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5.16 쿠데타 직전 미국의 정책
Ⅲ. 5.16 쿠데타 직후 유엔군사령관의 입장
Ⅳ. 국내 정치세력의 반응에 대한 미국의 입장
Ⅴ. 맺음말
Ⅱ. 5.16 쿠데타 직전 미국의 정책
Ⅲ. 5.16 쿠데타 직후 유엔군사령관의 입장
Ⅳ. 국내 정치세력의 반응에 대한 미국의 입장
Ⅴ. 맺음말
본문내용
23 p.m.(한국시각 5월 18일 오전 10시 23분), FRUS 1961-1963. pp. 461-462
이 문서를 통해서 5월 17일 밤까지 미국의 국무부는 쿠데타가 성공할지라도 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권력을 창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이 군부 내에서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한림의 제1군을 이용할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고 있으면서, 초당적인 거국정부의 구성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정관주의적 입장을 계속 고수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카드를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군의 이용 역시 구체적으로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압력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진압을 위한 동원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5월 18일 이후 미국무성은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시각으로 5월 19일 국무부에서 대사관에 전달된 훈령은 정관주의적 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공식적인 어떠한 성명도 발표하면 안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계속 권장한다는 지시에서 접촉 대상을 쿠데타 세력에 한정하고 있다.
) 미대사관은 5월 18일에 이르러 쿠데타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Embassy Despatch No. 1570, 795b.00/5-1861
같은 날 국무부의 한국담당 관료였던 맥도날드의 전문은 정관주의적 입장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자 택일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 세력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쿠데타 세력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까지 지켜보고 있자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 세력은 미국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 From Macdonald to Bacon, 795b.00/5-1961
Ⅴ. 맺음말
5.16 쿠데타와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미국이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에서부터 쿠데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다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쿠데타에 직접 관여되었거나 당시 핵심적인 지위에 있었던 인사들의 증언은 하나의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증언자에 따라 몇 가지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쿠데타의 배후에 있었거나 또는 묵인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61년 5월 16일 이전에 이미 CIA의 보고에 의해서 주한미국대사관, 유엔군사령관, 그리고 심지어는 케네디 대통령까지도 박정희에 의해서 쿠데타가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 Memorandum From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Dulles to President Kennedy, May 16, 1961, FRUS 1961-1962, pp. 456-457
미국뿐만 아니라 장면을 비롯한 한국 내의 정치지도자들 역시 5월 16일 이전에 쿠데타의 모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미국의 쿠데타 부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직후 세간에는 미국이 쿠데타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공개된 미국의 자료들, 그리고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정치지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 때 미국이 쿠데타의 배후에 개입되어 있거나, 묵인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이 모든 문서를 다 공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5.16 쿠데타 직후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이나 국무부에서 대사관에 보내는 훈령 속에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졸고를 통해서 밝혔던 바와 같이
) 졸고, 2000〈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제2장 3절 참조.
케네디 행정부의 전반적인 대후진국 정책, 그리고 대한정책의 변화 속에서 미국과 쿠데타 세력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선행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홍석률, 앞의 글 참조.
