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세종시대의 언어정책
1. 머리말
2. 세종 시대 언어관의 형성
1)儒敎와 言語觀
(1) 易과 聲音
(2) 禮樂思想과 성음
(3) 正音․正聲思想
(4) 성운학과 聖人之道
(5) 문자학과 聖人之道
2) 한자 및 차자 표기법의 불편
3) 학문 진흥 수단
4) 중국에 대한 외교와 譯學
5) 열국의 문자와 언어정책에 대한 관심
6) 세종의 개인적 성격
3. 세종과 훈민정음
1) 훈민정음 창제
(1) 훈민정음(문자)의 성격
(2) 제자 원리
(3) 제자 기준
(4)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 편찬
2) 『동국정운』편찬 : 표준 한국한자음 설정
(1) 편찬 경위
(2) 개정 한자음의 시행
3) 『홍무정운역훈』편찬 : 표준 중국자음의 제시
(1) 편찬 목적
(2) 편찬 경위
4) 번역 사업의 전개
(1) 『삼강행실도』와 ‘경서’의 번역
(2) 『용비어천가』의 창작
(3) 불경 언해
5) 정음청 설치
4. 맺음말
1. 머리말
2. 세종 시대 언어관의 형성
1)儒敎와 言語觀
(1) 易과 聲音
(2) 禮樂思想과 성음
(3) 正音․正聲思想
(4) 성운학과 聖人之道
(5) 문자학과 聖人之道
2) 한자 및 차자 표기법의 불편
3) 학문 진흥 수단
4) 중국에 대한 외교와 譯學
5) 열국의 문자와 언어정책에 대한 관심
6) 세종의 개인적 성격
3. 세종과 훈민정음
1) 훈민정음 창제
(1) 훈민정음(문자)의 성격
(2) 제자 원리
(3) 제자 기준
(4)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 편찬
2) 『동국정운』편찬 : 표준 한국한자음 설정
(1) 편찬 경위
(2) 개정 한자음의 시행
3) 『홍무정운역훈』편찬 : 표준 중국자음의 제시
(1) 편찬 목적
(2) 편찬 경위
4) 번역 사업의 전개
(1) 『삼강행실도』와 ‘경서’의 번역
(2) 『용비어천가』의 창작
(3) 불경 언해
5) 정음청 설치
4. 맺음말
본문내용
들과 만나 ‘正俗異同之變’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③ 또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정확한 음을 알아보았다.
④ 8년 동안에 걸쳐서 원고를 10여 차례나 개고하였다.
이처럼 이들이 노력하고 또 그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중국음과 다르다고 하여 『홍무정운』의 체제나 음계를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홍무정운』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두고서 31성모의 자모를 각 소운의 대표자 앞에 표시하고 그 자모와 대표자와의 사이에 그 소운의 자음을 한글로 표시했으며 때로는 두 가지로 발음되는 음을 표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히 주석을 첨기했다.
신숙주는 이 『홍무정운역훈』의 편찬도 모두 세종대왕의 ‘천종지성’과 ‘고명박달’에 힘입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사람도 10일 간이면 그 어려운 성운학을 깨우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주음하면 제대로 발음할 수 있어서, 자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게 되어 지리적 조건으로 음의 차이가 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홍무정운역훈』에 이렇게 힘쓴 것은 세종 시대의 역학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 초기의 역대 왕 가운데에서도 세종은 역학 정책에 가장 주력한 왕이었던 것이다.
4) 번역 사업의 전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 ‘愚民’들에게 표기수단을 갖게 하고 이들을 교화하여 유교 국가에 순응시키려는 뜻도 있었으므로, 운서편찬 사업 이외에도 다른 번역 사업이 전개되었다.
(1) 『삼강행실도』와 ‘경서’의 번역
세종은『삼강행실도』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충신효자열녀가 배출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창손 등은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는데도 아직 충신효자열녀가 나오지 않았고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자질 여하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세종은 이러한 말은 매우 쓸모없는 유자라고 꾸짖었다.
