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경제개발과 유신정권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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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유신정권jo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박정희의 경제개발
1. 박정희의 산업화 전략의 형성과 특징
2.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평가
1)국내 독점자본의 형성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2)조립가공형 산업구조가 정착되었다.
3)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격렬한 노사분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4)노동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5)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독점자본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양성해 왔다.

3. 경제 성장의 성과와 한계

Ⅲ. 정치의 암흑시대(유신정권)
1. 유신체제의 성립
2. 유신체제의 배경과 특징
3. 유신체제에서의 항거

Ⅳ. 박정희 시대의 평가

본문내용

논의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시는 영장없이 체포구속하고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2호는 긴급조치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한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긴급조치의 발동으로 정국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4월 3일에는 다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다.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에 대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가입, 회합, 통신, 연락 등의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처벌규정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반체제운동은 계속되었다.
이제 반유신운동은 감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 잘못 걸리면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엄혹한 상황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몸부림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1974년 8월 긴급조치1,4호가 해제되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학원에는 다시 반유신 데모의 불길이 번졌다. 학생들의 시위는 1975년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4월 3일 서울대와 연세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4얼 7일에는 고려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였다. 이 조치가 발동된 지 사흘 후인 11일에 서울대 농대의 김상진이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계속되자 박정권은 더욱 강경한 진압책을 들고 나왔다. 긴급조치 9호는 그때까지의 온갖 긴급조치의 집대성이었다.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헌법의 개폐 주장, 학생들의 정치 집회와 시위 등을 철저히 엄금’한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1979년 12월까지 4년 5개월간 존속하면서 수많은 정치범과 양심수를 양산하였다. 긴급조치 9호의 발동으로 학생운동은 한동안 침체에 들어갔다.
긴급조치 9호로 위축되었던 학생운동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1976년말부터였다. 76년 12월 8일 서울대 법대생의 시위를 시작으로 이후 1977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반유신투쟁에 나서면서 1979년 1026까지 싸움을 전개했다.
Ⅳ.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
박정희시대의 잔재는 그가 죽고 난 후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권기간 동안 취해온 정책들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이다. 군 집권 이후, 각 분야에는 그가 임명한 군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군대에서의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이 정부의 방식에 그대로 도입되었다. 민주적 토론에 의한 진행방식이 아닌 명령의 이행과 효율성이 강조되었던 이 정책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이라는 맹목적인 단 하나의 목적의 추진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시에 사회 각 분야에는 군사문화가 퍼지기 시작했다. 명령을 최우선시하고 힘과 권력을 중시하며,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군사문화는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의 가능성을 억눌렀다. 이러한 문화는 또한 여성 권리의 신장에서도 억압요인으로 작용했다. 힘이 센 남성들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군대와 그 문화는 남성중심적인 사회를 이끌어갔고 여성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문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상은 모두 군대식이었다. 가수들은 그들의 노래가사와 그룹명들을 모두 한글로 바꾸어야만 했고 건전가요를 불러야만 했다. 이 시대의 소위 ‘뜨는’ 노래들은 ‘육군 김일병’ 이나 ‘서울의 찬가’ 같은 것들이었고 ‘동백 아가씨’등의 ‘각하 눈 밖에서 벗어난’ 노래들은 방송금지와 음반 발매 중지를 당했다 이런 군사문화는 교육에도 스며들었고 유교문화를 이용하기도 했다. 향토예비군과 교련교육이 실시되었고 각 대학에는 학도 호국단이 창설되었다. 학교에서는 거수경례 때 ‘멸공’ 구호를 외쳤고 체력장의 던지기에서는 공 대신 모조 수류탄을 던졌다. 여학생들은 체육시간에 칼빈소총으로 사격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이순신 장궁과 같은 역사적 영웅에 대한 숭배가 강조되고 유교의 충효사상이 강조되었다. 이는 모두 군사정권에 복종하는 관념체계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고 정부의 사회통제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박정희 시대는 이미 평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왜 평가하는지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없이 쉽게 평가되고 있다. 과연 박정희라는 인물이 그렇게 쉽게 평가될 수 있을까?
박정희는 평가에 앞서서 역사이다. 거기에는 한국이 매우 급박하게 걸어 온 격동의 역사가 베어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복잡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부분’을 보면 ‘전체’가 안 보이고, 박정희의 '전체'를 보고자 하면 ‘부분’이 덮여진다. 그를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찬란한 한강의 기적이 있었는가 하면, 차가운 독방에 서려 있는 양심수의 외침이 있었다. 검소하고 애국적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개인이 있었는가 하면, 비판과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독재자의 냉혹함과 고독, 그리고 독기가 있었다. 이렇듯 한국사회는 박정희가 남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도 크지만 그가 남긴 부채 또한 적지 않다. 한국사회는 현재 박정희가 남긴 자산을 활용하여 그가 남긴 부채를 갚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민주화 이행기를 거쳐 민주주의를 어떻게 공고화 시킬 것인가에 관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내려질 수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 이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내려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발표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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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천, ‘알몸 박정희‘. 사람나라,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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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지금도 계속되는 박정희 패러다임
홍하상 지음,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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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20
  • 저작시기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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