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깨달음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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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은 住處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菩提無住處, 是故無得者?"라고 설하고 있다. 이 말은 본래 維摩經 [觀衆生品]에서 유래된 말인데, 菩提나 煩惱도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不可得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不可得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주25)
傳燈錄 제28권에 馬祖道一이 "미혹할 때는 識(분별)이 되고, 깨닫게 되면 지혜가 된다. 이치에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미혹은 自家의 본심에 미혹한 것이며, 깨달음은 自家의 本性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주26)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는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慧海도 頓悟要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見性은 범부가 아니며 단번에 上乘을 깨닫는 것이다. 凡과 聖을 초월하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凡聖을 논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생사와 열반을 초월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事理를 설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지혜의 작용에 자유자재하다. 미혹한 사람은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구해 얻을 것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많은 세월을 기약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단번에 불성을 본다(大正藏51권, p.441 下).
이처럼 미혹은 분별적인 識(vijnana)의 작용인 것이며, 차별적인 意識이기 때문에 凡과 聖, 생사와 열반, 事와 理를 구별한다. 따라서 진리나 깨달음을 구해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깨달음은 지혜(prajna)이며 凡과 聖,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차별을 초월하여 理事圓滿의 大用三昧로서의 작용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원래 구하려고 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지며, 드러나게㈛現成? 되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항상 불성의 작용으로 현재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며 결코 미래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대상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의 '如實知見'에서 '如'라는 한 글자로서 표현하고 있다. 여기의 如는 존재의 實相임과 동시에 선의 깨달음(지혜의 작용)의 본질이기도 하다.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如實知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如實한 것을 본다고 하는 인식의 본질과, 如實하게 보려는 인식(지혜)의 작용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의 현장에서는 사람은 三界(미혹의 세계)를 초월할 수가 있다.
法華經 [壽量品]에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如實하게 알고 보아㈛知見? 生死에 물러나거나 또한 나옴이 없다. 또한 세상에 있거나 滅度함이 없으니, 진실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며, 같지㈛如?도 않고 다르지㈛異?도 않으며, 三界를 삼계 같지 않게 본다"라고 말한 것도 대개 이와 같은 소식을 설한 것이다.(주27)
如를 空으로 바꾸어 말할 수가 있다. 眞如와 眞空을 같이 보는 경우도 있다. 空에 대해서나 존재의 모양으로서 空相과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空觀이 일치한다. 그러한 존재와 인식의 一如不離性의 現前을 해탈이라고 하며, 이것을 현실성의 초월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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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17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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