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성격
2. 이탈리아 르네상스
3. 르네상스의 확대
4. 르네상스의 과학 정신
2. 이탈리아 르네상스
3. 르네상스의 확대
4. 르네상스의 과학 정신
본문내용
1452-1519)의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는 그의 인체 해부를 통한 연구로 사실
이상의 심미를 화면에 펼쳐 주고 있다. 그는 사실적인 회화를 위하여 광학 해부
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적 소양을 겸비한 다면성을 지녔고 그러면서도 이를 회화라
는 목적에 통일시킨 천재였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천지창
조], [최후의 심판] 및 라파엘(Raphael, 1483-1520)의 [성모상], [아테네 학당]
은 다 같이 부드러움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확대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번영 중심지의 이동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지방에도 자치
도시의 성립과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였다. 이제 각 지역은 이탈리아의 성기 르
네상스 문화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고 나아가 독자적 르네상스의 성립 여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더우기 종이와 금속 활자의 보급은 지식의 보편화 내지 대중화
를 예비하였다.
호이징가(Huizinga), 하이마(Hyma) 등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비중을 강조하여 [이
탈리아 르네상스가 심미적 특징을 추구하였다면 북유럽은 사회 윤리, 종교 등 광
범위한 실제 생활과 관련된 여러 특징을 그 고유의 것으로 했다]고 밝혔다. 즉
이탈리아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더 내성적이요, 학구적이요 비판적이었다는 이야
기이다. 이탈리아 휴머니스트와 달리 고전을 대함에 있어 모방보다는 비판에 치
중했고, 봉건 세력의 후원을 받은 바 없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교회나 교황에 대
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북유럽 최대의 휴머니스트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그우 {우신례찬}
에서 가톨릭의 광신, 교회의 폐해, 성직자의 부패를 여지없이 비판하여 종교 개
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영향은 네덜란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
고 바다를 건너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에게도 감화를 주었
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는 당시의 영국의 사회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공상적
인 이상향을 그려 현실을 이에 접근시키려는 사회 개혁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세적 교회의 개혁을 원하였을 뿐 혁명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사회 개혁고 가톨릭에 의한 정신적 개혁을 통하여 수행하려고 한 것이다. {동키
호테}(Don Quixote)를 저술한 스페인의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는 중
세의 기사도를 유희화하면서도 사실적 수법으로 주인공 동키호테의 행동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의 라블레(Rablais,
1494-1553)는 {가르강튀아(Gargantua) 이야기}와 몽테뉴(Montaigne, 1533-92)의
{수상록}(Essaies)은 다 같이 깊은 인간의 반성을 보인것으로 후자는 근대 최초
의 에세이가 되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색의 방법이 개척되었지만 교회의 세계관이 굳건히 신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널리 유포될 수는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나왔으되 이를 이어 받아 발전시킬 사람은 없었다. 르네
상스 시대의 과학의 한계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는 지동설을 내세웠으나 교회의 압력으로
철회하였고, 그 설은 뒤에 나타난 케플러(Kepler, 1571-1630)와 갈릴레이
(Galiliei, 1564-1642)에 의하여 입증될 수 있었다. 다만 사회 변혁에 직접 관계
가 있었던 것은 화약, 나침반, 인쇄기 등의 발명 정도였다. 이것들은 봉건 기사
의 몰락, 신항로 개척 그리고 책자의 보급에 각각 공헌하였다.
르네상스의 과학 정신
르네상스 시대가 근대 과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견해가 구구하므로 확정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역사적 혁명이란 아무런 준비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
았다는 점이다.
17세기에 이르러 근대 과학의 이론적 혁명이 완성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르
네상스 시대의 과학 탐구의 결과를 토대로 비로소 가능하였다. 즉 르네상스에 있
어서 자연관의 확대나 우주론의 혁신 등이 근대 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마련
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사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위치는 중세 말기와 더
불어 근대 과학의 준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중세와 고대로부터 그들에게 전달된 과학적 지식을 흡수하고 확대시
키고 비판하고 수정하였다. 과거의 스콜라 철학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 새로운
휴머니스트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예술가와 수공업자들이 전부 이 중요한 준비작
업에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은 결코 반과학적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지적 훈련, 그들의
정밀한 연구의 습성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의 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을 과학혁명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중세 말기
에 이르러 쇠퇴해 버린 뒤에도 그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는 특히 파리 대학과 북부 이탈리아의 파두아 대학에서 계속해서 정력적으로
추구되었다.
한편 휴머니즘은 과학의 전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고전 고대를 숭상하는 나머
지 그 권위를 높이 받들어 불허하는 경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가르친 천문학이나 같은 세기에 갈레노스가 가르친 의학을 개량하고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은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르네상스시대의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면이 많다. 물론 관찰과 실험은 중
요시했고 또한 실용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실험이나
관찰과 형이상학적 결론과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나 비약이 있었다. 그렇지만 르
네상스인은 우선적으로 실험이나 관찰로써 확증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하였
고 그 이외의 것은 불가지한 것으로 유보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하튼
모든 관찰을 귀납하고 거기서 형이상학적 원리를 내세워 모든 것을 연역한다는
태도를 취하였으니 이러한 태도는 희랍의 자연 과학자들의 정신과 유사하다.
