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문화적 발전과 기초적 기술
비판적 역사
비판적 역사
본문내용
로써 각 공간은 그 목적과 의미에 따라 각각에 어울리는 면적과 높이를 얻는다.‘는 것이다. . 로스의 건축사상은, 「칼러저택」(1904)과 「슈타이너저택」(1910)에서 구체화되었다. 특히「슈타이너저택」은 철근콘크리트로 건설된 최초의 개인주택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사의 전기를 이룬 작품이다. 로스는 장식을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건축의 자유파(Free School of Architecture)」를 1906년에 창설했다. 또 1908년에는 「장식과 죄악(Ornament and Verbrechen)」을 간행하여, 그의 합리적의 건축론을 피력했다. 장식을 거부한 작품은, 순수하고 명료한 사상과 높은 수준의 상징들이며, 우수한 조형의 미적 가치는, 그것이 표현하는 유익함의 정도와, 각각의 부분이 내적으로 확고히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외에 「뮬러저택」(1930) 등의 주택과 시카고, 트리뷴지 사옥 계획안 등이 있다. 로스의 사상과 작품이 미친 영향은 컸다. 전통에 대한 비판과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철저한 질서의 추구, 그리고 허무주의와 거의 유사한 반스틸의 주장은 합리주의 계보에 선 아방가르드에 널리 수용되었다.
◈Henry van de Velde
플란더스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반 드 벨트는, 초기엔 오히려, 회화와 음악,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가를 지망했던 그는 1881-83년 안트워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아울러 1884-85년에는 파리로 가서 까롤뤼스 뒤랑(Caro-lus Duran)의 문하에서 회화를 계속 공부했다. 반 드 벨트는 인상파 화가들이라든지 상징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귀국 후, 1889년 「레 벵(Les Vingt;20세기)」라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에 참가하여,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예술공예운동을 알게 되며, 모리스의 사상에 공명(共鳴)하기에 이른다. 1893년 「레 벵」 전람회에선, 회화대신 타페스트리를 출품하게 되었다. 반 드 벨트가 건축가로 전향한 것은 1894년 결혼 후 자택을 짓게 되면서였다. 모리스의 「빨간 집」과 비교되는 「블뤄 멘베르프(Bloemenwerf)」라 이름 붙여진 그의 자택에서 건물설계에만 머물지 않고, 가구, 카펫트, 커튼에서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통적인 형태모방에서 벗어나,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적 디자인화 시켰다. 그의 자택에 매료된 미술상 빙그는, 자신의 점포 실내장식을 반 드 벨트에게 의뢰하였으며, 그 점포를 아르누보라 불렀다. 이러한 경위로 반 드 벨트는 아르누보의 대표자로 지목되게 되었다. 1899년 베를린에 부임하여, 실내장식이라든가 건축설계에 종사하며, 독일의 공예개혁에 공헌했다 그 중에도 1906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교육과정상의 체계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가 확립시킨 커리큘럼은 후일 디자인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 약칭 D. W. B)\' 참가했다. 여기서, 개성을 주장하는 반 드 벨트와 규격화를 주장하는 무테시우스 사이에 전개된 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 제1차대전후, 그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서 교육과 집필활동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공업도시
1902-1904년에 프랑스의 젊은 건축가이자 사회주의자인 토니 가르니에가 공업도시계획안을 만들어냈다. 그가 공업도시라는 테마를 선택한 것은 단지 공업도시가 20세기 도시의 주요 부분을 형성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35,000명의 인구에 대해서 주택, 도시센터, 공장, 철도역사, 그 밖에 필요한 공공시설을 계획하였다. 더욱이 그는 모든 건물을 철근 콘크리트조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도시계획의 사상이 아직 카밀로 지테의 중세주의, 에베네저 하워드의 사회주의적, 목가적 사고방식,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헤 초기의 아직 불명확한 조형원리, 그리고 오토 와그너의 기술적, 고전주의적 제안단계의에 머무르고 있는 때에 합리주의적인 도시구상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 종합적인 구상에서 출발하여 가르니에는 독창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조형, 구조, 기술에 관하여 세부적인 문제도 몰두했다. 철근 콘크리트가 가진 특성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 연속창, 유리벽, 피로티, 자유로운 돌출된 처마, 자유로운 평면구성 옥상정원 등의 수법을 전개하였다. 또 상 하수도, 전기난방 온도조절 등에서 기술혁신을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례 없이 철저하게 검토되었다. 이 도시 계획상의 전체이념 및 개개의 건축유형은 합리주의적 건축운동 전방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작가로서 형성기에 있었던 르 꼬르뷔제에게 큰 영향을 준다.
