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부 ; 구체제의 위기
제1부 `국민, 국왕, 법`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운동 (1789년 ~ 1792년)
제2부 자유의 전제 : 혁명정부와 민중운동 (1792년~1793년)
결론부; 혁명과 현대 프랑스
제1부 `국민, 국왕, 법`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운동 (1789년 ~ 1792년)
제2부 자유의 전제 : 혁명정부와 민중운동 (1792년~1793년)
결론부; 혁명과 현대 프랑스
본문내용
체제적 부르주아지는 특권계급과 운명을 같이 했다. 투지수입에 의존하던 부르주자지는봉건적 부과조 및 기타의 수입을 상실했고 관직보유자 부르주아지는 법복귀족과 마찬가지로 관직매매제의 폐지로 몰락해갔다. 사실상 신 부르주아지, 즉 금융과 경제의 우두머리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많은 상인들과 장인들은 혁명상황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 상승했는데 이 경우에서도 투기가 신분상승의 주된 요인이었다. 이렇게 아직 새로운 사회가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자 질서에의 열망이 싹트고 통령정부를 통한 사회적 안정화를 조장했다. 그리고 그 틀은 나폴레옹의 집권기를 거쳐 공고화되었으며 새로운 지배계급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융합되었다.
5. 이데올로기의 충돌 : 진보와 전통, 이성과 감성
혁명기간 중에 사상의 흐름은 사회 정치적인 충돌을 반영한다. 계몽사상으로 대변되던 지성의 우위는 직관에 의해서 도전받았다. 이러한 비합리주의의 반동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과학연구에 있어서는 합리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반합리주의의 반동과 반혁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혁명과 구사회의 와해로부터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그 불행의 원인이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생각함에 따라 계몽사상에 대한 비난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감성과 직관과 같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힘, 신비주의와 몽매주의, 비교의 교리가 당시 불행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문학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대립이 일어났는데 언어는 커다란 변화과정을 겪었으며 단어들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모든 문예활동의 목표가 정치적 행위에 이바지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문학 장르가 출현했다. 문학작품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면 혁명 또한 예술의 최고경지에 도달했다. 이처럼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은 혁명기세 있어서 사회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지적 예술적 생활의 주된 특징을 이룬다. 그러면서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은 사상의 대립을 뛰어넘어 사회적 보수주의를 공유하게 되었다.
제2장 부르주아 국가
1. 국민 주권과 재산제한 선거제
순전히 법률적인 관점에서 시민은 출생의 구분없이 평등하다고 선언되었다. 국민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종래의 국가권한이 약화되었다. 사회는 구성원의 자유로운 계약에 입각하듯이 국가도 정부와 피치자 사이의 계약에 입각한다. 국가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삼권분립을 설정했다. 혁명정부가 수립되고 안정되어 가면서 국가의 권력이 증대되어갔다. 경제는 국가의 통제에서 해방되고 자유주의체제로 복귀했다. 그러나 결국 나타난 새로운 권위주의 국가는 여전히 부르주아적이었다.
2. 국가의 세속화와 정교분리
혁명은 신권국가를 세속국가로 변모시켜갔다. 1792년 8월 10일 이후에 결정적으로 진전되었는데 입법회의는 종교단체를 폐지하고 교회재산을 매각했으며 부조업무는 세속화되었다. 정교분리는 내란과 비기독교화 운동에 따른 뜻밖의 결과였다. 종교협약의 여러 조직 조항을 통하여 교회는 긴밀하게 국가에 종속된다.
3. 국가의 기능
혁명은 새로운 행정, 사법, 재정제도를 부르주아사회와 자유주의 국가의 일반 원칙과 조화시키면서 국가기구를 전면 개조했다. 제헌의회는 지방행정제도를 재확립하면서 행정관리의 선거제가 설정되었다, 사법제도에서 소송절차는 점차 간소화되고 권력의 분립은 혁명정부와 더불어 사라졌다. 재정제도에는 과세의 평등과 세 종류의 주요한 직접세의 설정이었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총재정부하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보나빠르트는 자유주의 국가를 권위주의 국가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오직 중앙권력에만 의존하는 효과적인 재정행정을 확립하고 토지대장을 작성함으로써 총재정부의 업적을 마무리지었다.