이상의 심미를 화면에 펼쳐 주고 있다. 그는 사실적인 회화를 위하여 광학 해부
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적 소양을 겸비한 다면성을 지녔고 그러면서도 이를 회화라
는 목적에 통일시킨 천재였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천지창
조], [최후의 심판] 및 라파엘(Raphael, 1483-1520)의 [성모상], [아테네 학당]
은 다 같이 부드러움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확대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번영 중심지의 이동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지방에도 자치
도시의 성립과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였다. 이제 각 지역은 이탈리아의 성기 르
네상스 문화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고 나아가 독자적 르네상스의 성립 여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더우기 종이와 금속 활자의 보급은 지식의 보편화 내지 대중화
를 예비하였다.
호이징가(Huizinga), 하이마(Hyma) 등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비중을 강조하여 [이
탈리아 르네상스가 심미적 특징을 추구하였다면 북유럽은 사회 윤리, 종교 등 광
범위한 실제 생활과 관련된 여러 특징을 그 고유의 것으로 했다]고 밝혔다. 즉
이탈리아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더 내성적이요, 학구적이요 비판적이었다는 이야
기이다. 이탈리아 휴머니스트와 달리 고전을 대함에 있어 모방보다는 비판에 치
중했고, 봉건 세력의 후원을 받은 바 없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교회나 교황에 대
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북유럽 최대의 휴머니스트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그우 {우신례찬}
에서 가톨릭의 광신, 교회의 폐해, 성직자의 부패를 여지없이 비판하여 종교 개
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영향은 네덜란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
고 바다를 건너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에게도 감화를 주었
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는 당시의 영국의 사회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공상적
인 이상향을 그려 현실을 이에 접근시키려는 사회 개혁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세적 교회의 개혁을 원하였을 뿐 혁명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사회 개혁고 가톨릭에 의한 정신적 개혁을 통하여 수행하려고 한 것이다. {동키
호테}(Don Quixote)를 저술한 스페인의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는 중
세의 기사도를 유희화하면서도 사실적 수법으로 주인공 동키호테의 행동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의 라블레(Rablais,
1494-1553)는 {가르강튀아(Gargantua) 이야기}와 몽테뉴(Montaigne, 1533-92)의
{수상록}(Essaies)은 다 같이 깊은 인간의 반성을 보인것으로 후자는 근대 최초
의 에세이가 되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색의 방법이 개척되었지만 교회의 세계관이 굳건히 신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널리 유포될 수는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나왔으되 이를 이어 받아 발전시킬 사람은 없었다. 르네
상스 시대의 과학의 한계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는 지동설을 내세웠으나 교회의 압력으로
철회하였고, 그 설은 뒤에 나타난 케플러(Kepler, 1571-1630)와 갈릴레이
(Galiliei, 1564-1642)에 의하여 입증될 수 있었다. 다만 사회 변혁에 직접 관계
가 있었던 것은 화약, 나침반, 인쇄기 등의 발명 정도였다. 이것들은 봉건 기사
의 몰락, 신항로 개척 그리고 책자의 보급에 각각 공헌하였다.
르네상스의 과학 정신
르네상스 시대가 근대 과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견해가 구구하므로 확정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역사적 혁명이란 아무런 준비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
았다는 점이다.
17세기에 이르러 근대 과학의 이론적 혁명이 완성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르
네상스 시대의 과학 탐구의 결과를 토대로 비로소 가능하였다. 즉 르네상스에 있
어서 자연관의 확대나 우주론의 혁신 등이 근대 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마련
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사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위치는 중세 말기와 더
불어 근대 과학의 준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중세와 고대로부터 그들에게 전달된 과학적 지식을 흡수하고 확대시
키고 비판하고 수정하였다. 과거의 스콜라 철학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 새로운
휴머니스트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예술가와 수공업자들이 전부 이 중요한 준비작
업에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은 결코 반과학적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지적 훈련, 그들의
정밀한 연구의 습성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의 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을 과학혁명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중세 말기
에 이르러 쇠퇴해 버린 뒤에도 그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는 특히 파리 대학과 북부 이탈리아의 파두아 대학에서 계속해서 정력적으로
추구되었다.
한편 휴머니즘은 과학의 전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고전 고대를 숭상하는 나머
지 그 권위를 높이 받들어 불허하는 경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가르친 천문학이나 같은 세기에 갈레노스가 가르친 의학을 개량하고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은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르네상스시대의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면이 많다. 물론 관찰과 실험은 중
요시했고 또한 실용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실험이나
관찰과 형이상학적 결론과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나 비약이 있었다. 그렇지만 르
네상스인은 우선적으로 실험이나 관찰로써 확증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하였
고 그 이외의 것은 불가지한 것으로 유보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하튼
모든 관찰을 귀납하고 거기서 형이상학적 원리를 내세워 모든 것을 연역한다는
태도를 취하였으니 이러한 태도는 희랍의 자연 과학자들의 정신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