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릿말
2.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
1) 제1차 아편전쟁 전후의 정치상황
2)태평천국 농민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 그리고 신유정변(辛酉政變)
3. 양무운동의 전개와 수구와 개혁
1) 양무운동 초기의 수구와 개혁
2) 양무파의 분지(分枝)와 청류파(淸流派)의 등장
3) 청불전쟁과 정치세력의 부침
4) 초기 변법파의 출현과 제도개혁론
4.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
1) 청류파와 무술변법파의 연합과 개혁의 추진
2)변법운동과 양무파
3) 무술개혁 시기의 외교정책
5.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1) 의화단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
2)청말신정과 새로운 변혁주체의 형성
3)개혁과 혁명의 대결
4) 맺음말을 대신하여: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
2.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
1) 제1차 아편전쟁 전후의 정치상황
2)태평천국 농민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 그리고 신유정변(辛酉政變)
3. 양무운동의 전개와 수구와 개혁
1) 양무운동 초기의 수구와 개혁
2) 양무파의 분지(分枝)와 청류파(淸流派)의 등장
3) 청불전쟁과 정치세력의 부침
4) 초기 변법파의 출현과 제도개혁론
4.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
1) 청류파와 무술변법파의 연합과 개혁의 추진
2)변법운동과 양무파
3) 무술개혁 시기의 외교정책
5.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1) 의화단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
2)청말신정과 새로운 변혁주체의 형성
3)개혁과 혁명의 대결
4) 맺음말을 대신하여: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
본문내용
회적 권력이 무력과의 결함을 통해 현실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밀결사의 영향력과 활동공간은 보다 확대될수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급진적 엘리트의 포섭, 혹은 연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급진적 엘리트들은 이들에 적대적이었던 신사들과 달리 민의 지평에서 비밀결사를 정치적 동지로 활용함으로써 대중과의 연결고리와 변혁을 위한 무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변혁주체와 변혁사조의 출현은 이제 변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식의 변혁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이제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변혁되어야 한다는 거싱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추세는 의화단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는 러시아의 만주주둔에 항의하는 반 러시아투쟁과 함께 쿠리무역과 중국인의 여행제한 조치에 항의하는 대미 보이코트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주의에 의해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3)개혁과 혁명의 대결
변혁을 둘러싼 대결의 기미는 이미 변법을 통한 개혁론이 전개되고 갓 조직된 흥중회에 의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난 1895년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유위의 개혁론은 군주전제에 대한 원칙적 비판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1895년 광주에서 폭동을 준비하던 손문은 혁명집단의 우두머리의 한 사람으로 강유위를 지목하였다. 과거 최종시험에 합격하여 진사와 공부주사가 된 강유위는 손문의 폭동이 좌절되면서 혁명반대 쪽으로 굳어 졌지만 수구와의 대결이 급했던 당시에는 양파 사이의 연합을 모색하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폭동실패 이후 해외로 망명한 손문이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원에게 납치되고 이를 영국이 주권침해라고 항의함으로써 가까스로 풀려난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이 국내에 알려져 큰 반응을 일으키자 수구파는 개혁파와 혁명파를 동일시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태진전에 대응하여 개혁파는 개혁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혁명파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해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개혁과 혁명의 대결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가 성립되고 기관지로서 『민보(民報)』가 발간되어 입헌파 지도자 양계초가 주관한 『신민총보(新民總報)』와 논전을 전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양계초는 혁명과정에서 엄청난 유혈사태를 빚을 것이라는 것, 혁명이 그 혼란을 틈탄 외국의 간섭을 초래하여 분할의 위기상황을 초래하리라는 것, 중국인의 수준이 아직 낮아 각자 이익만 추구하여 루소가 말하는 공화-민권정체 수립에 필요한 국민총의가 형성될 수 없고, 혁명과정에서 내부적 충돌이 일어나 할거 상황이 장기화됨으로써 엉뚱한 정권찬탈자에게 집권의 구실을 주어 공화를 위해 혁명을 하였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전제정치가 다시 수립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혁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났고 청조는 타도되었다. 청조체제가 엉망이었던 만큼 현실타파의 혁명세력이 절심함을 더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혁명파가 구사한 중요한 전술은 만주족의 지배라는 종족적 정서를 혁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타도에 혁명의 무게를 두면서 혁명 이후 상황에 대한 전망에 약점을 드러내어 반만주족에 동조하는 세력의 불균등성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반만주족에 동조하면 동지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실제과정에서 보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잡다한 세력이 이 틈을 헤집고 혁명의 진정한 의미도 포착하지 못한 채 혁명의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혁명의 진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동맹회의 지도권은 허물어졌으며, 혁명의 전략도 통일될 수 없었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혁명이 주도된 것은 혁명파의 민중적 기반의 열세만이 아니라 개혁과의 대결 속에 드러난 혁명이론 상의 허점에도 책임이 있었다.
