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를 보게 되므로 앞으로 더 이상의 영국에 의한 세계 해상지배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티르피츠의 해군증강정책은 영국과 독일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영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체제를 조직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후에 독일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발칸반도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대전의 발발과 경위
사라예보사건과 7월위기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는 아내와 함께 육군 대연습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 3 의 반독립적 국가를 만든다는 그의 구상은 세르비아인 등 남슬라브 여러 민족에 대한 헝가리인(마자르민족) 억압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피억압 민족인 남슬라브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 D. 디미트리예비치대령은 검은손[黑手組]이라는 암살단을 조직,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기 위해 G. 프린치프를 프함한 7명의 자객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 배치하였다. 결국 프린치프가 쏜 권총에 맞아 페르디난트 부부가 죽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A. 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독일총리 T.T.F.A. 베트만 홀베크는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은 계산에 넣고 있었다.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움직임과 그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큰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슐리펜계획과 마른전투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성립된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은 러시아·프랑스 양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1906년까지 독일육군참모총장을 지낸 A. 슐리펜은 독일의 동서 양면에서의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슐리펜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일 육군전체의 7/8 병력을 개전과 동시에 서쪽의 프랑스로 진격시켜 6주 안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러시아군과 맞부딪친다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까지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체의 1/8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서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독일군에 대해서는 프랑스방향을 향하여 우익, 즉 북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우선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우익으로 벨기에를 공격하고 북프랑스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3년에 죽었다. 그러나 후임자인 육군참모총장 H.J.L. 몰트케(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H.K.B. 몰트케의 조카로 小몰트케라 불리움)는 우익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는 슐리펜의 계획과는 달리 좌익 쪽으로 많은 병력을 빼돌렸다. 그 결과 남쪽은 강화되었으나 북쪽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개전 직후 북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기 직전 서부전선의 2개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돌렸다. 14년 9월 6∼12일의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이 저지된 까닭은 가장 우익쪽에 있던 제 1 군과 제 2 군 사이에 50㎞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룩셈부르크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육군참모본부에서 몰트케의 대리자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R. 헨츄중령이 자신의 판단으로 제 1 군과 제 2 군의 철수를 건의하면서 그 때까지의 진격을 정지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가 자주 논의되었으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2차례나 간섭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고 서부전선의 병력 자체를 약화시킨 데 있었다. 게다가 그 근본에는 독일의 국방예산을 해군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육군을 충실하게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티르피츠가 육성한 독일해군은 단 한 차례 영국함대와 싸웠을 뿐이고, 대부분 킬 등의 군항에 머물러 있었다. 잠수함 이외의 함정은 제해권을 쥐고 있었던 영국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결국 18년 10월 28일에 킬항구에서 일어난 해군반란은 독일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헨츄중령의 경고에 놀란 독일 제 2 군은 9월 9일에 서둘러 정찰기를 발진시켜 50㎞에 이르는 간격의 설정을 시찰케 하였고 정찰비행을 통해 영국의 대륙 파견군이 이 사이를 중앙돌파하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위험사태를 간단한 제 1 군과 제 2 군은 헨츄가 진언한 대로 같은 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출은 중앙돌파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전혀 없는 틈을 탄 우연한 진입일 뿐이었다. 원래 영국의 참전구실은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범했다는 것이었고, 슐리펜계획에 의해 벨기에의 중립을 짓밟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독일군의 행동이었다. 이처럼 마른 전투에는 뜻밖의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고, 이들 요인은 모두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마른전투는 대전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결국 슐리펜계획은 영국·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면에서 앞선 협상국측에 유리했고 미국의 협상국측 가담은 사태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 뒤에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른전투 이상으로 전국(戰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주요 공방전과 과학무기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사투를 되풀이한 북프랑스의 베르
대전의 발발과 경위
사라예보사건과 7월위기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는 아내와 함께 육군 대연습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 3 의 반독립적 국가를 만든다는 그의 구상은 세르비아인 등 남슬라브 여러 민족에 대한 헝가리인(마자르민족) 억압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피억압 민족인 남슬라브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 D. 디미트리예비치대령은 검은손[黑手組]이라는 암살단을 조직,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기 위해 G. 프린치프를 프함한 7명의 자객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 배치하였다. 결국 프린치프가 쏜 권총에 맞아 페르디난트 부부가 죽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A. 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독일총리 T.T.F.A. 베트만 홀베크는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은 계산에 넣고 있었다.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움직임과 그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큰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슐리펜계획과 마른전투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성립된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은 러시아·프랑스 양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1906년까지 독일육군참모총장을 지낸 A. 슐리펜은 독일의 동서 양면에서의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슐리펜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일 육군전체의 7/8 병력을 개전과 동시에 서쪽의 프랑스로 진격시켜 6주 안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러시아군과 맞부딪친다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까지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체의 1/8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서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독일군에 대해서는 프랑스방향을 향하여 우익, 즉 북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우선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우익으로 벨기에를 공격하고 북프랑스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3년에 죽었다. 그러나 후임자인 육군참모총장 H.J.L. 몰트케(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H.K.B. 몰트케의 조카로 小몰트케라 불리움)는 우익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는 슐리펜의 계획과는 달리 좌익 쪽으로 많은 병력을 빼돌렸다. 그 결과 남쪽은 강화되었으나 북쪽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개전 직후 북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기 직전 서부전선의 2개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돌렸다. 14년 9월 6∼12일의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이 저지된 까닭은 가장 우익쪽에 있던 제 1 군과 제 2 군 사이에 50㎞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룩셈부르크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육군참모본부에서 몰트케의 대리자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R. 헨츄중령이 자신의 판단으로 제 1 군과 제 2 군의 철수를 건의하면서 그 때까지의 진격을 정지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가 자주 논의되었으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2차례나 간섭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고 서부전선의 병력 자체를 약화시킨 데 있었다. 게다가 그 근본에는 독일의 국방예산을 해군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육군을 충실하게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티르피츠가 육성한 독일해군은 단 한 차례 영국함대와 싸웠을 뿐이고, 대부분 킬 등의 군항에 머물러 있었다. 잠수함 이외의 함정은 제해권을 쥐고 있었던 영국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결국 18년 10월 28일에 킬항구에서 일어난 해군반란은 독일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헨츄중령의 경고에 놀란 독일 제 2 군은 9월 9일에 서둘러 정찰기를 발진시켜 50㎞에 이르는 간격의 설정을 시찰케 하였고 정찰비행을 통해 영국의 대륙 파견군이 이 사이를 중앙돌파하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위험사태를 간단한 제 1 군과 제 2 군은 헨츄가 진언한 대로 같은 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출은 중앙돌파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전혀 없는 틈을 탄 우연한 진입일 뿐이었다. 원래 영국의 참전구실은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범했다는 것이었고, 슐리펜계획에 의해 벨기에의 중립을 짓밟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독일군의 행동이었다. 이처럼 마른 전투에는 뜻밖의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고, 이들 요인은 모두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마른전투는 대전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결국 슐리펜계획은 영국·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면에서 앞선 협상국측에 유리했고 미국의 협상국측 가담은 사태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 뒤에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른전투 이상으로 전국(戰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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