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장보고’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
Ⅱ. 8~9세기 동아시아 삼국의 정세
Ⅲ. 장보고의 생애와 활동
Ⅳ. 장보고 등장배경
Ⅴ. 해상왕국 청해진
Ⅵ. 청해진의 몰락과 그 이후의 일
Ⅶ. 장보고에 대한 평가
Ⅷ.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의의
Ⅸ. 장보고가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
결론
Ⅱ. 8~9세기 동아시아 삼국의 정세
Ⅲ. 장보고의 생애와 활동
Ⅳ. 장보고 등장배경
Ⅴ. 해상왕국 청해진
Ⅵ. 청해진의 몰락과 그 이후의 일
Ⅶ. 장보고에 대한 평가
Ⅷ.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의의
Ⅸ. 장보고가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
결론
본문내용
물론 정치나 외교 방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② 대일(對日)교역
신라의 일본과의 교역은 당나라와의 교역보다 상대적으로 빈약했으며 8세기 중엽 이후는 거의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외교 사절의 교환 등 국가 사이의 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와 일본 사이의 공무역은 원천적으로 중단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공무역이 중단되자 사무역이 증대되었고, 특히 중국 물품을 구하고자 하는 일본측의 필요성 때문에 신라 상인들이 당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항해술이나 조선술은 일본과 중국 대륙을 직접 자유롭게 왕래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 결과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중간에 위치한 신라가 자연스레 중개 무역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 신라와 일본 사이의 무역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9세기 초반에 신라 상인들이 일본 큐슈지역에 자주 표류했다거나, 대마도 인근 해역에 신라 선박 20여척이 나타나자 일본이 해적 선단으로 오해했다거나, 일본 정부가 대마도에 신라어 통역관을 파견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즈음 신라 본토인뿐 아니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 출신 무역상도 일본과의 교역에 종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양주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라 무역상 왕청이 819년에 일본을 향해 항해를 하다 3개월 동안이나 표류하며 고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장보고 자신도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복강)지역의 지방 행정관과 만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당나라에 있는 신라인들의 교역범위가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해준다.
청해진 설치 이후에 장보고는 일본과의 교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신라와 일본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삼국의 해상 무역을 총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824년에 장보고는 ‘대사’의 직함을 갖고 일본에 다녀온 바 있다. 이러한 경험으로 장보고는 일본과의 무역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다음에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장보고가 일본에 파견한 무역 사절단을 회역사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북큐슈의 하카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자이후를 중심으로 대외 교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하카다에 무역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 관원들과 직접 교역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청해진의 회역사가 갖고 온 물건을 일본에서는 ‘당국화물’이라 했다. 이 물건들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비싼 가격의 물건들로 상당히 있었다.
840년에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다자이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청해진은 다자이후와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맺지는 못했으나,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은 허락을 받았다. 이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한 장보고가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반이나 교류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보고가 일본과 교역했던 물건의 종류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상당히 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교역했을 것이다.
③ 이슬람지역에 대한 해상무역활동 김문경, 청해진의 장보고와 동아시아, 향토문화진흥원, 1998. p153~160에 잘 정리되어 있음.
신라 무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아라비아페르시아 등 이슬람 교권의 상인들과 교역한 일이다. 한국이나 중국측 문헌에서는 신라와 이슬람 여러 나라가 직접 무역을 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슬람 쪽의 문헌인 슈라이만(Sulaiman)의 중국과 인도소식(851), 알마소디(Al-Masoudi, ?~965)의 황금초원과 보석광(10세기 중엽) 등에는 아랍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견문에 관한 기록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무하마드 깐수, 新羅와 西域間의 文物交流, 『新羅西域交流史』, 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hibah, 820~912)는 그의 저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무슬림들의 신라내왕에 관하여 서술한 뒤, 신라가 수출한 상품명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신라 통일을 전후하여 당의 서울 장안에는 거의 만 명에 가까운 서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천보(742~755) 이후로 급증하여 780년경에는 장안에만도 5만여 명에 이르렀다. 해상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은 인도양을 넘어 동남아시아 일대에까지 무역시장을 넓혔으며, 8세기 초에는 남중국의 무역중심지 광주로 진출하고 다시 복주천주명주로 북상하여 운하를 따라 소주 양주에까지 그들의 시장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신라는 통일 이후 당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면서 사신을 비롯하여 승려유학생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이미 신라의 서울 경주는 당나라 장안에서 크게 유행하던 서역풍의 정취를 닮아가고 있었다. ‘삼십오금입택’으로 표현되던 특수 부유층들은 사치성 소비재를 제공해 주는 이슬람 상인들의 왕래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처럼 중국에 무역의 거점인 ‘번방’을 구축하고 무역권을 확대해 가던 이슬람 상인들은 장보고 휘하의 재당신라인 무역업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상거래를 하였을 것이다. 신라 귀족들이 애용하던 많은 이국상품은 장보고 선단을 비롯한 재당 신라인들이 전달하였을 것이다.
