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머리말
II. 일본 율령국가의 성립과 백제
1. 일본 율령국가의 성립 과정
2.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
III. 아스카문화의 전개와 특성
IV. 맺음말
II. 일본 율령국가의 성립과 백제
1. 일본 율령국가의 성립 과정
2.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
III. 아스카문화의 전개와 특성
IV. 맺음말
본문내용
세기 후반에 한반도에 불교가 수용된 것을 생각한다면, 더 일찍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도 불교를 수용할 때에는 진통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수용의 첨병 역할을 하였던 것은 이시부타이[石舞台]고분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에 있는 破裂山(609m)의 서쪽 구릉 완경사면(141m)에 위치한다. 고분을 덮은 흙은 유실되어 거대한 굴식돌방이 노출되어 있다. 7세기 전반의 소가우마고 [蘇我馬子]의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 《飛鳥時代の古墳》, 飛鳥資 料館, 1979년, 61쪽; 日野山隆一,《圖說日本史》, 啓隆社, 1997, 17쪽).
의 주인공인 백제계 호족 소가(蘇我)씨이진희는 소가씨의 계보를 소가이시카와스쿠메[蘇我石川宿]--마치[滿智]--카라코[韓 子]--코마[高麗]--이나메[稻目]--우마코[馬子]--에미시[蝦夷]--이루카[入鹿]로 설명했다. 카도와키[門脇禎二 : 京都府立大敎授]는 ‘마치’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씨의 선 조가 된 인물이라고 논증했다. 이는 일본 고대사를 좌우한 소가 일족이 백제계 도래인이 라는 충격적인 학설인데, 최근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있다(이진희,《한국 과 일본문화》, 을유문화사, 1982, 56~57쪽).
였다. 당시에 배불파였던 모노노베[物部]씨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는 쇼토쿠태자와 협력하여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지(飛鳥寺)를 건립하였다.
아스카·나라시대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불상은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들여왔고 삼국에서 이주한 호족들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 제작되었다. 스이코천황(재위기간 : 592~628년)시기 46개의 일본내 사원 중에는 삼국계 호족의 우지데라(氏寺 : 씨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사원)가 상당수인데, 이를 통해 한반도 도래인들의 일본내 지위와 불교를 수용할 당시 그들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8세기 덴표문화[天平文化]의 개막을 알리는 도다이지[東大寺]의 건립에도 한반도 이주민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일본 불교는 한반도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553년 일본왕은 의(醫)·력(曆)·역(易)박사의 교대를 요청하고 점치는 책과 달력 및 약재를 요청하였다. 554년 2월 백제는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승려 담혜(曇惠) 등 9인으로 하여금 이미 일본에 가 있는 승려 도침(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또 일본의 요청에 따라 역박사(易博士)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반량풍(潘良豊) 등 5인을 보내어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과 교대시켰다. 554年은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전사를 당하는 위급한 때이므로 555年에도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있으며, 많은 백제인이 일본에 상주하며 계속 교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음악가들이 횡적(橫笛)·현금(玄琴)·막목(莫目 : 관악기의 일종)·춤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577년 11월 백제 위덕왕은 백제에 왔다 돌아가는 일본 사신에게 경전과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 등 승려는 물론, 불상을 만드는 기술자와 절을 건립하는 기술자 및 呪禁師(일종의 주술사) 등 6인을 함께 보냈다.
584年에는 백제에 왔던 일본인 가후가노미[鹿深臣]는 백제의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 588年 백제 위덕왕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승려 혜총[惠摠]과 영근(令斤) 및 혜식(惠寔) 등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보냈다. 또 승려 혜숙(惠宿)·혜중(惠衆) 등을 보내면서 탑의 맨위 장식(相輪部)을 만드는 기술자인 백매순(白昧淳)과 와박사(瓦博士) 석마제미(昔麻帝彌 ) 등과 화가 백가(白加)를 같이 보냈다.
592년에는 백제의 승려 혜총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더불어 일본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스이코시대로서 쇼토쿠태자의 섭정초기(593년)에 해당한다.
쇼토쿠태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백제인 각가(覺)에게 유교를 배웠으며, 혜총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쇼토쿠태자는 일본 아스카문화의 황금시대를 열고 왜(倭)를 제국으로 승격시킨 인물이다. 그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역(曆)을 제정하고 관위(冠位)를 제정하였으며, 헌법(17개조항)을 제정공포하고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쇼토쿠태자는 백제와 고구려계통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593년에 일본에 법흥사(法興寺)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건립되었는데 아스카지[飛鳥址]에 법흥사(현재 飛鳥寺址)가 기공되는 날 조정의 대신들 백여명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행사를 치뤘다. 이 법흥사에는 백제 승려 혜총과 고구려 승려 혜자가 있었는데 혜자는 615年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백제 위덕왕의 아들이며 화가였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597년 일본에 가서 쇼토쿠태자의 모습을 그려 주고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日本書紀》: 推古紀 5年條 ; 그러나 확실하지 않으며, 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원가력(元嘉曆)과 천문지리서와 둔갑방술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전하였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이 원가력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525年 이전에 이미 백제에서 원가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604년에 원가력을 공포한 것이다.
610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오경·채색·종이·먹·맷돌 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호류사 금당에 관음상을 그렸다.