◈Auguste Perret
건축표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철근 코크리트에 어울리는 조형을 추구한 것은 오귀스트 뻬레이다. 뻬레는 적극적으로 철근콘크리트구조에 몰두하므로서 근대건축의 파이오니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귀스뜨 뻬레는 두 살 어린 동생 귀스따브(Gustave)와 초창기부터 공동으로 작업했다. 그러므로 뻬레의 건축업적은 오히려 뻬레형제의 업적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지 모르겠다. 뻬레는 파리 에꼴 데 바자르에서 공부했으나 부친의 건설회사를 동생과 함께 인계하고자 중도 퇴학하게 되고 건설회사를 경영하게 된다. 그는 금세기 초 무렵 매우 정력적으로 철근콘크리트구조를 건설했다. 산 마로의 카지노(1899)를 필두로 파리에서는 프랭클린가 아파트(1903)와 뽄츄가의 갤러리(1905) 「샹젤리제극장」(1910-13)등을 차례차례 준공시켰다. 이들 작품은 모두 콘크리트 부어넣기 공법이 사용되었으며, 덧붙여 구조체를 노출시킨 기둥과 보 구조체를 사용했다. 뻬레는 경제성이 높고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근대건축을 지어갔다. 그의 대표걸작은 1922-23년에 지어진 당시의 「노뜨르담 성당」이다. 여기에서도 뻬레는 다시 한번 콘크리트 부어넣기 공법으로 이 성당을 준공시켰으나, 덧붙여 천장은 얇은 쉘 콘크리트 볼트구조를 도입, 채광효과를 노리면서 프리캐스트콘크리트 격자창을 박아 넣어 새로운 건축표현에 도달하고 있다. 그 밖에 몽마니의 「
◈Henry van de Velde
플란더스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반 드 벨트는, 초기엔 오히려, 회화와 음악,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가를 지망했던 그는 1881-83년 안트워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아울러 1884-85년에는 파리로 가서 까롤뤼스 뒤랑(Caro-lus Duran)의 문하에서 회화를 계속 공부했다. 반 드 벨트는 인상파 화가들이라든지 상징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귀국 후, 1889년 「레 벵(Les Vingt;20세기)」라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에 참가하여,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예술공예운동을 알게 되며, 모리스의 사상에 공명(共鳴)하기에 이른다. 1893년 「레 벵」 전람회에선, 회화대신 타페스트리를 출품하게 되었다. 반 드 벨트가 건축가로 전향한 것은 1894년 결혼 후 자택을 짓게 되면서였다. 모리스의 「빨간 집」과 비교되는 「블뤄 멘베르프(Bloemenwerf)」라 이름 붙여진 그의 자택에서 건물설계에만 머물지 않고, 가구, 카펫트, 커튼에서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통적인 형태모방에서 벗어나,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적 디자인화 시켰다. 그의 자택에 매료된 미술상 빙그는, 자신의 점포 실내장식을 반 드 벨트에게 의뢰하였으며, 그 점포를 아르누보라 불렀다. 이러한 경위로 반 드 벨트는 아르누보의 대표자로 지목되게 되었다. 1899년 베를린에 부임하여, 실내장식이라든가 건축설계에 종사하며, 독일의 공예개혁에 공헌했다 그 중에도 1906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교육과정상의 체계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가 확립시킨 커리큘럼은 후일 디자인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 약칭 D. W. B)\' 참가했다. 여기서, 개성을 주장하는 반 드 벨트와 규격화를 주장하는 무테시우스 사이에 전개된 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 제1차대전후, 그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서 교육과 집필활동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공업도시
1902-1904년에 프랑스의 젊은 건축가이자 사회주의자인 토니 가르니에가 공업도시계획안을 만들어냈다. 그가 공업도시라는 테마를 선택한 것은 단지 공업도시가 20세기 도시의 주요 부분을 형성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35,000명의 인구에 대해서 주택, 도시센터, 공장, 철도역사, 그 밖에 필요한 공공시설을 계획하였다. 더욱이 그는 모든 건물을 철근 콘크리트조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도시계획의 사상이 아직 카밀로 지테의 중세주의, 에베네저 하워드의 사회주의적, 목가적 사고방식,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헤 초기의 아직 불명확한 조형원리, 그리고 오토 와그너의 기술적, 고전주의적 제안단계의에 머무르고 있는 때에 합리주의적인 도시구상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 종합적인 구상에서 출발하여 가르니에는 독창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조형, 구조, 기술에 관하여 세부적인 문제도 몰두했다. 철근 콘크리트가 가진 특성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 연속창, 유리벽, 피로티, 자유로운 돌출된 처마, 자유로운 평면구성 옥상정원 등의 수법을 전개하였다. 또 상 하수도, 전기난방 온도조절 등에서 기술혁신을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례 없이 철저하게 검토되었다. 이 도시 계획상의 전체이념 및 개개의 건축유형은 합리주의적 건축운동 전방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작가로서 형성기에 있었던 르 꼬르뷔제에게 큰 영향을 준다.
◈Auguste Perret
건축표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철근 코크리트에 어울리는 조형을 추구한 것은 오귀스트 뻬레이다. 뻬레는 적극적으로 철근콘크리트구조에 몰두하므로서 근대건축의 파이오니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귀스뜨 뻬레는 두 살 어린 동생 귀스따브(Gustave)와 초창기부터 공동으로 작업했다. 그러므로 뻬레의 건축업적은 오히려 뻬레형제의 업적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지 모르겠다. 뻬레는 파리 에꼴 데 바자르에서 공부했으나 부친의 건설회사를 동생과 함께 인계하고자 중도 퇴학하게 되고 건설회사를 경영하게 된다. 그는 금세기 초 무렵 매우 정력적으로 철근콘크리트구조를 건설했다. 산 마로의 카지노(1899)를 필두로 파리에서는 프랭클린가 아파트(1903)와 뽄츄가의 갤러리(1905) 「샹젤리제극장」(1910-13)등을 차례차례 준공시켰다. 이들 작품은 모두 콘크리트 부어넣기 공법이 사용되었으며, 덧붙여 구조체를 노출시킨 기둥과 보 구조체를 사용했다. 뻬레는 경제성이 높고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근대건축을 지어갔다. 그의 대표걸작은 1922-23년에 지어진 당시의 「노뜨르담 성당」이다. 여기에서도 뻬레는 다시 한번 콘크리트 부어넣기 공법으로 이 성당을 준공시켰으나, 덧붙여 천장은 얇은 쉘 콘크리트 볼트구조를 도입, 채광효과를 노리면서 프리캐스트콘크리트 격자창을 박아 넣어 새로운 건축표현에 도달하고 있다. 그 밖에 몽마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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