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장보고의 해상활동이 삼국에 미친 영향
2.해상왕 장보고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 발해-일본-당 무역연구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 장보고 선단의 무역항로
3.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4.장보고의 관직은
5.그의 중요한 업적은
6.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2.해상왕 장보고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 발해-일본-당 무역연구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 장보고 선단의 무역항로
3.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4.장보고의 관직은
5.그의 중요한 업적은
6.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본문내용
싼 가격의 물건들로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이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대금을 선납하기도 하였다.
840년에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다자이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이 때 청해진은 다자이후와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맺지는 못하였으나,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은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한 장보고가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반이나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보고가 일본과 교역했던 물건의 종류나 가치에 대한 것은 지금 현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상당히 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교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신무왕의 즉위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은 역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염장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보고에 대하여, 일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장보고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 또한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에 살해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에 당 나라와 장보고의 왕래가 841년 이후에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속일본후기』의 장보고 사망 연대 및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보고는 841년에 염장에게 살해당한 것이 확실하다. 문성왕에게는 본래 박씨 성의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어보내려다 좌절되어 살해되었지만, 위흔(魏昕)이라는 이름도 사용한 김양은 장보고가 죽은 뒤인 842년(문성왕 4년) 3월에 자기의 딸을 국왕의 둘째 왕비로 결혼시켰다.
여하튼 딸과 국왕의 혼사 문제로 인하여 장보고가 피살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장보고의 사망과 함께 청해진 해상왕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청해진은 염장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속일본후기』에 염장이 자신의 부하인 이소정(李少貞)을 일본에 보내어, 장보고 당시 일본으로 가져간 무역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창진 같은 사람이 염장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장보고 사망 이후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예를 들어, 한 때 대당매물사로 활동했던 최훈(崔暈)은 당 나라 연수(漣水)의 신라방으로 망명하였다. 또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관직은?
① 중국의 관직 : 무령군중소장
② 흥덕왕 시기 : 청해진대사
③ 신무왕 시기 : 감의군사
④ 문성왕 시기 : 진해장군
그의 중요한 업적은?
① 민간무역 질서를 태동시켜 9C 동아시아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끔
②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발전시킴
③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확대
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장보고 세력이 확대되고 그의 딸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되면서 신라 귀족들이 정치적 위협을 느꼈고, 장보고에게 흡수된 군소 무역업자들의 반발등으로 살해됨
http://www.changpogo.or.kr/html/material_index.htm
http://kdaq.empas.com/dbdic/db_view.tsp?ps=src&num=3303760
http://user.chollian.net/~polk/jang04.html
http://www.inavyclub.com/navyworld/jangbogo.html
840년에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다자이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이 때 청해진은 다자이후와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맺지는 못하였으나,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은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한 장보고가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반이나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보고가 일본과 교역했던 물건의 종류나 가치에 대한 것은 지금 현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상당히 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교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신무왕의 즉위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은 역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염장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보고에 대하여, 일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장보고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 또한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에 살해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에 당 나라와 장보고의 왕래가 841년 이후에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속일본후기』의 장보고 사망 연대 및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보고는 841년에 염장에게 살해당한 것이 확실하다. 문성왕에게는 본래 박씨 성의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어보내려다 좌절되어 살해되었지만, 위흔(魏昕)이라는 이름도 사용한 김양은 장보고가 죽은 뒤인 842년(문성왕 4년) 3월에 자기의 딸을 국왕의 둘째 왕비로 결혼시켰다.
여하튼 딸과 국왕의 혼사 문제로 인하여 장보고가 피살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장보고의 사망과 함께 청해진 해상왕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청해진은 염장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속일본후기』에 염장이 자신의 부하인 이소정(李少貞)을 일본에 보내어, 장보고 당시 일본으로 가져간 무역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창진 같은 사람이 염장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장보고 사망 이후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예를 들어, 한 때 대당매물사로 활동했던 최훈(崔暈)은 당 나라 연수(漣水)의 신라방으로 망명하였다. 또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관직은?
① 중국의 관직 : 무령군중소장
② 흥덕왕 시기 : 청해진대사
③ 신무왕 시기 : 감의군사
④ 문성왕 시기 : 진해장군
그의 중요한 업적은?
① 민간무역 질서를 태동시켜 9C 동아시아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끔
②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발전시킴
③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확대
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장보고 세력이 확대되고 그의 딸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되면서 신라 귀족들이 정치적 위협을 느꼈고, 장보고에게 흡수된 군소 무역업자들의 반발등으로 살해됨
http://www.changpogo.or.kr/html/material_index.htm
http://kdaq.empas.com/dbdic/db_view.tsp?ps=src&num=3303760
http://user.chollian.net/~polk/jang04.html
http://www.inavyclub.com/navyworld/jangbog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