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책 소개 기사
*['권력 對 양심' 대결의 역사]
*들어가면서
*책에서 언급한 50개의 재판은??
*['권력 對 양심' 대결의 역사]
*들어가면서
*책에서 언급한 50개의 재판은??
본문내용
문을 가해 ‘자백’을 강요하는 것, 공정한 재판의 이념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이런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8년 복권된 피고인들에 대해 동정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탈린의 테러 방식을 허용했거나, 또는 그들이 직위와 명예를 지녔을 동안 그들도 바로 그 테러 방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35. 총통 아돌프는 히틀러는 죽었다(히틀러 암살 음모 재판, 1944~1945)
히틀러의 ‘끔찍한 판사들’은 법의 매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아무런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고 민주 국가에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옛 독일 법조인 정신의 효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71년에도 베를린 법원은 7월 20일 사건의 피고인들이 “위장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암살 당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36. 법을 다시 세우다(뉘른베르크 재판, 1945~1946)
뉘른베르크 재판은 국제법의 토대가 약한 승전국의 법정이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저지른 범죄의 규모, 조직적인 계획과 시행, 그리고 재판의 계몽적 효과는 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다. 이 판결이 국제법이 되었다.
37. 모든 공산주의자는 간첩이다(에설과 줄리어스 로젠버그 재판, 1951년)
에설 로젠버그는 죄가 없음에도 죽었으며,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경우 간첩이라는 증거가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감옥형을 선고하기에도 부족했다. 정부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것이 두 사람을 전기의자로 보냈다.
38. 위험 인물이 된 국가 영웅(로버트 오펜하이머 청문회, 1954년)
오펜하이머는 오직 군비 축소에 대한 찬성 선언으로 그 악명 높은 ‘반미 책동 척결을 위한 의원회’의 소환을 받았다. 몇 달만 늦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더라면, 그는 아마도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39. 워킹 시티의 인권운동가들(로자 파크스 재판, 1955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로자 파크스의 용기 있는 거절은 명백히 앨라배마 법, 즉 헌번에 보장된 시민권을 무시한 법을 어긴 것이었다. 시민군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에게 적용된다.
40. 배후 조종자의 전형(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은 국제적으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모험적인 유괴 작전을 통해 비로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 희생된 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그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아이히만을 재판한 판사들도 희생자에 속했다. 그들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41. 살인자는 우리 가운데 있다(아우슈비츠 재판, 1963~1965)
아우슈비츠 재판은 서독을 급습했다.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치 범죄에 마침표를 찍었었다. 갑자기 평온함이 사라지고, 심각한 상황이 펼쳐졌다. 예외적인 인물들이라고 치부했던 과거의 권력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전 국민이 유대인 학살을 묵과했고, 유대인 이웃을 함께 살해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42. 휴유증과 보상금(수면제 콘테르간 재판, 1978~1970)
전문가들은 콘테르간 재판을 계속해서 질질 끌 수 있었다. 당시는 회사를 고발할 수 없었으며, 단지 직원들만 고발할 수 있었다...
43. 마이라이 대학살(윌리엄 캘리 재판, 1970~1971)
전쟁포로의 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국제 규약을 통과시킨 제네바 회의의 가장 최근 안은 1949년에 나왔다. 종이는 인내심이 강하다. 그러나, 마이라이의 대학살에 경악했던 군인들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결코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44. 대통령의 음모(워터게이트 재판, 1973~1974)
의회만이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행사하는 압력이 없다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처럼 증거가 미비할 경우, 탄핵 재판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테이프를 제시하라는 대법원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은 사임을 결심했던 것이다.
45. 독일의 가을(슈탐하임의 테러리스트 재판, 1975~1977)
1970년대 서독에서 발생했던 슈탐하임에서의 죄수들의 자살사건이다.
46. 공산주의자들의 왕년(4인방 재판, 1980년)
마오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4인방에 대한 재판이 가능했다. 이 재판은 마오가 범한 오류와의 단절이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에 신격화한 ‘위대한 항해사’를 간단히 제거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오의 정치적 이념을 열광적으로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이 제거 대상이 되었다.
47. 침묵의 담이 무너지다(시칠리아 마피아에 대한 초대형 재판, 1986~1987)
로마 중앙 정부는 마피아와의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코사 노스트라와 깊이 유착되어 있는 정치가와 법조인들은 몇 년 동안 적극적인 예심판사들의 노력을 방해했다. 팔코네, 보르셀리노, 달라 카에사 등은 부족한 원조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치렀다.
48. 냉전시대의 법정 에필로그(에리히 호네커 재판, 1992~1993)
하나의 독일 정부가 다른 하나의 독일 정부를 법정에 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리자의 법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판결을 받은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부가 실각한 후, 이미 동독 자체에 판결이 내려졌던 것일 수도 있다.
