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머리말
Ⅱ 레닌의 당 조직 원리(전위 정당과 민주 집중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1. 레닌의 당 조직 원리(전위 정당과 민주 집중제)
(1) 이론적 배경
1) 마르크스적 전통
① 마르크스의 혁명계급에 대한 이해
② 당과 노동자계급 대중과의 관계
③ 당의 자생성
2) 러시아적 전통
① 트카쵸프(P.Tkachev, 1877~1886)
② 네차에프(S. Nechaev, 1847~?)
(2) 중앙집중제적 조직원리의 형성
1) 러시아 혁명조직의 결성과 활동
2) 경제주의의 형성과 레닌의 투쟁
① 경제주의(Economism)의 형성
3) 중앙집중제적 조직원리
① 직업적 혁명가(Professional Revolutionary)와 당 조직
② 중앙 집중적 당의 민주주의적 원칙
③ 당원규정에 대한 논쟁
(3) 민주 집중제적 조직원리의 형성
1) 1905년 혁명과 레닌의 혼란
2) 당 조직 원리의 변화
① 엘리트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② 당내 민주주의의 확대
③ 민주집중제의 기본적 조직원칙
3) 민주집중제적 조직원리
①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2.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 )
(1)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1) 마르크스․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① 파리코뮌
(2)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3) 소비에트 - 레닌의 새로운 국가
Ⅲ. 레닌의 세계혁명
1. 세계혁명의 기원
(1) 이데올로기적 기원
(2) 방법론적 기원
2. 레닌의 세계혁명전략의 이론적 배경
(1) 혁명과 전쟁의 연관성
(2)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3) 제국주의론
1) 제국주의의 기본적 이론들
2)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평가
3. 레닌의 세계혁명전략의 실천과정 분석
(1)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과 평화전술
(2) 독일혁명과 선전선동전술
(3) 코민테른의 성립과 전위적 변화
Ⅳ. 맺음말
Ⅱ 레닌의 당 조직 원리(전위 정당과 민주 집중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1. 레닌의 당 조직 원리(전위 정당과 민주 집중제)
(1) 이론적 배경
1) 마르크스적 전통
① 마르크스의 혁명계급에 대한 이해
② 당과 노동자계급 대중과의 관계
③ 당의 자생성
2) 러시아적 전통
① 트카쵸프(P.Tkachev, 1877~1886)
② 네차에프(S. Nechaev, 1847~?)
(2) 중앙집중제적 조직원리의 형성
1) 러시아 혁명조직의 결성과 활동
2) 경제주의의 형성과 레닌의 투쟁
① 경제주의(Economism)의 형성
3) 중앙집중제적 조직원리
① 직업적 혁명가(Professional Revolutionary)와 당 조직
② 중앙 집중적 당의 민주주의적 원칙
③ 당원규정에 대한 논쟁
(3) 민주 집중제적 조직원리의 형성
1) 1905년 혁명과 레닌의 혼란
2) 당 조직 원리의 변화
① 엘리트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② 당내 민주주의의 확대
③ 민주집중제의 기본적 조직원칙
3) 민주집중제적 조직원리
①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2.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 )
(1)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1) 마르크스․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① 파리코뮌
(2)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3) 소비에트 - 레닌의 새로운 국가
Ⅲ. 레닌의 세계혁명
1. 세계혁명의 기원
(1) 이데올로기적 기원
(2) 방법론적 기원
2. 레닌의 세계혁명전략의 이론적 배경
(1) 혁명과 전쟁의 연관성
(2)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3) 제국주의론
1) 제국주의의 기본적 이론들
2)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평가
3. 레닌의 세계혁명전략의 실천과정 분석
(1)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과 평화전술
(2) 독일혁명과 선전선동전술
(3) 코민테른의 성립과 전위적 변화
Ⅳ. 맺음말
본문내용
1인터내셔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볼세비키의 주장은 정당화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셋째, 러시아 공산당이 가진 5표의 투표권과 집행위원회에서 가진 위원수는 코민테른을 러시아의 보조적 기구로 만들었다. 러시아공산당은 한 국가를 지배한 유일한 공산당이었으며 모든 세계대회가 그 영토 안에서 개최되었던만큼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소비에트러시아는 그 국가적 이익과 세계혁명이라는 이원적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이 교묘하게 융합된 채 코민테른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③ 후퇴전술로서의 통일전선
통일전선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으며 1921년의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서 공식화되었다. 이것은 혁명의 퇴조기에 나타나는 공산주의의 전형적 전술이다. 즉 공산주의가 노동계급의 다수를 점유하지 못하고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그 세력이 강하며 공산주의자들이 수세에 몰려 있고 또한 혁명의 결정적 투쟁이 미처 계획할 수 없는 먼 위치에 있는 조건상에서 일시적인 협동을 통해 선동효과와 조직적 성과를 올려 당세를 확장한 다음 동조세력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코민테른창설 당시의 정세는 사회불안이 고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계혁명을 난관시했고 따라서 통일전선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후 잇따른 유럽에서의 혁명의 실패는 새로운 투쟁방향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유럽혁명이 퇴조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인하고 과도기 전술로서의 후퇴와 재준비를 위한 전술의 모색이었다. 또한 코민테른 제3차대회 중에는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고 그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다른 노동계급당이나 단체들과 유대를 맺음으로써 구성원의 수를 확보할 것이 요청되었다.
