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5.16 군사정변
한일 국교 정상화
월남 파병
한일 국교 정상화
월남 파병
본문내용
파병 이후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삭감을 통고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군사원조는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0년간 16억8000만달러를 기록했다. 1960년대전반에 비해 2배 이상의 비약적인 증가를 보인 것이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이관계획 실시를 통고했지만 한국의 베트남 전투부대 파견의 대가로 베트남에 한국군 병력의 파견이 이루어지는 동안 군사원조이관계획의 실시는 중단되었다. 여기에서 군사원조이관계획이란 이제까지 미국의 직접 군사원조에 의해 충당되던 한국군의 무기 장비 탄약 중 국내생산이 가능한 것 혹은 한국정부 보유 달러를 갖고 수입할 수 있는 군사물자의 충당 책임을 한국 측에 이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군사원조이관계획의 중지에 의해 한국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9300만달러의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의 증대는 한국의 국방비를 억제시켰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과는 극히 높았다. 1966-72년 7년간 군사원조액은 한국재정지출의 36.3%에 해당되며 또 국방비를 상회한다. 이를 통해 한국정부는 1968년1월 북한의 무장게릴라의 서울 침투,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으로 남북간에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1960년대 후반 군사장비 구입을 위해 외화를 사용하지 않고 군비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북한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방비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운 각서에 기초한 파병의 대가로서 군사원조의 대량화이다.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1960년대에는 후퇴하여 1961-65년 약 8억2000만달러였지만,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견했던 1966-70년에는 약 16억8000만달러로 2배 이상의 비약적 증가를 보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원조액은 한국재정지출의 연평균 37.1%나 되었다.
1960년대후반 한국의 국방비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재정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업화 자금으로 그 여유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재정투융자는 단지 거대한 국가의 정책의 소산이라기보다 베트남 참전에 수반된 군사원조의 대량화가 국방비의 감소를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여유를 얻어 재정투융자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96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자유시장의 작동의 자동적 결과도 아니라면 단순한 국가정책의 소산도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고 베트남 전쟁에서 확대재생산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구군비경제의 효과였다.
6. 파병에 대한 평가
한국은 월남참전을 통하여 껄끄럽던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협력관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병으로 주한 미군의 월남이동을 저지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원조를 받음으로써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달성하였다.
월남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차관도입, 대미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의 부문을 포함하여 약 9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그 어려웠던 한 일 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돈이 겨우 6억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월남파병으로 인한 외화수입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월남파병을 계기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여 국력의 신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의 지지와 미국의 절대적 신임은 1인 장기집권의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비판론자들의 용병설과 함께 참전중의 적지 않은 한국군의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대목이다.
전쟁의 성격
이 전쟁에는 3가지 측면 또는 3가지 성격이 있다. 하나는 미국이 사이공정권을 통하여 베트남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베트남민족에 의한 민족독립투쟁으로, 남베트남을 석권하는 북베트남의 사회주의를 고수하여 남북베트남을 다시 통일시키는 것을 커다란 목표로 하고 전쟁이 치러졌다. 베트남은 민족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통하여 전쟁을 치러 나갔다. 세번째는 냉전의 일환으로서의 전쟁이다. 냉전은 이데올로기와 국익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미국은 중국공산주의 봉쇄전략을 내걸고 베트남으로 원정했으며, 북베트남측은 인민전쟁전략으로써 대항했다. 미국진영에는 한국 필리핀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한 외에 서방측 여러 나라도 협력했으며, 북베트남진영에는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가담하였다.