49. 생중계되다(O.J 심슨 재판, 1995년)
가장 멋진 이야기를 하고, 보다 확신을 주는 쇼를 하는 사람이 배심원을 자기편으로 만든다. ‘O.J 심슨’의 무죄는 미국 사법 체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니콜 브라운과 로널드 골드먼의 가족들에게는 민사법정의 은혜만이 남아 있었다. 무죄 석방 14개월 후, \'O.J 심슨‘은 3천 3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50. 성폭행법들아, 우리가 너희를 잡겠다(유고 전범재판, 1998~2001)
전직 국가 원수가 재판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이런 소수의 예외에 속했다. 그가 전범재판에서 선고를 받은 것은 구 유고에 대한 유엔 전범재판소의 성과로 간주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역사가 씌어졌다. 성얗행을 인간에 대한 범죄로 인정하기로 한 결정은 이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
35. 총통 아돌프는 히틀러는 죽었다(히틀러 암살 음모 재판, 1944~1945)
히틀러의 ‘끔찍한 판사들’은 법의 매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아무런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고 민주 국가에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옛 독일 법조인 정신의 효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71년에도 베를린 법원은 7월 20일 사건의 피고인들이 “위장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암살 당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36. 법을 다시 세우다(뉘른베르크 재판, 1945~1946)
뉘른베르크 재판은 국제법의 토대가 약한 승전국의 법정이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저지른 범죄의 규모, 조직적인 계획과 시행, 그리고 재판의 계몽적 효과는 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다. 이 판결이 국제법이 되었다.
37. 모든 공산주의자는 간첩이다(에설과 줄리어스 로젠버그 재판, 1951년)
에설 로젠버그는 죄가 없음에도 죽었으며,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경우 간첩이라는 증거가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감옥형을 선고하기에도 부족했다. 정부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것이 두 사람을 전기의자로 보냈다.
38. 위험 인물이 된 국가 영웅(로버트 오펜하이머 청문회, 1954년)
오펜하이머는 오직 군비 축소에 대한 찬성 선언으로 그 악명 높은 ‘반미 책동 척결을 위한 의원회’의 소환을 받았다. 몇 달만 늦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더라면, 그는 아마도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39. 워킹 시티의 인권운동가들(로자 파크스 재판, 1955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로자 파크스의 용기 있는 거절은 명백히 앨라배마 법, 즉 헌번에 보장된 시민권을 무시한 법을 어긴 것이었다. 시민군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에게 적용된다.
40. 배후 조종자의 전형(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은 국제적으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모험적인 유괴 작전을 통해 비로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 희생된 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그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아이히만을 재판한 판사들도 희생자에 속했다. 그들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41. 살인자는 우리 가운데 있다(아우슈비츠 재판, 1963~1965)
아우슈비츠 재판은 서독을 급습했다.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치 범죄에 마침표를 찍었었다. 갑자기 평온함이 사라지고, 심각한 상황이 펼쳐졌다. 예외적인 인물들이라고 치부했던 과거의 권력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전 국민이 유대인 학살을 묵과했고, 유대인 이웃을 함께 살해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42. 휴유증과 보상금(수면제 콘테르간 재판, 1978~1970)
전문가들은 콘테르간 재판을 계속해서 질질 끌 수 있었다. 당시는 회사를 고발할 수 없었으며, 단지 직원들만 고발할 수 있었다...
43. 마이라이 대학살(윌리엄 캘리 재판, 1970~1971)
전쟁포로의 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국제 규약을 통과시킨 제네바 회의의 가장 최근 안은 1949년에 나왔다. 종이는 인내심이 강하다. 그러나, 마이라이의 대학살에 경악했던 군인들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결코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44. 대통령의 음모(워터게이트 재판, 1973~1974)
의회만이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행사하는 압력이 없다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처럼 증거가 미비할 경우, 탄핵 재판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테이프를 제시하라는 대법원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은 사임을 결심했던 것이다.
45. 독일의 가을(슈탐하임의 테러리스트 재판, 1975~1977)
1970년대 서독에서 발생했던 슈탐하임에서의 죄수들의 자살사건이다.
46. 공산주의자들의 왕년(4인방 재판, 1980년)
마오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4인방에 대한 재판이 가능했다. 이 재판은 마오가 범한 오류와의 단절이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에 신격화한 ‘위대한 항해사’를 간단히 제거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오의 정치적 이념을 열광적으로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이 제거 대상이 되었다.
47. 침묵의 담이 무너지다(시칠리아 마피아에 대한 초대형 재판, 1986~1987)
로마 중앙 정부는 마피아와의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코사 노스트라와 깊이 유착되어 있는 정치가와 법조인들은 몇 년 동안 적극적인 예심판사들의 노력을 방해했다. 팔코네, 보르셀리노, 달라 카에사 등은 부족한 원조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치렀다.
48. 냉전시대의 법정 에필로그(에리히 호네커 재판, 1992~1993)
하나의 독일 정부가 다른 하나의 독일 정부를 법정에 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리자의 법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판결을 받은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부가 실각한 후, 이미 동독 자체에 판결이 내려졌던 것일 수도 있다.
49. 생중계되다(O.J 심슨 재판, 1995년)
가장 멋진 이야기를 하고, 보다 확신을 주는 쇼를 하는 사람이 배심원을 자기편으로 만든다. ‘O.J 심슨’의 무죄는 미국 사법 체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니콜 브라운과 로널드 골드먼의 가족들에게는 민사법정의 은혜만이 남아 있었다. 무죄 석방 14개월 후, \'O.J 심슨‘은 3천 3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50. 성폭행법들아, 우리가 너희를 잡겠다(유고 전범재판, 1998~2001)
전직 국가 원수가 재판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이런 소수의 예외에 속했다. 그가 전범재판에서 선고를 받은 것은 구 유고에 대한 유엔 전범재판소의 성과로 간주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역사가 씌어졌다. 성얗행을 인간에 대한 범죄로 인정하기로 한 결정은 이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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