전술적 사고에 의거한 통일전선정책은 전코민테른세력권 내에서 배양추진되어야만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사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공산당간부들에게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거부되었다. 어제는 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고립된 위치를 지켰던 당이 갑자기 이제 통일전선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산당이 불법화된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통일전선정책 자체를 적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통일전선은 무엇보다도 혁명으로부터의 후퇴정책이었으며 그 정책의 수용은 자연히 혁명조직으로서의 코민테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고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없게 되자 코민테른은 때를 기다리며 소비에트 러시아자체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④ 레닌의 아시아 혁명전략
레닌은 세계혁명전략은 주로 유럽 지향적인 정책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경 유럽 혁명의 실패가 확실해지고 러시아의 국내경제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자 좌파의 급진적 혁명노선은 온건한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후퇴기에 나타난 통일전선전술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그 적용 목표를 두고 있었다. 동방인민에 대한 레닌의 활동과 태도는 유럽 지향적 정책보다는 비중이 떨어지지만 그의 장기적인 목표에 따라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또한 궁극적인 목표로 유럽혁명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동방우회전략이었다. 레닌과 코민테른은 서구제국주의의 동방경제요새를 분쇄하지 않고는 서구제국주의가 타도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동방의 식민지 국가에서는 해방운동을 자극하고 지원하는 전략을 쓰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 제2차대회가 산회하고 난 몇 주 후인 1920년 9월 쿠바에서는 소위 동방인민들의 제1차 대회가 소집되었다. 소집의 임무와 사회를 맡은 지노비에프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성전’에 참여할 것을 외쳤고 레닌의 의사를 대변한 라데크는 “우리가 동방인민들과 단결하고 서구의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며 여러분은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소비에트정부의 동방정책이 단순히 소비에트공화국의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볼세비키의 이 선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쿠바대회는 역시 선전을 위한 서커스에 지나지 않았다.
1921년의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는 경제적 재건의 필요성에서 유럽과의 통상관계를 재수립하면서 코민테른의 반제국주의적 색채를 완화할 필요를 느꼈다. 자본주의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파국적인 경제상태를 개선하려 한 레닌의 정책은 쿠바정책의 지속적 수행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레닌의 동방정책과 유럽정책이 상호모순을 일으키고 충돌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시아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견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세계혁명에 있어서 레닌이 중요시한 것은 아시아혁명보다 유럽혁명이었다. 그의 제국주의론에 비추어 볼 때 아시아는 러시아와 함께 제국주의연쇄의 가장 약한 고리라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착각될 수도 있겠지만 아시아는 레닌에게 전혀 도전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레닌이즘에 대해 알아보았다. 레닌의 당이론은 전위당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트 주의에 기초해서 직업적 혁명가들이 조직한 당이 아직 의식적으로 미숙한 노동계급을 지도함으로써 혁명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전위당이론으로 대표된다. 또한 레닌은 마르크스와 달리 이러한 당은 비밀리에 조직되고 운영될수록 혁명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레닌의 당이론의 대표적인 특징은 중앙집중적인 조직원리이다. 이러한 중앙집중제적 조직이론은 서구와 달리 아직 전제정치의 공포가 지배했던 러시아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05년 혁명이후 짜르의 억압이 둔화되자 레닌은 선거제를 도입하고 지방조직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등 당내에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레닌의 조직이론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고 이 변화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은 바로 전제정치의 탄압여부와 정치적 자유의 존재여부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레닌이 추구했던 조직이론은 전체적으로 볼 대 강력한 규율을 가진 중앙집중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그때의 역사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를
셋째, 러시아 공산당이 가진 5표의 투표권과 집행위원회에서 가진 위원수는 코민테른을 러시아의 보조적 기구로 만들었다. 러시아공산당은 한 국가를 지배한 유일한 공산당이었으며 모든 세계대회가 그 영토 안에서 개최되었던만큼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소비에트러시아는 그 국가적 이익과 세계혁명이라는 이원적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이 교묘하게 융합된 채 코민테른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③ 후퇴전술로서의 통일전선
통일전선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으며 1921년의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서 공식화되었다. 이것은 혁명의 퇴조기에 나타나는 공산주의의 전형적 전술이다. 즉 공산주의가 노동계급의 다수를 점유하지 못하고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그 세력이 강하며 공산주의자들이 수세에 몰려 있고 또한 혁명의 결정적 투쟁이 미처 계획할 수 없는 먼 위치에 있는 조건상에서 일시적인 협동을 통해 선동효과와 조직적 성과를 올려 당세를 확장한 다음 동조세력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코민테른창설 당시의 정세는 사회불안이 고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계혁명을 난관시했고 따라서 통일전선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후 잇따른 유럽에서의 혁명의 실패는 새로운 투쟁방향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유럽혁명이 퇴조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인하고 과도기 전술로서의 후퇴와 재준비를 위한 전술의 모색이었다. 또한 코민테른 제3차대회 중에는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고 그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다른 노동계급당이나 단체들과 유대를 맺음으로써 구성원의 수를 확보할 것이 요청되었다.
