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4세기: 백제의 전성(근초고왕, 근구수왕 등)
2. 5세기: 고구려의 전성(광개토왕, 장수왕 등)
3. 6세기: 신라의 전성(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무열왕 등)
4. 7세기: 통일전쟁 -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 견제 공격과 신라의 대응(당·신라를 잇는 동서축과 고구려·백제·왜를 잇는 남북축의 대립)
5.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이유
6. 삼국통일의 의의
7. 삼국시대인가, 사국시대인가?
2. 5세기: 고구려의 전성(광개토왕, 장수왕 등)
3. 6세기: 신라의 전성(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무열왕 등)
4. 7세기: 통일전쟁 -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 견제 공격과 신라의 대응(당·신라를 잇는 동서축과 고구려·백제·왜를 잇는 남북축의 대립)
5.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이유
6. 삼국통일의 의의
7. 삼국시대인가, 사국시대인가?
본문내용
잊혀졌던 가락국, 즉 가야의 존재를 밝히고, 결국은 한국 고대 시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이 대등하게 병존하였음을 논증한 것이다.
한백겸의 이론은 그 후 많은 실학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확산되면서 삼국만을 강조하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동방의 역사는 장구하여, 단군이 1048년, 기자에서 마한까지가 1071년, 백제가 678년, 고구려가 705년, 신라가 992년, 가락국이 491년, 고려가 475년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는 곧 우리 나라의 역사를 고조선-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고려로 정리하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유득공 같은 사람이 나와서 발해를 포괄해서 고대 후기를 남북국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타당함은 물론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한백겸의 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삼한 정통론을 세워 예맥, 옥저, 가락, 가야 등은 소국의 반열로 편입시킨 한계성은 있으나, 한나라 건무 18년(서기 42)조에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 원년인데, 이 해 이후 대국(大國)이 셋이고 소국(小國)이 하나로 모두 네 나라이다.”라고 하여 사국시대를 인정했다. 한치윤과 한진서는 <<해동역사>>에서 가야와 임나에 관한 모든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이를 상호간에 관련지어 이해하려고 했다.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제국의 총왕(總王)이었고, 가야는 해운을 잘 이용했으므로 같은 시대에 신라보다 훨씬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근대적인 가야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3. 가야사에 집중된 잘못된 생각들의 기원
고려 후기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선조들의 역사 경험이 넓어지고 연구가 심화되면서 신라 중심적인 협소한 역사 인식은 수정되어왔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역사 개설서에서는 우리 역사의 연원을 고조선부터 찾고 있고, 고구려의 개국 연대를 신라보다 높이 올려보고 있으며, 발해가 개국한 698년 이후의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가야사에 대해서만은 실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한 나라’, ‘작은 나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치스럽게도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기만 하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가야사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실학자들의 올바른 연구 경향이 왜곡된 것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삼한 정벌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즉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고대 왜 왕권이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어 남한을 경영하였다는 논리이다.
일제 시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신공황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국권을 되찾은 이후에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일제의 선전에 어느 정도 물들어 스스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빠진 탓도 있고, 또 우리 손에 의한 가야사 연구가 부족하여 그에 대한 대항 논리가 준비가 안 된 탓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가야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 하면서 50년이 넘게 흘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달하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가야의 풍부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고대 문명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설이 나오고, 북한에서는 가야를 포함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많은 소국들을 건설하여 본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이 나왔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가야는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를 200년간 받았다는 해석이 나오고 말았다.
남들이 먼저 인정해주는 가야의 힘을 우리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가야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고대 왜국의 지배라든가 백제의 지배, 또는 신라의 지배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풍부한 부와 기술, 특히 제철 능력에서 나오는 무력과 토기 문화의 선진적인 면모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치는 가야 문화의 독자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는 늦게나마 가야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바꿀 때가 되었다.
한백겸의 이론은 그 후 많은 실학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확산되면서 삼국만을 강조하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동방의 역사는 장구하여, 단군이 1048년, 기자에서 마한까지가 1071년, 백제가 678년, 고구려가 705년, 신라가 992년, 가락국이 491년, 고려가 475년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는 곧 우리 나라의 역사를 고조선-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고려로 정리하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유득공 같은 사람이 나와서 발해를 포괄해서 고대 후기를 남북국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타당함은 물론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한백겸의 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삼한 정통론을 세워 예맥, 옥저, 가락, 가야 등은 소국의 반열로 편입시킨 한계성은 있으나, 한나라 건무 18년(서기 42)조에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 원년인데, 이 해 이후 대국(大國)이 셋이고 소국(小國)이 하나로 모두 네 나라이다.”라고 하여 사국시대를 인정했다. 한치윤과 한진서는 <<해동역사>>에서 가야와 임나에 관한 모든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이를 상호간에 관련지어 이해하려고 했다.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제국의 총왕(總王)이었고, 가야는 해운을 잘 이용했으므로 같은 시대에 신라보다 훨씬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근대적인 가야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3. 가야사에 집중된 잘못된 생각들의 기원
고려 후기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선조들의 역사 경험이 넓어지고 연구가 심화되면서 신라 중심적인 협소한 역사 인식은 수정되어왔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역사 개설서에서는 우리 역사의 연원을 고조선부터 찾고 있고, 고구려의 개국 연대를 신라보다 높이 올려보고 있으며, 발해가 개국한 698년 이후의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가야사에 대해서만은 실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한 나라’, ‘작은 나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치스럽게도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기만 하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가야사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실학자들의 올바른 연구 경향이 왜곡된 것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삼한 정벌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즉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고대 왜 왕권이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어 남한을 경영하였다는 논리이다.
일제 시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신공황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국권을 되찾은 이후에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일제의 선전에 어느 정도 물들어 스스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빠진 탓도 있고, 또 우리 손에 의한 가야사 연구가 부족하여 그에 대한 대항 논리가 준비가 안 된 탓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가야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 하면서 50년이 넘게 흘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달하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가야의 풍부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고대 문명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설이 나오고, 북한에서는 가야를 포함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많은 소국들을 건설하여 본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이 나왔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가야는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를 200년간 받았다는 해석이 나오고 말았다.
남들이 먼저 인정해주는 가야의 힘을 우리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가야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고대 왜국의 지배라든가 백제의 지배, 또는 신라의 지배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풍부한 부와 기술, 특히 제철 능력에서 나오는 무력과 토기 문화의 선진적인 면모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치는 가야 문화의 독자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는 늦게나마 가야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바꿀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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