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비판
Ⅲ. 百濟의 遼西 經略設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
Ⅳ. 백제의 요서 경략 목적
Ⅴ.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 위치 및 존속기간
1. 백제의 요서 경략
2. 백제의 요서 경략 위치
3. 백제의 요서 경략 존속기간
Ⅵ. 요서 경략 당시 백제의 대내적 및 대외적 관계
Ⅶ. 결 론
Ⅱ.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비판
Ⅲ. 百濟의 遼西 經略設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
Ⅳ. 백제의 요서 경략 목적
Ⅴ.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 위치 및 존속기간
1. 백제의 요서 경략
2. 백제의 요서 경략 위치
3. 백제의 요서 경략 존속기간
Ⅵ. 요서 경략 당시 백제의 대내적 및 대외적 관계
Ⅶ. 결 론
본문내용
왕12년,기원490년) 후위군 수십만이 백제를 공격하니 동성왕이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몬간나 등을 시켜 이 후위군을 대파했다.”고 했다. 그 뒤 요서의 백제세력이 어떠한 변천을 격었는지 문헌적으로 그 자취를 찾아 볼 길이 없으나, 백제는 북으로부터 고구려 세력에 눌려 남쪽으로 밀리던 나머지 요서에서의 잔세(殘勢)도 마침내 대륙세력(후위(後魏)?)에 의하여 밀려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상기,『동방사논총-「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1984,서울대학교출판부,pp.427~428.
뿐만 아니라《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12년에 해당하는 경오년(영명 8년,490)에 북위군의 공격을 물리친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몬간군 등에게 논공행상을 청하여 받은 것이 보여 상당 기간 중국에 있어서의 백제세력이 유지된 것을 보여 준다. 그후 麗羅의 협겨을 받아 본국이 위기에 빠짐에 다라 저절로 해외에 있어서의 세력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김철준,『한국고대사회연구』1990,서울대학교출판사,pp.53~54
그 옛 땅은 신라에 빼앗시고 성 근처의 남은 무리는 점점 흩어져 돌궐과 말갈에 q고속되었다. 그 왕 부여숭은 감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토를 신라 말갈에게 빼앗겨 부여씨의 군장은 마침내 끝났다. 《통전》
이 사료를 통해 신라와 당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나 진출세력이 붕괴했다는 것과 백제의 세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Ⅵ. 遼西 經略 당시 百濟의 대내적 및 대외적 관계
근초고왕 말년에 백제가 요서 지역을 경략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백제가 요서지역에 경략하기 전, 후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대내적 관계로서 근초고왕대에 남쪽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존세력을 복속시켜 전라도지방 전역을 지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 유역의 가야에도 힘을 행사해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국경의 서남쪽 지역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서남쪽을 평정한 다음에는 북쪽으로 세력확장을 꾀했다. 근초고왕의 이러한 북진정책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했다.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 싸움을 필두로, 371년에 일어난 평양성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정예군사 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의 옛 땅까지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때 백제는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정복활동을 원활히 하기위해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정력적이었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樂浪太守’로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후 근초고왕은 중국이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근초고왕은 또한 일본열도 지역으로도 세력을 뻗쳐 그 지역의 백제 계통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가 그것이다. 임병주, 위의 글, pp252~253
.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뒤로 麗濟양국의 충돌이 더욱 격화됨에 백제는 신라와의 친선에 힘을 기울였는가 하면 바다를 건너 일본과도 화친을 맺었으며 다시 바다를 통하여 동진(東晋) 송(宋)등과의 통교도 강행하였다. 동진(東晋)과의 통교는 근초고왕 시대로부터 끊임없이 행하여져 372년 동진에 조공하여 백제왕이 동진의 관작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줄곧 남조측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침류왕 때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까지 전래되었으며, 백제인의 일본진출도 이 시기를 중심으로 특필할 만한 것이 많으니, 정치적으로 일본과 결호(結好)함과 아울러 궁월군,아직기,왕인,주군등의 명인 등이 진출하여 한학지세(漢學地勢)의 분야를 개발하였으며 만(萬)으로 헤아리게 되는 인중이 집단적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신천지를 개척하는 등 당시 백제인의 진취적인 면을 발휘하였다.
