다른 변동 없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외교에 있어서도 명나라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사절(使節)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원단(元旦)에 보내는 정조사(正朝使), 황제부부의 탄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와 천추사(千秋使),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 정례적으로 연 4차 사행(使行)을 보냈다. 이 밖에 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을 수시로 보냈는데, 사행일행은 40여 명이 공인된 인원이었다. 이 사행에 따르는 조공은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으로 예물과 답례물 형식으로 물물 교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행일행이 가지고 간 물화에 의해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는데, 북경에서는 조선사신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이, 서울에서는 명사가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이 사무역의 중심지였다. 명에서 제정한 명률(明律)은 조선 초에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이름으로 번역[吏讀文]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을 운용하는 데 그 해당조문이 없을 때는 456개조로 되어 있는 《대명률》의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 법률운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국초부터 특히 해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을 구입하고 이를 재간행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명의 견포(絹布) 등 고급물품을 들여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국내의 생산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명 관계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이 3차의 원군(援軍)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명은 이 무렵 말기적 증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대하였고, 이 틈에 만주의 청세력은 더욱 팽대해져 조선은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게 되고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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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8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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