제3장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1. 통합의 진전
새로운 제도는 행정적, 경제적으로 통합된 국가의 틀을 형성했으며 혁명적 투쟁을 통하여 국민의식이 고양되었다. 제헌의회에 의한 제도의 합리화, 중앙집권으로의 복귀, 행정개혁과 새로운 경제적 유대관계도 국민적 통합을 강화시켰다. 국민군은 국민의식을 강화함으로써 통합의 강력한 수단임을 입증했다.
2. 권리의 평등과 사회적 현실
평등의 원칙적 선언, 개인과 집단의 특권 폐지를 천명한 국민주권의 원리는 국민적 통합의 강력한 요인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실제 법적 국민은 재산제한 선거제의 부르주아지라는 좁은 틀 속에 국한되어 있었다.
3. 사회적 권리 : 부조받을 권리와 교육의 원리
상 뀔로뜨는 권리의 평등을 조건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했다. 빈민구제사업은 성직자의 재산이 몰수됨에 따라 공공업무의 하나로 인정된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이러한 임무는 지방 자치화 되었으며 병원과 구제원에 맡겨졌다. 교육개혁 역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교육에 대한 교회의 독점이 폐지되고 교육은 세속화되었으나 여전히 소수의 특권이었다.
4. 특권계급의 유산 국민에의 가담
국민의 사회적 토대는 점점 재산제한 선거제의 틀 속에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종래의 특권계급이 통합됨으로써 점차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망명객의 진영에서 나타난 감수성의 변화 역시 특권계급이 새로운 프랑스에 정치적으로 가담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0년간의 혁명이 지난 뒤에 특권계급은 부르주아지와 결합하게 된다.
<혁명의 유산>
이제 명사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국민의 범위는 소유권의 범위로 축소되었다. 보나빠르트는 제도를 완비하고 국가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다. 결국 국가는 법을 지키게 하는 기구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기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혁명은 프랑스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구체제의 특권계급의 특권과 우위성이 파괴되었고 봉건제의 최후가 붕괴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지만 부르주아지는 오직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특히 혁명력 2년의 시도는 사민주의 공화국의 틀 속에서 향유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는 19세기의 사회사상을 풍요롭게 했으며 정치적 투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기억, 우애적인 평등에의 꿈을 통하여 여전히 인간의 의식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5. 이데올로기의 충돌 : 진보와 전통, 이성과 감성
혁명기간 중에 사상의 흐름은 사회 정치적인 충돌을 반영한다. 계몽사상으로 대변되던 지성의 우위는 직관에 의해서 도전받았다. 이러한 비합리주의의 반동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과학연구에 있어서는 합리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반합리주의의 반동과 반혁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혁명과 구사회의 와해로부터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그 불행의 원인이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생각함에 따라 계몽사상에 대한 비난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감성과 직관과 같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힘, 신비주의와 몽매주의, 비교의 교리가 당시 불행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문학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대립이 일어났는데 언어는 커다란 변화과정을 겪었으며 단어들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모든 문예활동의 목표가 정치적 행위에 이바지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문학 장르가 출현했다. 문학작품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면 혁명 또한 예술의 최고경지에 도달했다. 이처럼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은 혁명기세 있어서 사회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지적 예술적 생활의 주된 특징을 이룬다. 그러면서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은 사상의 대립을 뛰어넘어 사회적 보수주의를 공유하게 되었다.
