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통신 ; 18~19세기 한·일국교관계의 동요와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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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지통신 ; 18~19세기 한·일국교관계의 동요와 통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역지통신 실시배경
1) 조선조정의 입장
2) 도쿠가와 막부의 입장
3) 대마번의 입장

2. 역지통신 실시과정
1) 통신사 파견의 연기
2) 대마역지통신의 교섭
3) 역지통신 시행
3. 역지통신의 의의


Ⅲ. 결 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18~19세기 한일국교관계의 동요와 통신사
-역지통신 실시에 대한 고찰-
目 次
Ⅰ. 서 론
Ⅱ. 본 론
1. 역지통신 실시배경
1) 조선조정의 입장
2) 도쿠가와 막부의 입장
3) 대마번의 입장
2. 역지통신 실시과정
1) 통신사 파견의 연기
2) 대마역지통신의 교섭
3) 역지통신 시행
3. 역지통신의 의의
Ⅲ. 결 론
Ⅳ. 참고문헌
序論
조선후기 조일관계에 있어 최후의 통신사인 1811년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는 이전의 사행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이제까지의 모든 통신사는 에도(江戶)를 방문하여 도쿠가와(德川)장군을 직접 만나서 국서(國書)를 교환하고 접대를 받았지만, 여러차례의 교섭 끝에 겨우 실현된 이 통신사는 에도가 아닌 쓰시마를 방문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 조선에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경우, 그 장소는 도쿠가와 장군이 거처하고 있던 에도였고, 통신사는 대마도주 및 노중(老中)의 안내를 받아 장군을 직접 만나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후에 회답서를 받는 것이 항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811년 신미통신사는 그 장소를 쓰시마로 바꿔 도주의 저택에서 국서가 교환되었던 이례적인 통신사였다. 이 행사를 조선의 기록에는 말뜻 그대로 장소를 바꾸어 신의를 통한다는 의미의 역지통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예 : 《交隣志》신사각년례, 純祖十一年辛未始許 易地通信遺金履喬李勉求閏三月越海交隣 그러나 일본측의 기록은 한결같이 역지빙례라고 기록하여 의미상으로 조선에서 예를 갖춰 찾아뵙는다는 의미의 빙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의 형태였다. 또 국서교환도 도주(島主) 저택에서 양국의 관리 사이에 이루어진 이주 이례적인 통신사였다.
이전의 통신사는 양국의 평화를 증진시켜 나가면서 우호관계 성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양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왕래가 거듭되는 가운데 오히려 양국의 평화에 지도성을 갖기 시작하였고, 처음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에서 문화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 결과 문화성(文化性)이 심화되어 초기의 긴장감은 완화되고 점점 항례화 또는 형식적으로 되었다. 막부의 자세는 삼사의 인견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서히 교만한 태도로 변하였고, 조선측도 예분의식(禮分意識)이 강해져 조엄(趙)과 같이 조선국왕이 일본의 신하인 도쿠가와 장군과 대등례를 나누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일어나게 되었다.
1811년 신미통신사를 역지통신이라 일컫는데 왜 1811년에 거행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역지통신을 朝鮮朝廷과 도쿠가와 막부의 재정긴축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쪽과 糟谷憲一. 「なぜ朝鮮通信使は廢止されたか-朝鮮史料中心に-」.『歷史評論』355호, 1979. 11;『近代日朝關係の硏究』下;三宅英利.『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孫承喆 옮김.『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성과 실천, 1991); 이원근, 『朝鮮通信使』.
일본의 조선멸시관 등장으로 풀이하는 쪽 두 가지 시각이 있다. 三宅英利著, 손승철 옮김, 《근세한일관계사연구》, 이론과실천, 1991.
조선조정과 도쿠가와 막부 모두 재정이 크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고 또 18세기 중반 이후 일본이 조선을 보는 시각이 전과 다르게 비우호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때 더욱 중요한 것은 朝鮮朝廷, 德川幕府, 對馬藩 쓰시마라는 섬의 지리적 공간을 가리킬 때는 대마도라 하고, 일본의 幕府 권력과 대칭되는 정치적 실체 개념으로 쓰일 때는 대마번으로 했다.
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들어가서 역지통신이 실시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역지통신의 배경 및 성립과정을 살펴보고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실시배경에 비중을 두어 조선조정, 도쿠가와 막부, 대마번 각각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本論
1. 역지통신 실시배경
1) 조선조정의 입장
대마번을 통해서 막부의 역지통신 방침이 전해지자 조선조정은 선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해서 일본측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해버렸다. 그보다 전에 동래부사 洪文泳은 막부장군 德川家治의 사망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1786년 10월 11일에 당시 호조판서 鄭一祥은 통신사에 필요한 禮單蔘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고 조정에 진언한 바 있다. 『通信使草謄錄』(규장각도서 15067) 丙年 十月 初六日.
이것을 보면 당연히 선례대로 통신사가 열릴 것으로 보고 미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때 조선측에서는 통신사가 에도에서 열릴 것으로 알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1793년에 일본으로부터 역지통신의 요청이 들어왔으니 조선쪽에서 그것을 거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선례에 없는 일이라 해서 조선은 역지통신의 뜻을 전하는 일본측 書契의 접수마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마도 이것은 그동안 에도까지 성대하게 접대를 받으면서 치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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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2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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