미국 내 일부 관료들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불신이 궁극적으로 쿠데타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보다 장기적으로 군사정부의 정책 성공을 통해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던 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한 쿠데타 자체의 성공, 다시 말해서 한국군 전체의 0.5%밖에 되지 않는 군인을 동원하고, 서울이라는 특정지역만을 장악한 쿠데타가 정권을 뒤집을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쿠데타 직후 몇일 간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본고에서 5월 16일부터 18일까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본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사실은 쿠데타 성공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 정치세력들의 태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쿠데타 진압을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거나 또는 쿠데타 성공을 위하여 묵인하는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변수는 국내 정치지도자들의 태도였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이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을 만들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쿠데타 실행 이후 이틀이 지난 5월 18일, 주한미국대사관은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장면정부의 실패와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궁극적으로 쿠데타 성공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Embassy Despatch No. 1570, 795b.00/5-1861
물론 여기에는 또하나의 가정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윤보선이나 장면이 쿠데타 진압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면 미국은 쿠데타의 진압을 위한 한국군의 동원을 승인했을까? 쿠데타 세력의 안정성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쿠데타에 대한 진압군의 동원 여부는 한국 내 정치인들과 한국 국민들의 여론과 행동이 결정적인 변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80년 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해 낼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문서를 통해서 5월 17일 밤까지 미국의 국무부는 쿠데타가 성공할지라도 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권력을 창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이 군부 내에서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한림의 제1군을 이용할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고 있으면서, 초당적인 거국정부의 구성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정관주의적 입장을 계속 고수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카드를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군의 이용 역시 구체적으로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압력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진압을 위한 동원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5월 18일 이후 미국무성은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시각으로 5월 19일 국무부에서 대사관에 전달된 훈령은 정관주의적 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공식적인 어떠한 성명도 발표하면 안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계속 권장한다는 지시에서 접촉 대상을 쿠데타 세력에 한정하고 있다.
) 미대사관은 5월 18일에 이르러 쿠데타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Embassy Despatch No. 1570, 795b.00/5-1861
같은 날 국무부의 한국담당 관료였던 맥도날드의 전문은 정관주의적 입장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자 택일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 세력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쿠데타 세력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까지 지켜보고 있자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 세력은 미국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 From Macdonald to Bacon, 795b.00/5-1961
Ⅴ. 맺음말
5.16 쿠데타와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미국이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에서부터 쿠데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다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쿠데타에 직접 관여되었거나 당시 핵심적인 지위에 있었던 인사들의 증언은 하나의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증언자에 따라 몇 가지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쿠데타의 배후에 있었거나 또는 묵인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61년 5월 16일 이전에 이미 CIA의 보고에 의해서 주한미국대사관, 유엔군사령관, 그리고 심지어는 케네디 대통령까지도 박정희에 의해서 쿠데타가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 Memorandum From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Dulles to President Kennedy, May 16, 1961, FRUS 1961-1962, pp. 456-457
미국뿐만 아니라 장면을 비롯한 한국 내의 정치지도자들 역시 5월 16일 이전에 쿠데타의 모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미국의 쿠데타 부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직후 세간에는 미국이 쿠데타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공개된 미국의 자료들, 그리고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정치지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 때 미국이 쿠데타의 배후에 개입되어 있거나, 묵인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이 모든 문서를 다 공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5.16 쿠데타 직후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이나 국무부에서 대사관에 보내는 훈령 속에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졸고를 통해서 밝혔던 바와 같이
) 졸고, 2000〈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제2장 3절 참조.
케네디 행정부의 전반적인 대후진국 정책, 그리고 대한정책의 변화 속에서 미국과 쿠데타 세력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선행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홍석률, 앞의 글 참조.
미국 내 일부 관료들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불신이 궁극적으로 쿠데타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보다 장기적으로 군사정부의 정책 성공을 통해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던 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한 쿠데타 자체의 성공, 다시 말해서 한국군 전체의 0.5%밖에 되지 않는 군인을 동원하고, 서울이라는 특정지역만을 장악한 쿠데타가 정권을 뒤집을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쿠데타 직후 몇일 간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본고에서 5월 16일부터 18일까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본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사실은 쿠데타 성공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 정치세력들의 태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쿠데타 진압을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거나 또는 쿠데타 성공을 위하여 묵인하는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변수는 국내 정치지도자들의 태도였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이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을 만들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쿠데타 실행 이후 이틀이 지난 5월 18일, 주한미국대사관은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장면정부의 실패와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궁극적으로 쿠데타 성공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Embassy Despatch No. 1570, 795b.00/5-1861
물론 여기에는 또하나의 가정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윤보선이나 장면이 쿠데타 진압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면 미국은 쿠데타의 진압을 위한 한국군의 동원을 승인했을까? 쿠데타 세력의 안정성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쿠데타에 대한 진압군의 동원 여부는 한국 내 정치인들과 한국 국민들의 여론과 행동이 결정적인 변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80년 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해 낼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