모처럼 알기 힘든 한문책을 번역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려고 계획하고 있던 세종에게 이와 같은 말은 매우 노여운 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삼강행실도』외에도 소학사서오경의 번역에도 매우 노력을 기울였다.
(2) 『용비어천가』의 창작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세종의 六代祖 이래의 공덕에 의하여 저절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였다. 1442년 3월 1일에 시작된 『용비어천가』의 완성은 세종29년인 1447년 10월이었는데 이를 본다면 1445년 권제 등이 간단히 한시로 초고를 작성하고, 뒤이어 훈민정음 전문가들이 10권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비어천가』는 세종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으며, 이 노래의 제작으로 국문 가사가 훈민정음에 의하여 정착되는 길이 열렸다.
(3) 불경 언해
崇儒抑佛을 내걸고 건국한 조선이었지만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신앙심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종조차도 불교를 인정하였고 1434년 이후에는 불교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소헌왕후(中宮)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였고, 완성 후에는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 두 책은 甲寅字체 한글 활자로 인쇄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본이다.
5) 정음청 설치
훈민정음의 창제를 전담하던 전문 부서가 있었을 것임에도 역사상 기록에는 집현전의 학사들이 도맡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보면 훈민정음 전담 기구가 엄연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28년 11월 임신의 기사를 보면, 용비어천가의 보수를 ‘언문청’에서 담당하였는데 ‘언문청’은 궁중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종실록』의 기사에는 여러 차례 ‘정음청’이라고 나오는데 이 두 가지 이름이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세종이 ‘정음청’을 설치한 것은 세종이 이 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4. 맺음말
조선은 유교 정신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시대에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쳐 모든 정책을 힘차게 펼쳤고 그 결과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 중에서도 언어정책이 가장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그 결과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더군다나 세종과 그 보필자들은 다음과 같은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언어정책의 추진이 가능했다.
첫째, 실제 음성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의 이중적인 표현 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과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사상을 치국안민의 요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치국의 요체로서 악과 성음을 생각하였던 정책 담당자들은 ‘정음’과 ‘정성’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성인의 도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운학과 문자학에 관한 이론적인 연구부터 필수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밖에 이웃 여러 나라들과 원활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역학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외국어음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올바른 표음문자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과 그 보필자들은 위의 여러 가지 필요성에 의해 훈민정음과 새로운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을 편찬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 자유자재로 표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로 여러 종류의 한문 서적을 쉽게 번역할 수 있게 되어 훈민교화 사업도 추진할 수 있었다.
또, 표음문자의 창제로 역학 정책도 원활히 수행할 수가 있게 되어 譯學書가 꾸준히 간행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세종 시대에는 언어 이론에 관한 연구가 발달되었고, 이를 토대로 한 언어정책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세종은 그 시대 최고 학문을 깊이 소화하고 그 진수를 터득하여 마침내 국어의 문자화까지 성공했다는 면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시대에 이와 같은 언어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집현전과 정음청 등 전문 연구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한자음 개신 사업이 아무리 위대한 세종의 정신 밑에서 추진되었어도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설정된 음계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③ 또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정확한 음을 알아보았다.
④ 8년 동안에 걸쳐서 원고를 10여 차례나 개고하였다.
이처럼 이들이 노력하고 또 그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중국음과 다르다고 하여 『홍무정운』의 체제나 음계를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홍무정운』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두고서 31성모의 자모를 각 소운의 대표자 앞에 표시하고 그 자모와 대표자와의 사이에 그 소운의 자음을 한글로 표시했으며 때로는 두 가지로 발음되는 음을 표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히 주석을 첨기했다.