전쟁의 의미
이 전쟁의 최대 의미는 세계에서 최대 최강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최초로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과, 민족독립운동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결국 민족독립투쟁의 정당성과 강인성이 실증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3가지 사실을 시사해 주었다. 그 하나는, 제2차세계대전 후의 냉전구조를 깨뜨리고 긴장완화(데탕트)의 시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쟁비용으로 인한 달러 유출과 그 가치 저하가 달러를 기축(基軸)으로 하는 서유럽경제체제를 기초로부터 뒤흔들어 서유럽에 의한 세계경제지배의 시대가 끝나버린 사실을 실증한 것이며, 셋째는 미국의 패배로 인해서 힘의 논리가 무너져, 힘에 기인하는 종래의 가치관이 바뀐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베트남난민의 유출 등으로 인한 베트남민족주의의 문제성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참 고 문 헌
1) 강좌 한국근현대사(역사학연구소, 풀빛, 1995)
2)
http://vietnam.webcrew.co.kr/war/war.htm
3)
http://www.vietnamwar.co.kr/home2.htm
4)
http://www.veterans.pe.kr
/
5) 파병전우회, 군사보훈병무 편람
6)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
=552344
7)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3월28일편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1960년대에는 후퇴하여 1961-65년 약 8억2000만달러였지만,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견했던 1966-70년에는 약 16억8000만달러로 2배 이상의 비약적 증가를 보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원조액은 한국재정지출의 연평균 37.1%나 되었다.
1960년대후반 한국의 국방비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재정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업화 자금으로 그 여유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재정투융자는 단지 거대한 국가의 정책의 소산이라기보다 베트남 참전에 수반된 군사원조의 대량화가 국방비의 감소를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여유를 얻어 재정투융자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96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자유시장의 작동의 자동적 결과도 아니라면 단순한 국가정책의 소산도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고 베트남 전쟁에서 확대재생산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구군비경제의 효과였다.
6. 파병에 대한 평가
한국은 월남참전을 통하여 껄끄럽던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협력관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병으로 주한 미군의 월남이동을 저지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원조를 받음으로써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달성하였다.
월남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차관도입, 대미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의 부문을 포함하여 약 9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그 어려웠던 한 일 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돈이 겨우 6억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월남파병으로 인한 외화수입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월남파병을 계기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여 국력의 신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의 지지와 미국의 절대적 신임은 1인 장기집권의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비판론자들의 용병설과 함께 참전중의 적지 않은 한국군의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대목이다.
전쟁의 성격
이 전쟁에는 3가지 측면 또는 3가지 성격이 있다. 하나는 미국이 사이공정권을 통하여 베트남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베트남민족에 의한 민족독립투쟁으로, 남베트남을 석권하는 북베트남의 사회주의를 고수하여 남북베트남을 다시 통일시키는 것을 커다란 목표로 하고 전쟁이 치러졌다. 베트남은 민족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통하여 전쟁을 치러 나갔다. 세번째는 냉전의 일환으로서의 전쟁이다. 냉전은 이데올로기와 국익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미국은 중국공산주의 봉쇄전략을 내걸고 베트남으로 원정했으며, 북베트남측은 인민전쟁전략으로써 대항했다. 미국진영에는 한국 필리핀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한 외에 서방측 여러 나라도 협력했으며, 북베트남진영에는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가담하였다.
전쟁의 의미
이 전쟁의 최대 의미는 세계에서 최대 최강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최초로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과, 민족독립운동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결국 민족독립투쟁의 정당성과 강인성이 실증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3가지 사실을 시사해 주었다. 그 하나는, 제2차세계대전 후의 냉전구조를 깨뜨리고 긴장완화(데탕트)의 시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쟁비용으로 인한 달러 유출과 그 가치 저하가 달러를 기축(基軸)으로 하는 서유럽경제체제를 기초로부터 뒤흔들어 서유럽에 의한 세계경제지배의 시대가 끝나버린 사실을 실증한 것이며, 셋째는 미국의 패배로 인해서 힘의 논리가 무너져, 힘에 기인하는 종래의 가치관이 바뀐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베트남난민의 유출 등으로 인한 베트남민족주의의 문제성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참 고 문 헌
1) 강좌 한국근현대사(역사학연구소, 풀빛, 1995)
2)
http://vietnam.webcrew.co.kr/war/war.htm
3)
http://www.vietnamwar.co.kr/home2.htm
4)
http://www.veterans.pe.kr
/
5) 파병전우회, 군사보훈병무 편람
6)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
=552344
7)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3월28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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