전술적 사고에 의거한 통일전선정책은 전코민테른세력권 내에서 배양추진되어야만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사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공산당간부들에게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거부되었다. 어제는 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고립된 위치를 지켰던 당이 갑자기 이제 통일전선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산당이 불법화된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통일전선정책 자체를 적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통일전선은 무엇보다도 혁명으로부터의 후퇴정책이었으며 그 정책의 수용은 자연히 혁명조직으로서의 코민테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고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없게 되자 코민테른은 때를 기다리며 소비에트 러시아자체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④ 레닌의 아시아 혁명전략
레닌은 세계혁명전략은 주로 유럽 지향적인 정책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경 유럽 혁명의 실패가 확실해지고 러시아의 국내경제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자 좌파의 급진적 혁명노선은 온건한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후퇴기에 나타난 통일전선전술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그 적용 목표를 두고 있었다. 동방인민에 대한 레닌의 활동과 태도는 유럽 지향적 정책보다는 비중이 떨어지지만 그의 장기적인 목표에 따라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또한 궁극적인 목표로 유럽혁명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동방우회전략이었다. 레닌과 코민테른은 서구제국주의의 동방경제요새를 분쇄하지 않고는 서구제국주의가 타도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동방의 식민지 국가에서는 해방운동을 자극하고 지원하는 전략을 쓰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 제2차대회가 산회하고 난 몇 주 후인 1920년 9월 쿠바에서는 소위 동방인민들의 제1차 대회가 소집되었다. 소집의 임무와 사회를 맡은 지노비에프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성전’에 참여할 것을 외쳤고 레닌의 의사를 대변한 라데크는 “우리가 동방인민들과 단결하고 서구의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며 여러분은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소비에트정부의 동방정책이 단순히 소비에트공화국의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볼세비키의 이 선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쿠바대회는 역시 선전을 위한 서커스에 지나지 않았다.
1921년의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는 경제적 재건의 필요성에서 유럽과의 통상관계를 재수립하면서 코민테른의 반제국주의적 색채를 완화할 필요를 느꼈다. 자본주의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파국적인 경제상태를 개선하려 한 레닌의 정책은 쿠바정책의 지속적 수행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레닌의 동방정책과 유럽정책이 상호모순을 일으키고 충돌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시아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견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세계혁명에 있어서 레닌이 중요시한 것은 아시아혁명보다 유럽혁명이었다. 그의 제국주의론에 비추어 볼 때 아시아는 러시아와 함께 제국주의연쇄의 가장 약한 고리라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착각될 수도 있겠지만 아시아는 레닌에게 전혀 도전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레닌이즘에 대해 알아보았다. 레닌의 당이론은 전위당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트 주의에 기초해서 직업적 혁명가들이 조직한 당이 아직 의식적으로 미숙한 노동계급을 지도함으로써 혁명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전위당이론으로 대표된다. 또한 레닌은 마르크스와 달리 이러한 당은 비밀리에 조직되고 운영될수록 혁명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레닌의 당이론의 대표적인 특징은 중앙집중적인 조직원리이다. 이러한 중앙집중제적 조직이론은 서구와 달리 아직 전제정치의 공포가 지배했던 러시아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05년 혁명이후 짜르의 억압이 둔화되자 레닌은 선거제를 도입하고 지방조직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등 당내에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레닌의 조직이론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고 이 변화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은 바로 전제정치의 탄압여부와 정치적 자유의 존재여부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레닌이 추구했던 조직이론은 전체적으로 볼 대 강력한 규율을 가진 중앙집중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그때의 역사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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