4) 맺음말을 대신하여: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
변혁이 실현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어떤 변혁인가를 둘러싼 개혁과 혁명의 대결이 치열해졌다. 변혁의 대상은 기존체제였고 그것은 곧 청조의 전제군주체제로 대표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입헌주의자들은 청조의 전제체제가 변혁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청조 자체를 전복하는 데에는 반대하였다. 그것은 청조의 자발적 자기변혁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려울 경우 청조를 압박하는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 입헌 운동은 청조를 압박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압박작전은 청조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 1906년 9월 1일에는 입헌을 준비하겠다는 정부의 공식적 결정과 1908년 8월 27일에는 9년 뒤에 입헌을 실시한다는 방침의 공표를 이끌어냈다. 1909년 9월에는 지방의회 격인 각성 자의국이 개설되었다. 입헌파의 압박도 자의국 개설의 배경이었지만 혁명파의 급속한 성장 역시 청조의 양보를 불가피하게 하는 압박작용을 하였다.
입헌파로 하여금 혁명으로 경사되어 가게 한 청조의 정책들은 청조 스스로 작정한 기만성에서라기보다 청조의 중앙집권화 지향의 결과였다. 근래 '지적혁명'으로 개념화하여 종래의 '정치혁명'을 초월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재평가되는 청말신정은 청조 스스로 취한 최후의 개혁노력을 그 핵심지향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였다.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민간에 상당 부분 위임한 군권과 행정권, 재정권, 교육권 등을 중앙으로 회수하는 중앙집권화의 정책을 핵심으로 하였던 것이다. 입헌파 신사를 좌절로 몰고 간 여러 조치들 관제개혁, 흠정헌법대강, 황족내각, 철도국유화 등의 정책들 역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청조가 압력에 밀려 실시하기로 한 입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앙집권의 강화를 어떻게 입헌의 틀 안에서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신해혁명 전후과정에서 혁명파와 입헌파가 대립과 협력의 관계를 반복하였던 것을 볼 때 변혁에 대한 지향과 방법에서 이들 두 파 사이에 큰 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입헌파가 추구한 입헌군주제적 변혁 역시 반전제의 입장에서는 혁명파의 입헌-공화제적 변혁과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끝에 혁명은 혁명파만이 아니라 개혁파의 가담으로 전개되었다. 이 점에서 신해혁명은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이라 할 수 있었다. 혁명은 무시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하모니 속에 전개된 한편의 기묘한 합주곡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변혁주체와 변혁사조의 출현은 이제 변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식의 변혁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이제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변혁되어야 한다는 거싱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추세는 의화단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는 러시아의 만주주둔에 항의하는 반 러시아투쟁과 함께 쿠리무역과 중국인의 여행제한 조치에 항의하는 대미 보이코트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주의에 의해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3)개혁과 혁명의 대결
변혁을 둘러싼 대결의 기미는 이미 변법을 통한 개혁론이 전개되고 갓 조직된 흥중회에 의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난 1895년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유위의 개혁론은 군주전제에 대한 원칙적 비판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1895년 광주에서 폭동을 준비하던 손문은 혁명집단의 우두머리의 한 사람으로 강유위를 지목하였다. 과거 최종시험에 합격하여 진사와 공부주사가 된 강유위는 손문의 폭동이 좌절되면서 혁명반대 쪽으로 굳어 졌지만 수구와의 대결이 급했던 당시에는 양파 사이의 연합을 모색하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폭동실패 이후 해외로 망명한 손문이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원에게 납치되고 이를 영국이 주권침해라고 항의함으로써 가까스로 풀려난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이 국내에 알려져 큰 반응을 일으키자 수구파는 개혁파와 혁명파를 동일시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태진전에 대응하여 개혁파는 개혁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혁명파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해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개혁과 