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과 사기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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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본문
1. 사 마 천
1.사마천의 유년시절
2.역사와 철학을 배우다 -동중서의 공양학-
3.위대한 유언 -부친의 죽음-
4.태사령이 되다 -『태초력』의 편찬-
5.기구한 운명 -이릉사건-
6.굴욕을 참으며 살아남다- 「임안에게 부친 서한」

본문내용

근을 제거할 때 썩는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자손을 후세에 남길 씨가 없어져 썩은 고기와 같게 되기 때문이 라고도 한다.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은 무어라 해도 부형이며, 그 부형을 받고 환관이 되어 살아가는 자가 인간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모욕을 당해왔다는 사실은 저 옛날 공자의 시대부터 그러하다. 결국 사마천은 살아남기로 했다. 형이 집행된 뒤에 사마천은 ’잠실(蠶室)이라 불리는 어둑어둑하고 뜨뜻한 방에 넣어졌다. 사타구니의 부식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부형을 받고 보니,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수반하였다. 환관으로 몸을 떨구면 언젠가 감옥을 나올 수 있다고 하여도, 살아서 수치를 입을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거늘 사마천은 왜 살아남으려고 하였는가.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이유 말고도 더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뒷날「임안에게 부친 서한」에서 사마천 스스로가 고백한 말이 있다.
좌구명이 눈이 멀고서, 손자(孫子)가 다리를 잘리고서 다시 세상에 서는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 세간에서 물러나 저술에 전념한 것은 그 분통한 심정을 문장으로 적어 표현한 것입니다. 나도 또한 주제넘기는 합니다만, 변변치 못한 재주임을 돌아보지 않고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모자라는 문장에 의지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천하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과거에 살았던 인간의 행동과 사건을 깊이 관찰하여 그 진상을 고찰하고 성공과 실패의 원리를 구명하며, 위로는 황제부터 현제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삼아 10표,12본기,8서,30세가,70열전 등 모두 130편을 만들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궁구하고 옛날과 지금의 변화에 통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계획하였습니다. 그렇거늘 이 저술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서 이릉의 화를 당하였습니다. 이대로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은 너무나 애석하였으므로, 극형에 처해지면서도 분노의 안색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만일 이 역사서를 완성하여 명산에 비장해서 영원히 전하고, 또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천하의 대도시에 유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때야말로 내가 받은 치욕은 보상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이 몸이 여덟으로 찢긴다 해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릉 사건으로 화를 당한 뒤 사마천이 지녔을 심리와 그가 취한 행동 이모두가 「임안에게 부친서한」이라는 사마천자신이 남긴 자료에서 근거했다. 편지의 상대인 임안은 사마천과는 수년 동안의 친구로 강직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정화2년(기원전91년)에 발생한 무고 사건에 휘말려 사형죄로 심문 받아 죽음에 직면에 있었다. 무고사건이란 무제 예순여섯 살. 어느새 만년에 접어들어, 적재적소에 탁원한 재능을 살려 쓸 식견을 잃고 간신 강충을 2003년 5월 21일 측근으로 중용하였다. 당시 후궁에서는 재액을 쫓는다고 하여 허수아비를 침상아래 묻고 거기에 재액을 들씌우는 풍습이 있었는데, 때로는 그것이 저주에 사용되는 일도 있었다. 위황후가 낳은 태가려는 이미 서른일곱 살이었으나, 부드러운 성격이라서 무제의 강경한 흉노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두 해 전 조부인과의 사이에 황자 불릉이 태어났으나, 그렇다고 태자를 바꿀 뜻은 없었다. 다만 태자파에 대립하여 황자파가 대두해서 당파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강충은 황자파의 영수였다. 강충은 려 태자가 그대로 즉위한다면 자신은 보나마나 실각하리라고 생각해서, 태자를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동궁에 허수아비들을 많이 묻어두고는 태자려가 무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참소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무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동궁에 들어가 침상 아래에서 허수아비들을 찾아내게 하였다. 태자는 감천궁에서 요양하고 있던 무제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그 해 7월, 진퇴양난에 몰린 태자는 강충을 체포하여 목을 베어버렸다. 무제는 태자에게 반역의 마음이 있다고 듣고서 격노하여 급히 장안의 건장궁으로 돌아와, 미앙궁에 틀어박힌 태자파와 닷새간의 격렬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태자의 군사를 물리쳤다. 패배한 태자는 호현 천구리에 숨어들었는데, 결국 발견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이 내란의 관계자는 엄중한 심문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었다. 임안에게 이 서한을 부친 정화 2년 사마천은 쉰다섯 살이 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경험이 있는 사마천은 ,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 임안에게, 그가 방치해두었던 자신의 참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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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07.30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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