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누벨바그란?
2. '영화에서도 만든 이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 작가주의 이론
3. 누벨바그의 배경
4.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 의 등장
5. 누벨바그의 세 가지 특징
6. 누벨바그……. 그 후 현재.
7. 감독 및 작품
2. '영화에서도 만든 이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 작가주의 이론
3. 누벨바그의 배경
4.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 의 등장
5. 누벨바그의 세 가지 특징
6. 누벨바그……. 그 후 현재.
7. 감독 및 작품
본문내용
있고 재미있는 단역으로 나온다 ― 등을 활용했다. 물론 뜨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은 이러한 경향의 총체였다. 이 작품의 소재는 영화 제작이다. 영화는 캄캄하고 제한된 극장 밖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권리로써 심사숙고를 통해 창조된 대상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영화가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지는 않지만 훨씬 더 재미있는 어떤 것이 라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를 위한 영화였다\'였다.
6. 누벨바그……. 그 후 현재.
당대의 모든 프랑스 감독들이 누벨바그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자끄 드미는 매혹적이고 신선하고 실험적인 뮤지컬인 [쉘부르의 우산](1964)을 만들었으며 누벨바그의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활동한 자끄 따띠는 1982년 죽기 전까지 제작한 [개막시간](1968)과 [거래](1971)에서현대적인 삶의 복잡한, 가장 현대적인 희극들을 만들었다.
비록 누벨바그는 일종의 운동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서 1969년에서 1962년까지 몇 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영화를 완전히 부흥시켰고 현재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주요한 감독들 중 대부분을 배출시켰다. 누벨 바그에 앞서 나와 왔던 작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과거의 개인적인 예술적 지배 아래서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규칙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하였다. 예술로서의 영화, 그리고 작품을 지배하는 예술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의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으며 해외로 넓게 확장되었다. 개인적인 영화는 우리가 \'동시대 영화\' 또는 \'현대 영화\'에 대해서 말할 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누벨바그의 독특한 개인적 양식들의 범위는 영화 매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집단적으로 제작되고 대중 소비되는 상업적 오락으로 생각되어 온 영화가 이제 올바른 조건들 아래에서 전통적인 예술의 복잡 미묘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보다 인기 있는 형식들이 매표수익을 지배하는 것에는 좀처럼 도전할 수 없었지만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창작은 선택적인 관객들을 위한 \'어려운\'영화들의 배급과 상영의 온전성과 생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한 \'예술 영화\'라는 말은 1960년대 초 이래로 계속되어 왔고 프랑스 영화인들은 그것의 출현에 대해 상당히 공적을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누벨바그의 영향은 다른 나라들뿐만 아리나 심지어 대중영화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는 토니 리차드슨의 [톰 존스](1963), 아서 펜의 [미키 원](1964), 존 슬레진저의 [다링](1965) 등 \'누벨바그\'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은 누벨바그의 활동기간 동안 처음으로 눈에 띄게 된 양식들과 주제들을 사용하여 다른 곳에서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 중 단지 몇 편에 불과하다.
7. 감독 및 작품
프랑스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의 <어른들은 모른다(59)> <피아니스트를 쏴라(60)> <쥘과 쥠(61)> <두명의 영국소녀 (72)>,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59)> <작년에 마리엥바드에서(61)>,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 (60)><주말(67)>,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로줴 바뎅(Roger Vadim)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56)>, 마르셸 까뮈의 <흑인 오르페(58)> 쟈크 리베트(Jacques Rivette)의 <파리는 우리의 것(60)>, 데미의 <쉘부르의 우산(64)>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에
6. 누벨바그……. 그 후 현재.
당대의 모든 프랑스 감독들이 누벨바그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자끄 드미는 매혹적이고 신선하고 실험적인 뮤지컬인 [쉘부르의 우산](1964)을 만들었으며 누벨바그의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활동한 자끄 따띠는 1982년 죽기 전까지 제작한 [개막시간](1968)과 [거래](1971)에서현대적인 삶의 복잡한, 가장 현대적인 희극들을 만들었다.
비록 누벨바그는 일종의 운동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서 1969년에서 1962년까지 몇 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영화를 완전히 부흥시켰고 현재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주요한 감독들 중 대부분을 배출시켰다. 누벨 바그에 앞서 나와 왔던 작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과거의 개인적인 예술적 지배 아래서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규칙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하였다. 예술로서의 영화, 그리고 작품을 지배하는 예술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의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으며 해외로 넓게 확장되었다. 개인적인 영화는 우리가 \'동시대 영화\' 또는 \'현대 영화\'에 대해서 말할 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누벨바그의 독특한 개인적 양식들의 범위는 영화 매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집단적으로 제작되고 대중 소비되는 상업적 오락으로 생각되어 온 영화가 이제 올바른 조건들 아래에서 전통적인 예술의 복잡 미묘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보다 인기 있는 형식들이 매표수익을 지배하는 것에는 좀처럼 도전할 수 없었지만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창작은 선택적인 관객들을 위한 \'어려운\'영화들의 배급과 상영의 온전성과 생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한 \'예술 영화\'라는 말은 1960년대 초 이래로 계속되어 왔고 프랑스 영화인들은 그것의 출현에 대해 상당히 공적을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누벨바그의 영향은 다른 나라들뿐만 아리나 심지어 대중영화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는 토니 리차드슨의 [톰 존스](1963), 아서 펜의 [미키 원](1964), 존 슬레진저의 [다링](1965) 등 \'누벨바그\'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은 누벨바그의 활동기간 동안 처음으로 눈에 띄게 된 양식들과 주제들을 사용하여 다른 곳에서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 중 단지 몇 편에 불과하다.
7. 감독 및 작품
프랑스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의 <어른들은 모른다(59)> <피아니스트를 쏴라(60)> <쥘과 쥠(61)> <두명의 영국소녀 (72)>,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59)> <작년에 마리엥바드에서(61)>, 쟝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 (60)><주말(67)>,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로줴 바뎅(Roger Vadim)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56)>, 마르셸 까뮈의 <흑인 오르페(58)> 쟈크 리베트(Jacques Rivette)의 <파리는 우리의 것(60)>, 데미의 <쉘부르의 우산(64)>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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