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작가 소개
1. 김인겸의 생애
2.『일동장유가』를 통해 알아보는 김인겸
3.『일동장유가』소개
Ⅱ. 『일동장유가』의 내용
1. 노정기
2.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유교적 우월주의
3.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대일(對日) 인식
(1) 부정적 대일인식
(2) 긍정적 대일인식
Ⅲ. 문학사적 의의
1. 문학적 표현
(1)작품의 흥미성과 장면화
(2)서사성
2. 양식적 특징
(1)국문으로 쓴 사행가사(使行歌辭)
(2) 사대부가사 탈피
3. 작가의식의 한계
※ 참고문헌
1. 김인겸의 생애
2.『일동장유가』를 통해 알아보는 김인겸
3.『일동장유가』소개
Ⅱ. 『일동장유가』의 내용
1. 노정기
2.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유교적 우월주의
3.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대일(對日) 인식
(1) 부정적 대일인식
(2) 긍정적 대일인식
Ⅲ. 문학사적 의의
1. 문학적 표현
(1)작품의 흥미성과 장면화
(2)서사성
2. 양식적 특징
(1)국문으로 쓴 사행가사(使行歌辭)
(2) 사대부가사 탈피
3. 작가의식의 한계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였다. 영조 29년(1753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영조 39~40(1763~1764년)년에는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와서『일동장유가』를 지었다. 일본을 다녀온 뒤에 지평현감에 제수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61세에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은 66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의 저술로는『일동장유가』외에 한문본『동사록』이 있었던 듯 하지만 지금은 극히 적은 분량의 초록이 전해질 뿐이다. 김인겸의 가계나 생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집과 같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문헌적 자료를 발견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안동 김씨 세보와 김인겸이 삼방서기로 수행했던 계미통신사의 정사인 조엄의『해사일기』, 그리고 김인겸의『일동장유가』 등을 통해 그의 삶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일동장유가』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면, 김인겸은『일동장유가』 서두에 자신의 성명, 가계, 연령, 출신지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전략) 임금님 웃으시고, 은언으로 물으시되, 네 성명 무엇이며 어디서 살고 뉘 자손으로 연세는 몇몇이며 전함은 무엇이냐? 소신이 황공하여 기복하여 여쭈오되 진사 신 김인겸은 문정공 현손으로, 쉰일곱 먹었삽고, 공주서 사나이다. 어허! 네 그러하면, 장동대신 몇 촌이냐? 고상신 충헌공의 오촌질이 되나이다. (하략) 김인겸(최강현 역주), 일동장유가, 보고사, 2007, pp.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사 김인겸은 57세이며, 문정공의 현손이고, 충헌공의 오촌질이며 문정공은 청음(淸陰)김상헌(1570~1652) 선생이고, 장동 대신 충헌공은 몽와(夢窩) 김창집(1648~1722)공이다.
, 공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내용에서 이와 같이 자신의 정보를 밝힌 예는 극히 드문데 이것은 김인겸이 그의 가문에 대해 갖는 긍지와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인겸의 가계를 통해 그의 가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인겸의 고조부는 김상헌이고, 증조부는 김광찬(1597~1668년)이다. 그리고 조부는 김수능인데 김수능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상 제약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 출세하지 못하고 말단 관직을 전전하다가 61세로 생애를 마쳤다. 김인겸의 아버지는 김창복(1683~1750년)이다. 김창복은 김수능의 나이 40세 때 외아들로 태어나 1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1세 때 아버지마저 잃었기 때문에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하였으며, 인겸의 나이 1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가계를 통해 볼 때 김인겸은 선대로부터 가세가 당당한 집안의 후손이었으나, 조부 김수능이 서자였던 관계로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더구나 아버지 김창복이 일찍 죽은 까닭으로 어려서 실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인겸은 초년에는 고생하다가 늦게야 영광을 입은 듯하고, 문장력은 있으면서도 서자 후손의 신분적 한계로 진사에 만족해야 했으며, 노쇠하여 삼방서기로 일본통신사의 일원으로 발탁됨으로써 현감벼슬을 할 수 있었다.
2.『일동장유가』를 통해 알아보는 김인겸
김인겸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작품에 나타난 면모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작품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일동장유가』가 사실에 바탕을 둔 사행가사이므로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①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
이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퇴석의 저술 『일동장유가』의 앞머리 부분에서 통신사행 일행들이 대궐에 들어가 영조 임금님께 고별인사를 올릴 때에 임금님 앞에서 임금님과 나눈 대화의 일부로 간주되는 내용을 가사 형식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퇴석이 비록 임금님께서 하문하신데 대한 응답이기는 하지만 이 대답에서 퇴석은 평소에 자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 퇴석은 동래에 이르러 머무는 동안에,
(전략) 수복이 불러내어 심원누 찾아보니, 농암선생 갑자년에 어사로 내배하고, 우리 왕고 기사춘에 연일수로 와 겨시다. 필적이 완연하니, 김창도 할서이고. (하략) 앞의 책, pp.60
라고 하여 인조 2년(1624년)에 김인겸 선생의 당숙인 농암 김창협 공이 암행어사로 온 일과 퇴석의 할아버지인 김수능 공이 숙종 15년(1689년)에 영일군수로 부임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② 애국심이 강하며, 배일의사(排日義士)였다.