612년에는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궁궐 남쪽 정원에 수미산과 오교(吳橋 : 돌다리의 일종)를 설치하였다. 이 노자공은 일본 정원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663년에는 일본은 백제 부흥을 위해 구원병 2만 7천명을 파견했으나, 백촌강(白村江)《三國史記》에는 伎伐浦, 중국 사료에는 白江으로 표기되었다 ; 한편 백촌강 및 주류성에 대해서는 금강하구 부근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665년에는 이미 백제가 망하였지만 백제 장군 출신인 토혼
의 주인공인 백제계 호족 소가(蘇我)씨이진희는 소가씨의 계보를 소가이시카와스쿠메[蘇我石川宿]--마치[滿智]--카라코[韓 子]--코마[高麗]--이나메[稻目]--우마코[馬子]--에미시[蝦夷]--이루카[入鹿]로 설명했다. 카도와키[門脇禎二 : 京都府立大敎授]는 ‘마치’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씨의 선 조가 된 인물이라고 논증했다. 이는 일본 고대사를 좌우한 소가 일족이 백제계 도래인이 라는 충격적인 학설인데, 최근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있다(이진희,《한국 과 일본문화》, 을유문화사, 1982, 56~57쪽).
였다. 당시에 배불파였던 모노노베[物部]씨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는 쇼토쿠태자와 협력하여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지(飛鳥寺)를 건립하였다.
아스카·나라시대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불상은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들여왔고 삼국에서 이주한 호족들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 제작되었다. 스이코천황(재위기간 : 592~628년)시기 46개의 일본내 사원 중에는 삼국계 호족의 우지데라(氏寺 : 씨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사원)가 상당수인데, 이를 통해 한반도 도래인들의 일본내 지위와 불교를 수용할 당시 그들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8세기 덴표문화[天平文化]의 개막을 알리는 도다이지[東大寺]의 건립에도 한반도 이주민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일본 불교는 한반도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553년 일본왕은 의(醫)·력(曆)·역(易)박사의 교대를 요청하고 점치는 책과 달력 및 약재를 요청하였다. 554년 2월 백제는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승려 담혜(曇惠) 등 9인으로 하여금 이미 일본에 가 있는 승려 도침(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또 일본의 요청에 따라 역박사(易博士)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반량풍(潘良豊) 등 5인을 보내어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과 교대시켰다. 554年은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전사를 당하는 위급한 때이므로 555年에도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있으며, 많은 백제인이 일본에 상주하며 계속 교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음악가들이 횡적(橫笛)·현금(玄琴)·막목(莫目 : 관악기의 일종)·춤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577년 11월 백제 위덕왕은 백제에 왔다 돌아가는 일본 사신에게 경전과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 등 승려는 물론, 불상을 만드는 기술자와 절을 건립하는 기술자 및 呪禁師(일종의 주술사) 등 6인을 함께 보냈다.
584年에는 백제에 왔던 일본인 가후가노미[鹿深臣]는 백제의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 588年 백제 위덕왕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승려 혜총[惠摠]과 영근(令斤) 및 혜식(惠寔) 등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보냈다. 또 승려 혜숙(惠宿)·혜중(惠衆) 등을 보내면서 탑의 맨위 장식(相輪部)을 만드는 기술자인 백매순(白昧淳)과 와박사(瓦博士) 석마제미(昔麻帝彌 ) 등과 화가 백가(白加)를 같이 보냈다.
592년에는 백제의 승려 혜총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더불어 일본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스이코시대로서 쇼토쿠태자의 섭정초기(593년)에 해당한다.
쇼토쿠태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백제인 각가(覺)에게 유교를 배웠으며, 혜총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쇼토쿠태자는 일본 아스카문화의 황금시대를 열고 왜(倭)를 제국으로 승격시킨 인물이다. 그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역(曆)을 제정하고 관위(冠位)를 제정하였으며, 헌법(17개조항)을 제정공포하고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쇼토쿠태자는 백제와 고구려계통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593년에 일본에 법흥사(法興寺)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건립되었는데 아스카지[飛鳥址]에 법흥사(현재 飛鳥寺址)가 기공되는 날 조정의 대신들 백여명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행사를 치뤘다. 이 법흥사에는 백제 승려 혜총과 고구려 승려 혜자가 있었는데 혜자는 615年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백제 위덕왕의 아들이며 화가였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597년 일본에 가서 쇼토쿠태자의 모습을 그려 주고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日本書紀》: 推古紀 5年條 ; 그러나 확실하지 않으며, 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원가력(元嘉曆)과 천문지리서와 둔갑방술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전하였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이 원가력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525年 이전에 이미 백제에서 원가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604년에 원가력을 공포한 것이다.
610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오경·채색·종이·먹·맷돌 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호류사 금당에 관음상을 그렸다.
612년에는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궁궐 남쪽 정원에 수미산과 오교(吳橋 : 돌다리의 일종)를 설치하였다. 이 노자공은 일본 정원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663년에는 일본은 백제 부흥을 위해 구원병 2만 7천명을 파견했으나, 백촌강(白村江)《三國史記》에는 伎伐浦, 중국 사료에는 白江으로 표기되었다 ; 한편 백촌강 및 주류성에 대해서는 금강하구 부근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665년에는 이미 백제가 망하였지만 백제 장군 출신인 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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