제2장 부르주아 국가
1. 국민 주권과 재산제한 선거제
순전히 법률적인 관점에서 시민은 출생의 구분없이 평등하다고 선언되었다. 국민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종래의 국가권한이 약화되었다. 사회는 구성원의 자유로운 계약에 입각하듯이 국가도 정부와 피치자 사이의 계약에 입각한다. 국가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삼권분립을 설정했다. 혁명정부가 수립되고 안정되어 가면서 국가의 권력이 증대되어갔다. 경제는 국가의 통제에서 해방되고 자유주의체제로 복귀했다. 그러나 결국 나타난 새로운 권위주의 국가는 여전히 부르주아적이었다.
2. 국가의 세속화와 정교분리
혁명은 신권국가를 세속국가로 변모시켜갔다. 1792년 8월 10일 이후에 결정적으로 진전되었는데 입법회의는 종교단체를 폐지하고 교회재산을 매각했으며 부조업무는 세속화되었다. 정교분리는 내란과 비기독교화 운동에 따른 뜻밖의 결과였다. 종교협약의 여러 조직 조항을 통하여 교회는 긴밀하게 국가에 종속된다.
3. 국가의 기능
혁명은 새로운 행정, 사법, 재정제도를 부르주아사회와 자유주의 국가의 일반 원칙과 조화시키면서 국가기구를 전면 개조했다. 제헌의회는 지방행정제도를 재확립하면서 행정관리의 선거제가 설정되었다, 사법제도에서 소송절차는 점차 간소화되고 권력의 분립은 혁명정부와 더불어 사라졌다. 재정제도에는 과세의 평등과 세 종류의 주요한 직접세의 설정이었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총재정부하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보나빠르트는 자유주의 국가를 권위주의 국가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오직 중앙권력에만 의존하는 효과적인 재정행정을 확립하고 토지대장을 작성함으로써 총재정부의 업적을 마무리지었다.
제3장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1. 통합의 진전
새로운 제도는 행정적, 경제적으로 통합된 국가의 틀을 형성했으며 혁명적 투쟁을 통하여 국민의식이 고양되었다. 제헌의회에 의한 제도의 합리화, 중앙집권으로의 복귀, 행정개혁과 새로운 경제적 유대관계도 국민적 통합을 강화시켰다. 국민군은 국민의식을 강화함으로써 통합의 강력한 수단임을 입증했다.
2. 권리의 평등과 사회적 현실
평등의 원칙적 선언, 개인과 집단의 특권 폐지를 천명한 국민주권의 원리는 국민적 통합의 강력한 요인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실제 법적 국민은 재산제한 선거제의 부르주아지라는 좁은 틀 속에 국한되어 있었다.
3. 사회적 권리 : 부조받을 권리와 교육의 원리
상 뀔로뜨는 권리의 평등을 조건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했다. 빈민구제사업은 성직자의 재산이 몰수됨에 따라 공공업무의 하나로 인정된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이러한 임무는 지방 자치화 되었으며 병원과 구제원에 맡겨졌다. 교육개혁 역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교육에 대한 교회의 독점이 폐지되고 교육은 세속화되었으나 여전히 소수의 특권이었다.
4. 특권계급의 유산 국민에의 가담
국민의 사회적 토대는 점점 재산제한 선거제의 틀 속에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종래의 특권계급이 통합됨으로써 점차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망명객의 진영에서 나타난 감수성의 변화 역시 특권계급이 새로운 프랑스에 정치적으로 가담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0년간의 혁명이 지난 뒤에 특권계급은 부르주아지와 결합하게 된다.
<혁명의 유산>
이제 명사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국민의 범위는 소유권의 범위로 축소되었다. 보나빠르트는 제도를 완비하고 국가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다. 결국 국가는 법을 지키게 하는 기구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기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혁명은 프랑스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구체제의 특권계급의 특권과 우위성이 파괴되었고 봉건제의 최후가 붕괴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지만 부르주아지는 오직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특히 혁명력 2년의 시도는 사민주의 공화국의 틀 속에서 향유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는 19세기의 사회사상을 풍요롭게 했으며 정치적 투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기억, 우애적인 평등에의 꿈을 통하여 여전히 인간의 의식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