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생활상 - 의. 식. 주. 혼인제도. 매장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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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시대의 생활상 - 의. 식. 주. 혼인제도. 매장풍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음식문화

2. 의복문화

3. 주거문화

4. 혼인제도

5. 매장풍습

본문내용

식혜가 135수레, 벼가 150수레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 상류층에 대해서는 ‘금입택(金入宅)’에 ‘노동(奴)삼천(三千)’ 운운한 말들이 전하는데, 엄청난 경제력에 걸맞게 혼인식도 자못 호화스러웠을 것이다.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렀다. [삼국사기]에 실린 설씨의 딸과 청년 가실의 사랑 이야기 중에는, 대신 수자리 나간 가실이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늙은 설씨는 딸 몰래 날을 정하고 그 날이 되자 신랑될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부분이 나온다.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이다. 일정 기간 처가살이를 하는 고구려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렀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신라에서는 혼인한 날 저녁 신부가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한 다음 남편에게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이와 같은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약속되면 신부의 집에서는 서옥(屋)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집을 본채 뒤에 지어둔다. 혼인식을 치른 날 저녁무렵 신랑은 신부의 집 문앞에 이르러 아무개라고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 엎드려 절을 한 다음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조른다. 신랑이 이런 조르기를 몇번 하면 신부의 부모는 마지 못한 듯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신랑은 서옥에 들어가 신부와 첫날밤을 지내게 된다. 방에는 돈과 옷감을 마련해 둔다 신혼부부는 서옥에서 아이를 낳아, 이 아이가 다 자라면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머무는 관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해져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강조하던 당시의 정부관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이를 금지하려는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랑의 처가살이는 부계 중심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민간생활에 깊숙히 자리잡은 조선 중기 이후에야 조금씩 쇠퇴의 기미를 보인다. 근래에도 결혼식 후 신부집에서 3일을 머무는 관습이 일부지역에 남아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에도 소멸되지 않았던 신랑 처가살이의 자취라고 할 수 있다.
서민사회에서 신랑의 처가살이는 신부의 출가로 인한 부족한 노동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보완해 준다는 측면도 있고, 첫 아이를 낳아 기르기까지 신부가 지니게 될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덜어 준다는 의미도 지닌다. 오늘날처럼 결혼과 동시에 두 집안의 남녀가 독립해 살게 됨으로써 말미암는 여러가지 문제, 예를 들면 당사자간의 갈등을 완화시킬 완충장치의 부재, 두 집안 부모가 겪게 되는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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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2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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