혁명의 대결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가 성립되고 기관지로서 『민보(民報)』가 발간되어 입헌파 지도자 양계초가 주관한 『신민총보(新民總報)』와 논전을 전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양계초는 혁명과정에서 엄청난 유혈사태를 빚을 것이라는 것, 혁명이 그 혼란을 틈탄 외국의 간섭을 초래하여 분할의 위기상황을 초래하리라는 것, 중국인의 수준이 아직 낮아 각자 이익만 추구하여 루소가 말하는 공화-민권정체 수립에 필요한 국민총의가 형성될 수 없고, 혁명과정에서 내부적 충돌이 일어나 할거 상황이 장기화됨으로써 엉뚱한 정권찬탈자에게 집권의 구실을 주어 공화를 위해 혁명을 하였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전제정치가 다시 수립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혁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났고 청조는 타도되었다. 청조체제가 엉망이었던 만큼 현실타파의 혁명세력이 절심함을 더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혁명파가 구사한 중요한 전술은 만주족의 지배라는 종족적 정서를 혁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타도에 혁명의 무게를 두면서 혁명 이후 상황에 대한 전망에 약점을 드러내어 반만주족에 동조하는 세력의 불균등성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반만주족에 동조하면 동지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실제과정에서 보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잡다한 세력이 이 틈을 헤집고 혁명의 진정한 의미도 포착하지 못한 채 혁명의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혁명의 진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동맹회의 지도권은 허물어졌으며, 혁명의 전략도 통일될 수 없었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혁명이 주도된 것은 혁명파의 민중적 기반의 열세만이 아니라 개혁과의 대결 속에 드러난 혁명이론 상의 허점에도 책임이 있었다.
4) 맺음말을 대신하여: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
변혁이 실현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어떤 변혁인가를 둘러싼 개혁과 혁명의 대결이 치열해졌다. 변혁의 대상은 기존체제였고 그것은 곧 청조의 전제군주체제로 대표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입헌주의자들은 청조의 전제체제가 변혁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청조 자체를 전복하는 데에는 반대하였다. 그것은 청조의 자발적 자기변혁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려울 경우 청조를 압박하는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 입헌 운동은 청조를 압박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압박작전은 청조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 1906년 9월 1일에는 입헌을 준비하겠다는 정부의 공식적 결정과 1908년 8월 27일에는 9년 뒤에 입헌을 실시한다는 방침의 공표를 이끌어냈다. 1909년 9월에는 지방의회 격인 각성 자의국이 개설되었다. 입헌파의 압박도 자의국 개설의 배경이었지만 혁명파의 급속한 성장 역시 청조의 양보를 불가피하게 하는 압박작용을 하였다.
입헌파로 하여금 혁명으로 경사되어 가게 한 청조의 정책들은 청조 스스로 작정한 기만성에서라기보다 청조의 중앙집권화 지향의 결과였다. 근래 '지적혁명'으로 개념화하여 종래의 '정치혁명'을 초월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재평가되는 청말신정은 청조 스스로 취한 최후의 개혁노력을 그 핵심지향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였다.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민간에 상당 부분 위임한 군권과 행정권, 재정권, 교육권 등을 중앙으로 회수하는 중앙집권화의 정책을 핵심으로 하였던 것이다. 입헌파 신사를 좌절로 몰고 간 여러 조치들 관제개혁, 흠정헌법대강, 황족내각, 철도국유화 등의 정책들 역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청조가 압력에 밀려 실시하기로 한 입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앙집권의 강화를 어떻게 입헌의 틀 안에서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신해혁명 전후과정에서 혁명파와 입헌파가 대립과 협력의 관계를 반복하였던 것을 볼 때 변혁에 대한 지향과 방법에서 이들 두 파 사이에 큰 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입헌파가 추구한 입헌군주제적 변혁 역시 반전제의 입장에서는 혁명파의 입헌-공화제적 변혁과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끝에 혁명은 혁명파만이 아니라 개혁파의 가담으로 전개되었다. 이 점에서 신해혁명은 개혁과 혁명의 합주곡이라 할 수 있었다. 혁명은 무시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하모니 속에 전개된 한편의 기묘한 합주곡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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