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정한론
2. 탈아론
결론
본론
1. 정한론
2. 탈아론
결론
본문내용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각각 정한론과 탈아론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신정부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는 점(시기의 차이가 있긴 하다), 둘째가 둘 다 각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정부 일에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주장했던 두 사상 모두 후에 신정부의 중요한 정책으로써 채택되었다는 점(사이고는 죽은 후, 후쿠자와는 완전히 정치로의 길을 포기한 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가 두 사상 모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를 겨냥한 조선책략과 일본제국주의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이고 타카모리 자신이 정한론을 현실로써 행하지는 못했고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신정부내에서 직접 탈아론을 행하지는 못했기 때문에(둘 다 각각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당시 정치적 배경이 있었지만) 어쩌면 이 두 사람을 조선침략과 동양평화위협의 중심에 선 인물로써 바라보는 것이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정한론 같은 경우 사이고 보다는 나 같은 인물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이고와 후쿠자와가 각각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의 여하에 관계없이 그 둘은 각각 두 사상을 주장하였으며 그들 머리와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두 사상이 일본 신정부의 제국주의 방침에 엄청난 기반을 가져다 주었고 그 결과 조선의 식민과 만주사변 등의 역사적 산물로써 드러났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후 수립된 일본의 신정부는 정한론에 의해서 조선을 '제2의 내지'로 만들어 대륙병참의 기지와 본토 방위의 전초선으로 삼으며, 더 나아가 탈아론에 의해 일본식 제국주의를 완성해 아시아 전체를 일본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서양열강에 대한 아시아 수호를 위해서는 일본은 탈아를 하고 정한을 이루어 동양 전체를 이끌어 지배해야 한다는 모순된 결과, 즉 허울좋은 명목상의 동양평화론을 가져왔다. 즉, 정한론과 탈아론은 조선침략과 일본제국주의에 있어 전제인 동시에 결과이며 결과인 동시에 전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레포트를 한 가지 인물과 그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 두 인물을 선정하여 조사하고 생각해서 쓰게 된 이유도 이렇듯 각각 사이고 타카모리·후쿠자와 유키치와 관련되어 있는 정한론과 탈아론이라는 사상이 서로 연관되어져 있는 관계를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명치유신과 일본인. 하가 토오루. 예하 1989
-일본의 10걸. 정원문. 한원 1993
-후쿠자와 유키치. 정일성. 지식산업사 2001
-http://www.japanstudy.org/html/lecture/rekisi
-http://www.page.sannet.ne.jp/ytsubu/
-http://21c-kjp.com/bonmunframe/tokushu/tokushu1.htm
-http://web.ktarn.or.jp/kurume-u-hp/nakatsu/ukichi_history.html
-http://www.kufs.ac.jp/toshokan/50/seiyoj.htm
그 첫째가 각각 정한론과 탈아론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신정부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는 점(시기의 차이가 있긴 하다), 둘째가 둘 다 각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정부 일에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주장했던 두 사상 모두 후에 신정부의 중요한 정책으로써 채택되었다는 점(사이고는 죽은 후, 후쿠자와는 완전히 정치로의 길을 포기한 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가 두 사상 모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를 겨냥한 조선책략과 일본제국주의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이고 타카모리 자신이 정한론을 현실로써 행하지는 못했고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신정부내에서 직접 탈아론을 행하지는 못했기 때문에(둘 다 각각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당시 정치적 배경이 있었지만) 어쩌면 이 두 사람을 조선침략과 동양평화위협의 중심에 선 인물로써 바라보는 것이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정한론 같은 경우 사이고 보다는 나 같은 인물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이고와 후쿠자와가 각각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의 여하에 관계없이 그 둘은 각각 두 사상을 주장하였으며 그들 머리와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두 사상이 일본 신정부의 제국주의 방침에 엄청난 기반을 가져다 주었고 그 결과 조선의 식민과 만주사변 등의 역사적 산물로써 드러났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후 수립된 일본의 신정부는 정한론에 의해서 조선을 '제2의 내지'로 만들어 대륙병참의 기지와 본토 방위의 전초선으로 삼으며, 더 나아가 탈아론에 의해 일본식 제국주의를 완성해 아시아 전체를 일본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서양열강에 대한 아시아 수호를 위해서는 일본은 탈아를 하고 정한을 이루어 동양 전체를 이끌어 지배해야 한다는 모순된 결과, 즉 허울좋은 명목상의 동양평화론을 가져왔다. 즉, 정한론과 탈아론은 조선침략과 일본제국주의에 있어 전제인 동시에 결과이며 결과인 동시에 전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레포트를 한 가지 인물과 그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 두 인물을 선정하여 조사하고 생각해서 쓰게 된 이유도 이렇듯 각각 사이고 타카모리·후쿠자와 유키치와 관련되어 있는 정한론과 탈아론이라는 사상이 서로 연관되어져 있는 관계를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명치유신과 일본인. 하가 토오루. 예하 1989
-일본의 10걸. 정원문. 한원 1993
-후쿠자와 유키치. 정일성. 지식산업사 2001
-http://www.japanstudy.org/html/lecture/rekisi
-http://www.page.sannet.ne.jp/ytsubu/
-http://21c-kjp.com/bonmunframe/tokushu/tokushu1.htm
-http://web.ktarn.or.jp/kurume-u-hp/nakatsu/ukichi_history.html
-http://www.kufs.ac.jp/toshokan/50/seiyoj.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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