신숙주는 이 『홍무정운역훈』의 편찬도 모두 세종대왕의 ‘천종지성’과 ‘고명박달’에 힘입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사람도 10일 간이면 그 어려운 성운학을 깨우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주음하면 제대로 발음할 수 있어서, 자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게 되어 지리적 조건으로 음의 차이가 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홍무정운역훈』에 이렇게 힘쓴 것은 세종 시대의 역학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 초기의 역대 왕 가운데에서도 세종은 역학 정책에 가장 주력한 왕이었던 것이다.
4) 번역 사업의 전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 ‘愚民’들에게 표기수단을 갖게 하고 이들을 교화하여 유교 국가에 순응시키려는 뜻도 있었으므로, 운서편찬 사업 이외에도 다른 번역 사업이 전개되었다.
(1) 『삼강행실도』와 ‘경서’의 번역
세종은『삼강행실도』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충신효자열녀가 배출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창손 등은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는데도 아직 충신효자열녀가 나오지 않았고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자질 여하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세종은 이러한 말은 매우 쓸모없는 유자라고 꾸짖었다.
모처럼 알기 힘든 한문책을 번역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려고 계획하고 있던 세종에게 이와 같은 말은 매우 노여운 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삼강행실도』외에도 소학사서오경의 번역에도 매우 노력을 기울였다.
(2) 『용비어천가』의 창작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세종의 六代祖 이래의 공덕에 의하여 저절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였다. 1442년 3월 1일에 시작된 『용비어천가』의 완성은 세종29년인 1447년 10월이었는데 이를 본다면 1445년 권제 등이 간단히 한시로 초고를 작성하고, 뒤이어 훈민정음 전문가들이 10권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비어천가』는 세종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으며, 이 노래의 제작으로 국문 가사가 훈민정음에 의하여 정착되는 길이 열렸다.
(3) 불경 언해
崇儒抑佛을 내걸고 건국한 조선이었지만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신앙심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종조차도 불교를 인정하였고 1434년 이후에는 불교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소헌왕후(中宮)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였고, 완성 후에는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 두 책은 甲寅字체 한글 활자로 인쇄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본이다.
5) 정음청 설치
훈민정음의 창제를 전담하던 전문 부서가 있었을 것임에도 역사상 기록에는 집현전의 학사들이 도맡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보면 훈민정음 전담 기구가 엄연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28년 11월 임신의 기사를 보면, 용비어천가의 보수를 ‘언문청’에서 담당하였는데 ‘언문청’은 궁중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종실록』의 기사에는 여러 차례 ‘정음청’이라고 나오는데 이 두 가지 이름이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세종이 ‘정음청’을 설치한 것은 세종이 이 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4. 맺음말
조선은 유교 정신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시대에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쳐 모든 정책을 힘차게 펼쳤고 그 결과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 중에서도 언어정책이 가장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그 결과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더군다나 세종과 그 보필자들은 다음과 같은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언어정책의 추진이 가능했다.
첫째, 실제 음성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의 이중적인 표현 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과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사상을 치국안민의 요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치국의 요체로서 악과 성음을 생각하였던 정책 담당자들은 ‘정음’과 ‘정성’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성인의 도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운학과 문자학에 관한 이론적인 연구부터 필수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밖에 이웃 여러 나라들과 원활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역학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외국어음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올바른 표음문자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과 그 보필자들은 위의 여러 가지 필요성에 의해 훈민정음과 새로운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을 편찬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 자유자재로 표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로 여러 종류의 한문 서적을 쉽게 번역할 수 있게 되어 훈민교화 사업도 추진할 수 있었다.
또, 표음문자의 창제로 역학 정책도 원활히 수행할 수가 있게 되어 譯學書가 꾸준히 간행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세종 시대에는 언어 이론에 관한 연구가 발달되었고, 이를 토대로 한 언어정책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세종은 그 시대 최고 학문을 깊이 소화하고 그 진수를 터득하여 마침내 국어의 문자화까지 성공했다는 면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시대에 이와 같은 언어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집현전과 정음청 등 전문 연구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한자음 개신 사업이 아무리 위대한 세종의 정신 밑에서 추진되었어도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설정된 음계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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