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 순교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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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오박해 순교자 영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박해에 대한 서술
1.1 박해의 원인과 발단
1.2 박해의 진행과정
1.3 박해의 결과
1.4 박해의 특성
1.5 박해로 인한 교회의 변화
1.6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해
2. 교회의 주요 지도자들
3.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3.1 현 가롤로(玄錫文) 회장
3.2 남 베드로(南景文)
3.3 한 라우렌시오(韓履亨)
3.4 임 요셉(林致百)
3.5 김임이 데레사
3.6 이 아가다(李干蘭)
3.7 우 수산나(禹述任)
3.8 가타리나 덕이(鄭鐵艶)

Ⅲ. 결 론

본문내용

대답하였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를 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무식하지만 천주께서 내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것이면 넉넉합니다.”
관장은 몽둥이로 찌르는 고문을 하게하고 그 다음에는 세 번 주뢰를 틀게 하였다. 그리고 임 요셉이 아파서 몇 마디 소리를 질렀더니 그에게 말하였다. “만일 한 마디라도 소리를 내면 그것을 배교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그러니까 임 요셉은 잠잠하여졌고 까무러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고문을 중지하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옥에 이르자 그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웃는 빛을 띄우며 말하였다.
“내가 고문을 당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겠단 말이야.”
그러면서 조용히 땅바닥에 누웠다. 조금 있다가 남 베드로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망나니들에게 끌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가서 위로를 하고 그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기 시작하였다. 임 요셉은 새로운 신문과 고문을 겪어야만 하였으나 그의 신앙과 용기는 잠시도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7월 29일 그를 매질하여 죽이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는 정오부터 해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망나니들이 기진맥진하였다. 그런 다음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까 옥으로 옮겨다가 목을 졸라 죽였다. 그의 나이는 43세이었다.
그 이튿날 그의 두 아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옥리와 다른 죄수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슬퍼하지 마시오. 지난밤에 이상한 빛이 당신들 아버지의 시체를 감싸고 그 시체가 놓여 있는 방을 가득 채웠었오.”
그런 다음 옥리 중의 두 사람이 그들이 목격한 기적에 감명을 받아 아마 이 나라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을 하였다. 즉 순교자의 유해를 경건히 모셔다가 옥에서 10리쯤 떨어진 야산에 예를 갖추어 매장하였다.
6) 영성적인 특성
3.5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1811-1846)는 서울 태생으로 1846년 이어 포도청에서 교수로 순교하였다.
1) 가계도
2) 교회에서의 직책 및 주요 업적
3) 신앙생활과 생애 참조: 달레 하, 127: 안응렬(역), 한국순교자103위전, 287.
김임이 데레사는 1811년에 서울에 살던 교우의 집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읽고 그것을 본받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녀는 일곱 살 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그 때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봉사에 전념했다. 그녀는 임종하는 교우들을 돌봐주고, 죽은 후에는 장사를 지내주고, 그들을 위하여 오래도록 기도하는 것을 자기의 직분같이 생각했다.
그의 집에 드나들던 외교인들이 데레사가 혼인하지 않고 있음을 수상하게 여겼으므로, 그들을 멀리하려고 왕비 궁전의 침모로 들어가서 3년 동안을 살다가, 그 후는 친척과 친지의 집을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특히 순교자 이문우 사도 요한의 양어머니 댁에 머무르면서 일을 하며 먹을 것을 구하였다.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하인이 되었으나, 이미 기해년의 큰 박해를 눈으로 본 데레사는 다시 그러한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 1846년 7월 15일(윤 5월 22일)에 현 가롤로의 집에서 다른 여교우들과 같이 잡혔다.
4) 순교죄목, 취조시 별칭, 순교자, 순교형태
성명
세례명
성별
생몰연도
나이
체 포 내 용
순 교 내 용
체포당시 은 신 지
체포일
순교일
죄목
순교지
순교형태
김임이 (金任伊)
데레사

1811- 1846
36
사포서동
1846년 윤5월 22일
1846. 8. 1
포도청
교수형
5) 신앙고백의 형태 참조: 안응렬(역), 한국순교자103위전, 287-288; 구중서 외 7,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2, 성요셉출판사, 1984, 291; 김형래(역), 103위 시복시성자료 Ⅰ,Ⅱ, 173-174.
김대건 안드레아가 조선에 다시 입국하였을 때, 김임이 데레사는 그 집에 식모로 들어갔는데, 그녀는 “언제고 신부님이 잡히시면 나는 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부님의 뒤를 따르려 하니 이 세상에서 오래 나하고 같이 살 생각은 하지 말라.”라고 그녀의 동생 김 가타리나에게 말하곤 하였다.
김 데레사는 함께 옥살이를 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였다고 한다. 동료들 간에 다툼이 생기면 좋은 말로 화해시키려고 애썼고, 천주를 위하여 고초를 참아내도록 언사뿐만 아니라 표양으로 동료들을 권면하였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순교의 기회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이 순간의 고통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이 주어지지만, 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벌뿐이요, 그러니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하면서 간곡히 타이르고 권면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포청에서 문초를 받았는데, 혹심한 형벌을 받았고 이를 인내로 견뎌내었다고 한다. 그녀는 8월 1일 다른 순교자들과 더불어 교수되었는데,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목에 졸린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6) 영성적인 특성
3.6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이간난(1814-1846) : 성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참조: 배티 사적지 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249, 각주 202. ; 일성록, 헌종 병오 8월 1일.)
1) 가계도
2) 교회에서의 직책 및 주요 업적
3) 신앙생활과 생애 참조: 달레 하, 126: 안응렬(역), 한국순교자103위전, 288-289..
이간난(아가다)는 1813년에 외교인의 집에 태어나서 18세 때에 시집갔으나 3년 뒤에는 과부가 되었고 1834년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시집가기를 거절하고, 그 모친에게 교우를 만나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 친척 중에 한 사람의 교우가 있었으므로, 아가다와 그 모친과 동생들은 그 친척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받은 결과, 드디어 유방제 빠치삐꼬 신부한테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대단히 미워하던 그의 부친은 그 가족이 입교하였다는 것을 알자 크게 노하여, 아가다는 죽은 남편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내와 아들은 경상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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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16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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