④ 장보고 선단의 무역규모
일본왕실의 유물 보관소인 정창원(正倉院) 도록에는 당시 교역품이 소개되어 있다, 장보고 선단이 취급한 물품은 가치가 높아 미리 구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할 정도였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이들 물품을 사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 말안장 등을 바쳤는데,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민간에 맡겨 교역할 수 있게 하라. 다만 백성으로 하여금 값을 어기고 다투다가 가산이 기울지 않도록 하라 - 속일본후기 841년 2월 기록 -
장보고가 가져온 물건을 경쟁적으로 구매하려다 보니 가격이 폭등했고, 비싼 물건을 사려고 가산까지 탕진한 사태가 벌어지자 국가가 개입하여 막으려 했던 것
② 대일(對日)교역
신라의 일본과의 교역은 당나라와의 교역보다 상대적으로 빈약했으며 8세기 중엽 이후는 거의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외교 사절의 교환 등 국가 사이의 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와 일본 사이의 공무역은 원천적으로 중단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공무역이 중단되자 사무역이 증대되었고, 특히 중국 물품을 구하고자 하는 일본측의 필요성 때문에 신라 상인들이 당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항해술이나 조선술은 일본과 중국 대륙을 직접 자유롭게 왕래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 결과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중간에 위치한 신라가 자연스레 중개 무역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 신라와 일본 사이의 무역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9세기 초반에 신라 상인들이 일본 큐슈지역에 자주 표류했다거나, 대마도 인근 해역에 신라 선박 20여척이 나타나자 일본이 해적 선단으로 오해했다거나, 일본 정부가 대마도에 신라어 통역관을 파견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즈음 신라 본토인뿐 아니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 출신 무역상도 일본과의 교역에 종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양주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라 무역상 왕청이 819년에 일본을 향해 항해를 하다 3개월 동안이나 표류하며 고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장보고 자신도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복강)지역의 지방 행정관과 만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당나라에 있는 신라인들의 교역범위가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해준다.
청해진 설치 이후에 장보고는 일본과의 교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신라와 일본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삼국의 해상 무역을 총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824년에 장보고는 ‘대사’의 직함을 갖고 일본에 다녀온 바 있다. 이러한 경험으로 장보고는 일본과의 무역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다음에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장보고가 일본에 파견한 무역 사절단을 회역사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북큐슈의 하카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자이후를 중심으로 대외 교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하카다에 무역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 관원들과 직접 교역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청해진의 회역사가 갖고 온 물건을 일본에서는 ‘당국화물’이라 했다. 이 물건들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비싼 가격의 물건들로 상당히 있었다.
840년에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다자이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청해진은 다자이후와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맺지는 못했으나,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은 허락을 받았다. 이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한 장보고가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반이나 교류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보고가 일본과 교역했던 물건의 종류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상당히 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교역했을 것이다.
③ 이슬람지역에 대한 해상무역활동 김문경, 청해진의 장보고와 동아시아, 향토문화진흥원, 1998. p153~160에 잘 정리되어 있음.
신라 무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아라비아페르시아 등 이슬람 교권의 상인들과 교역한 일이다. 한국이나 중국측 문헌에서는 신라와 이슬람 여러 나라가 직접 무역을 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슬람 쪽의 문헌인 슈라이만(Sulaiman)의 중국과 인도소식(851), 알마소디(Al-Masoudi, ?~965)의 황금초원과 보석광(10세기 중엽) 등에는 아랍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견문에 관한 기록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무하마드 깐수, 新羅와 西域間의 文物交流, 『新羅西域交流史』, 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hibah, 820~912)는 그의 저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무슬림들의 신라내왕에 관하여 서술한 뒤, 신라가 수출한 상품명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신라 통일을 전후하여 당의 서울 장안에는 거의 만 명에 가까운 서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천보(742~755) 이후로 급증하여 780년경에는 장안에만도 5만여 명에 이르렀다. 해상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은 인도양을 넘어 동남아시아 일대에까지 무역시장을 넓혔으며, 8세기 초에는 남중국의 무역중심지 광주로 진출하고 다시 복주천주명주로 북상하여 운하를 따라 소주 양주에까지 그들의 시장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신라는 통일 이후 당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면서 사신을 비롯하여 승려유학생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이미 신라의 서울 경주는 당나라 장안에서 크게 유행하던 서역풍의 정취를 닮아가고 있었다. ‘삼십오금입택’으로 표현되던 특수 부유층들은 사치성 소비재를 제공해 주는 이슬람 상인들의 왕래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처럼 중국에 무역의 거점인 ‘번방’을 구축하고 무역권을 확대해 가던 이슬람 상인들은 장보고 휘하의 재당신라인 무역업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상거래를 하였을 것이다. 신라 귀족들이 애용하던 많은 이국상품은 장보고 선단을 비롯한 재당 신라인들이 전달하였을 것이다.
④ 장보고 선단의 무역규모
일본왕실의 유물 보관소인 정창원(正倉院) 도록에는 당시 교역품이 소개되어 있다, 장보고 선단이 취급한 물품은 가치가 높아 미리 구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할 정도였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이들 물품을 사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 말안장 등을 바쳤는데,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민간에 맡겨 교역할 수 있게 하라. 다만 백성으로 하여금 값을 어기고 다투다가 가산이 기울지 않도록 하라 - 속일본후기 841년 2월 기록 -
장보고가 가져온 물건을 경쟁적으로 구매하려다 보니 가격이 폭등했고, 비싼 물건을 사려고 가산까지 탕진한 사태가 벌어지자 국가가 개입하여 막으려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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