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백제의 역사와 문화재 답사
◎ 백제의 시작
◎ 한성시대 (기원전 18년[?] ~ 475)
◎ 웅진시대 (475 ~ 538)
◎ 사비시대 (538 ~ 660)
2. 답사 지역별 설명
(1) 왕궁리 유적지
(2) 미륵사지
(3) 미륵사지 석탑
(4) 정림사지 석탑
◎ 참고 - 탑이란?
◎ 참고 - 우리 나라 석탑의 발생
(5) 백제 초기 고분
(6) 송산리 고분군
(7) 무령왕릉
(8) 사비 시대의 고분 (능산리 고분군)
- 동하총 -
◎ 백제의 시작
◎ 한성시대 (기원전 18년[?] ~ 475)
◎ 웅진시대 (475 ~ 538)
◎ 사비시대 (538 ~ 660)
2. 답사 지역별 설명
(1) 왕궁리 유적지
(2) 미륵사지
(3) 미륵사지 석탑
(4) 정림사지 석탑
◎ 참고 - 탑이란?
◎ 참고 - 우리 나라 석탑의 발생
(5) 백제 초기 고분
(6) 송산리 고분군
(7) 무령왕릉
(8) 사비 시대의 고분 (능산리 고분군)
- 동하총 -
본문내용
에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백제 불교의 일본 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 점의 뼈그릇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 돌방무덤은 언덕위나 언덕 비탈, 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 또 산기슭의 부채꼴로 펼쳐진 땅의 형태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 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
백제 굴식 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 이때에 천장은 큰 널돌(판석) 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 놓았다. 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이 있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 벽면과 천정을 1장짜리 화강암, 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거대한 판들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벽면에는 사신도,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연꽃을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 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지점 바로 옆에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부여에서 동으로 논산 가도를 향해 약 3km쯤 되는 능산리 뒷산 남쪽 기슭에 총 7기의 고분이 일군을 이루고 있는데 앞 열에 3기, 뒷 열에 3기가 전후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다 작은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까지 이 고분들을 일러 전하기를 왕릉이라하며, 옛 지명도 능뫼 부락이라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 학자인 구로이다씨가 2기, 세끼노씨가 1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이었다. 그후 1917년에 노모리씨가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서 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에는 우메하라씨에 의해서 전왕릉군의 동쪽 마을 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은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들이었다. 특히 동하총은 벽화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바 이들 고분 가운데 특수한 천정 양식을 보여 준 대표적인 고분이다.
- 동하총 -
이 고분의 봉토 직경은 17m이었는데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 X 1.51m의 평면에 높이는 1.94m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각 한 매의 큰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단 높혀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 내의 벽화는 주, 황, 적, 흑색으로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햇 북벽은 현무, 남벽은 주작, 동벽은 청용, 서벽은 백호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은 연화비운문을 채색하였는데 천정의 연화문은 아직도 선명한 반면,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 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폭 1.43m,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향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 묘제에 반영되어 있음을 살필수 있는 것이다.
사비시대의 굴식 돌방무덤은 언덕위나 언덕 비탈, 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 또 산기슭의 부채꼴로 펼쳐진 땅의 형태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 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
백제 굴식 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 이때에 천장은 큰 널돌(판석) 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 놓았다. 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이 있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 벽면과 천정을 1장짜리 화강암, 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거대한 판들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벽면에는 사신도,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연꽃을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 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지점 바로 옆에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부여에서 동으로 논산 가도를 향해 약 3km쯤 되는 능산리 뒷산 남쪽 기슭에 총 7기의 고분이 일군을 이루고 있는데 앞 열에 3기, 뒷 열에 3기가 전후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다 작은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까지 이 고분들을 일러 전하기를 왕릉이라하며, 옛 지명도 능뫼 부락이라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 학자인 구로이다씨가 2기, 세끼노씨가 1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이었다. 그후 1917년에 노모리씨가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서 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에는 우메하라씨에 의해서 전왕릉군의 동쪽 마을 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은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들이었다. 특히 동하총은 벽화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바 이들 고분 가운데 특수한 천정 양식을 보여 준 대표적인 고분이다.
- 동하총 -
이 고분의 봉토 직경은 17m이었는데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 X 1.51m의 평면에 높이는 1.94m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각 한 매의 큰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단 높혀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 내의 벽화는 주, 황, 적, 흑색으로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햇 북벽은 현무, 남벽은 주작, 동벽은 청용, 서벽은 백호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은 연화비운문을 채색하였는데 천정의 연화문은 아직도 선명한 반면,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 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폭 1.43m,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향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 묘제에 반영되어 있음을 살필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