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전교활동 및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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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전교활동 및 역사적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주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전교활동 및 역사적 의의
작성년도: 1990년
작성자: 이창희


차 례
---- - - - - - - - - - - - - - ----

I. 서 론

II.본 론
제 1 부 역사적 배경

제 2 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전교활동
제 1 장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관계

제 2 장 김 대건 신부의 생애 및 전교활동
1. 생애
2. 업적 및 사상

제 3 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및 전교활동
1. 생애
2. 업적 및 사상

제 3 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역사적 의의
제 1 장 한국사적 관점에서
1. 조국에 대한 그들의 이해
2. 문화사적 고찰

제 2 장 교회사적 관점에서
1. 첫신학생(첫사제)
2. 그들 서한의 사료적 가치
3.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관

III. 결 론

*** 참 고 자 료

본문내용

-1836)
김대건은 1821년 8월 21년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중강면 송산리
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金濟俊)과 고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치명자 집안이었다. 그가 7살이 되던해(1827)에 삼남(三南) 지방에서 벌어진 정해교난(丁亥敎難)을 피하여 용인군 내사면 골배마시로 이사하여 거기서 약 10년간의 유년시절을 보낸다. 이때부터 김대건은 조부(祖父)슬하에서 한문을 배워 익힐 뿐만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성교(聖敎) 교리와 순교자들의 치명사적들을 들어 익혀 깊은 신심을 키워 나간다. 그가 첫영성체를 받은 것은 1836년 여름에 프랑스 신부 모방이 공소를 순방할 때이다. 거기서 모방 신부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김대건의 깊은 신심을 보고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고 부모와 상의한 끝에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된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모방 신부에 의하여 그보다 먼저 간택된 최방제와 최양업과 만났으며, 마침내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천주대전에 신학생되기를 선서하였던 것이다. 같은 책,30-32p.
1836년 12월 9일 세명의 신학생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샤스땅 신부의 영접군 교우들과 서울을 출발하여 유학의 길에 올랐다. 6개월여 동안의 기나긴 여정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김대건은 같이 간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파란만장한 유학생활로 접어든다.
나.수학시기(1837-1841)
세소년은 요동과 만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여 빠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 칼르르(Callery) 신부의 문하에서 수학하던중 곧 레그레즈와(Legregois) 신부가 세소년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8월중 마카오 민란으로 마닐라로 피난 갔다가 겨울에 마카오로 귀환한다. 또 1년후(1838년 11월 27일)에는 최방제가 말라리아병에 전염되어 사망한다. 그리고 1839년 4월초 김대건과 최양업은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과 마카오에서 다시 민란이 일어나자 또 다시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마카오의 상태가 좀 진정되자 11월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왔다. 이러한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1840년부터 1841년 동안 철학을 조선 4대 주교가 될 베르네(安,Berneux) 신부와 조선에 나와 전교할 메스뜨르(Maistre) 신부로부터 교육 받았다.
다.활동시기(1842-1846)
김대건과 최양업은 프랑스 함대의 요청으로 통역관으로 승선하기 위해 뜻밖에 신학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앞으로 수년간의 신학 과정을 이수하면 성직자로의 결실을 보게 되는 두 신학생들이 그 날을 마카오에서 맞이하지 못한채 조선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1842년 2월 15일 김대건은 메스뜨르 신부와 함께 세실(Cecille)이 지휘하는 에리곤(Erigone)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6월 27일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조선으로 떠나기를 기대했으나 세실 함장은 남경이 함락됨에 따라 조선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남경 조약 체결을 위해 남경으로 항로를 변경함에 따라 그 희망은 사라졌다. 프랑스 함대의 파견 목적과 아편전쟁에 대하여 ; 이원순, 허인 편저,35p. 참조
8월 23일 김대건 일행은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Favorite)호를 타고 늦게도착한 최양업과 만주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를 만났다. 8월 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세실이 더이상 북상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강남 교구장 베지(Begi)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척으로 10월 2일 상해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 신부와 합류하였다. 이때 김대건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메스뜨르 신부로 부터 신학강의를 들었다. 최양업은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하엿으나 변문에서 만난 김프란치스꼬을 통해 조선교회에 관한 확실한 소식을 들었다. 최석우,‘최양업’,앞의 사전,1144p.
1843년 4월경 부터 페레올 주교의 임시 거주지인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다시 두 신학생은 페레올 주교와 메스뜨르 신부와 함께 몽고 소팔가자에서 백가점(白家店) 으로 갔다. 김옥희,‘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상’(계성출판사,1986),35p.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에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동행하여 봉천(奉天)으로 가서 1844년 1월 24일 김프란치스꼬를 상봉하였다. 그러나 서양인의 입국이 불가능하다고하여 김대건은 단독입국을 결심하고 훈춘을 통해 시도하나 실패하였다. 다시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같이 메스뜨르 신부에게 신학을 공부한다. 그들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러나 교회법이 요구하는 만 24세의 연령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김옥희,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상’(계성출판사,1986), 35p.
12월 말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함께 팔가자를 출발하여 1845년 1월 1일 중국변문에 도착하여 김프란치스꼬 및 조선 교우들과 상봉하였으나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여 김대건만 조선으로 출발하여 무사히 국경을 돌파하였다. 김대건은 1월 15일경 서울에 도착하여 돌우물(石井里)에 잠거하였다. 그러나 2월 김대건은 중병에 거려 15일간 위중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3월에는 2명의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이들을 신학생이라 할 수는 없다. 김대건 자신이 아직 부제였고 따라서 신학생을 선택 교육할 자격을 구비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학생들을 교수하고 있음은 특히 상사에 보고하고 있음은 장차의 신학생으로 생각하여 교수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 것이니 이들을 예비 신학생 또는 신학생 후보로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원순, 허인 편저, 위의 책,180p.
조선 지도를 작성하였으며 순교자에 관한 자료 조선 지도 제작은 조선에 입국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지리 지식을 제공하여 입국을 돕기 위함이다. 순교자에 관한 자료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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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04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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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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