퇴석은 일본으로 나라의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하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땅에 들어가기 전 우리나라 안에서도 곳곳에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임진왜란을 상기하며 문경새재에서는,
(전략) 일부당관 만부막개 검각을 불워하랴? 슬프다! 순변사가 지략도 있건마는 여기를 못 지키어 도이를 넘게 하고, 이막비 하늘이라. 천고의 한이로다. (하략) 앞의 책, pp.32
라고 하였다. 이 보기로 미루어 보아 퇴석의 애국 사상이 어느 정도이었는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퇴석의 반감 역시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서까지 그의 여정 곳곳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배를 탈 준비를 하면서 밝힌 일본에 대한 퇴석의 생각을 보면 “부끄럽고 분한 길을 열한 번째 하는구나! 한 하늘 못 일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부끄럽고 분한 길’이란 일본에 통신사행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또, ‘한 하늘 못 일 원수’란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나랏일을 위하여 가는 통신사행 길을 부끄럽고 분하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일본에 대한 퇴석의 배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경도(지금의 교토)에 도착하여서는,
(전략) 산형이 웅장하고, 수세도 환포하여, 옥야 천 리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이리 좋은 천부 금탕 왜놈의 기물되어 칭제 칭황하고, 전자 전손하니,개돌 같은 비린 유를 다 몽땅 소탕하고,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 땅 만들어서 왕화에 목욕 감겨 예의국 만들
먼저,『일동장유가』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면, 김인겸은『일동장유가』 서두에 자신의 성명, 가계, 연령, 출신지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전략) 임금님 웃으시고, 은언으로 물으시되, 네 성명 무엇이며 어디서 살고 뉘 자손으로 연세는 몇몇이며 전함은 무엇이냐? 소신이 황공하여 기복하여 여쭈오되 진사 신 김인겸은 문정공 현손으로, 쉰일곱 먹었삽고, 공주서 사나이다. 어허! 네 그러하면, 장동대신 몇 촌이냐? 고상신 충헌공의 오촌질이 되나이다. (하략) 김인겸(최강현 역주), 일동장유가, 보고사, 2007, pp.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사 김인겸은 57세이며, 문정공의 현손이고, 충헌공의 오촌질이며 문정공은 청음(淸陰)김상헌(1570~1652) 선생이고, 장동 대신 충헌공은 몽와(夢窩) 김창집(1648~1722)공이다.
, 공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내용에서 이와 같이 자신의 정보를 밝힌 예는 극히 드문데 이것은 김인겸이 그의 가문에 대해 갖는 긍지와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인겸의 가계를 통해 그의 가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인겸의 고조부는 김상헌이고, 증조부는 김광찬(1597~1668년)이다. 그리고 조부는 김수능인데 김수능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상 제약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 출세하지 못하고 말단 관직을 전전하다가 61세로 생애를 마쳤다. 김인겸의 아버지는 김창복(1683~1750년)이다. 김창복은 김수능의 나이 40세 때 외아들로 태어나 1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1세 때 아버지마저 잃었기 때문에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하였으며, 인겸의 나이 1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가계를 통해 볼 때 김인겸은 선대로부터 가세가 당당한 집안의 후손이었으나, 조부 김수능이 서자였던 관계로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더구나 아버지 김창복이 일찍 죽은 까닭으로 어려서 실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인겸은 초년에는 고생하다가 늦게야 영광을 입은 듯하고, 문장력은 있으면서도 서자 후손의 신분적 한계로 진사에 만족해야 했으며, 노쇠하여 삼방서기로 일본통신사의 일원으로 발탁됨으로써 현감벼슬을 할 수 있었다.
2.『일동장유가』를 통해 알아보는 김인겸
김인겸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작품에 나타난 면모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작품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일동장유가』가 사실에 바탕을 둔 사행가사이므로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①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
이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퇴석의 저술 『일동장유가』의 앞머리 부분에서 통신사행 일행들이 대궐에 들어가 영조 임금님께 고별인사를 올릴 때에 임금님 앞에서 임금님과 나눈 대화의 일부로 간주되는 내용을 가사 형식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퇴석이 비록 임금님께서 하문하신데 대한 응답이기는 하지만 이 대답에서 퇴석은 평소에 자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 퇴석은 동래에 이르러 머무는 동안에,
(전략) 수복이 불러내어 심원누 찾아보니, 농암선생 갑자년에 어사로 내배하고, 우리 왕고 기사춘에 연일수로 와 겨시다. 필적이 완연하니, 김창도 할서이고. (하략) 앞의 책, pp.60
라고 하여 인조 2년(1624년)에 김인겸 선생의 당숙인 농암 김창협 공이 암행어사로 온 일과 퇴석의 할아버지인 김수능 공이 숙종 15년(1689년)에 영일군수로 부임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② 애국심이 강하며, 배일의사(排日義士)였다.
퇴석은 일본으로 나라의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하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땅에 들어가기 전 우리나라 안에서도 곳곳에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임진왜란을 상기하며 문경새재에서는,
(전략) 일부당관 만부막개 검각을 불워하랴? 슬프다! 순변사가 지략도 있건마는 여기를 못 지키어 도이를 넘게 하고, 이막비 하늘이라. 천고의 한이로다. (하략) 앞의 책, pp.32
라고 하였다. 이 보기로 미루어 보아 퇴석의 애국 사상이 어느 정도이었는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퇴석의 반감 역시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서까지 그의 여정 곳곳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배를 탈 준비를 하면서 밝힌 일본에 대한 퇴석의 생각을 보면 “부끄럽고 분한 길을 열한 번째 하는구나! 한 하늘 못 일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부끄럽고 분한 길’이란 일본에 통신사행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또, ‘한 하늘 못 일 원수’란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나랏일을 위하여 가는 통신사행 길을 부끄럽고 분하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일본에 대한 퇴석의 배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경도(지금의 교토)에 도착하여서는,
(전략) 산형이 웅장하고, 수세도 환포하여, 옥야 천 리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이리 좋은 천부 금탕 왜놈의 기물되어 칭제 칭황하고, 전자 전손하니,개돌 같은 비린 유를 다 몽땅 소탕하고,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 땅 만들어서 왕화에 목욕 감겨 예의국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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