이는 모두 해상활동이 왕성하였던 당년의 백제국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김상기, 위의 글, pp428.
Ⅶ. 結 論
이상으로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요서 진출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비판과 중국 남조측 사료 등 여러 사료등을 바탕으로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근거가 있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부족하고 짐작이지만 백제가 왜 요서 지역을 진출하려 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지만 요서 진출의 시기 및 요서에서의 존속기간, 요서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본 발표문은 요서 경략에 관한 여러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비판하였듯이 백제의 요서 경략을 부정하는 입장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역사를 탐구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적인 기록 중 어느 한곳에서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꼼꼼히 따져 보아 야 함은 당연한 것인데 본 발표문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것이다. 본 조에서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백제가 요서 지방에 진출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다.
본 발표문을 마무리하면서 백제의 요서 진출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 진출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등을 규명하는 것이 남은 과제라는 생각을 해보며 더욱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보다 확실한 사실로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서술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 문헌
이기백, 이기동, 『한국사 강좌 〔고대편〕』, 1981, 일조각
김상기, 『동방사 논총-「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하여」』1984, 서울대학교출판부
문정창, 『백제사』1988, 인간사
김천준, 『한국고대사회연구』1990, 서울대학교출판사
최몽룡, 『백제사의 이해』,1993, 학연문화사
유원재,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Ⅱ-백제』,1995, 국사편찬위원회
박현숙, 『(잊혀진 우리역사)백제 이야기』, 1998, 대한교과서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1998, 들녘
뿐만 아니라《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12년에 해당하는 경오년(영명 8년,490)에 북위군의 공격을 물리친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몬간군 등에게 논공행상을 청하여 받은 것이 보여 상당 기간 중국에 있어서의 백제세력이 유지된 것을 보여 준다. 그후 麗羅의 협겨을 받아 본국이 위기에 빠짐에 다라 저절로 해외에 있어서의 세력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김철준,『한국고대사회연구』1990,서울대학교출판사,pp.53~54
그 옛 땅은 신라에 빼앗시고 성 근처의 남은 무리는 점점 흩어져 돌궐과 말갈에 q고속되었다. 그 왕 부여숭은 감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토를 신라 말갈에게 빼앗겨 부여씨의 군장은 마침내 끝났다. 《통전》
이 사료를 통해 신라와 당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나 진출세력이 붕괴했다는 것과 백제의 세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Ⅵ. 遼西 經略 당시 百濟의 대내적 및 대외적 관계
근초고왕 말년에 백제가 요서 지역을 경략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백제가 요서지역에 경략하기 전, 후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대내적 관계로서 근초고왕대에 남쪽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존세력을 복속시켜 전라도지방 전역을 지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 유역의 가야에도 힘을 행사해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국경의 서남쪽 지역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서남쪽을 평정한 다음에는 북쪽으로 세력확장을 꾀했다. 근초고왕의 이러한 북진정책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했다.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 싸움을 필두로, 371년에 일어난 평양성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정예군사 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의 옛 땅까지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때 백제는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정복활동을 원활히 하기위해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정력적이었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樂浪太守’로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후 근초고왕은 중국이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근초고왕은 또한 일본열도 지역으로도 세력을 뻗쳐 그 지역의 백제 계통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가 그것이다. 임병주, 위의 글, pp252~253
.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뒤로 麗濟양국의 충돌이 더욱 격화됨에 백제는 신라와의 친선에 힘을 기울였는가 하면 바다를 건너 일본과도 화친을 맺었으며 다시 바다를 통하여 동진(東晋) 송(宋)등과의 통교도 강행하였다. 동진(東晋)과의 통교는 근초고왕 시대로부터 끊임없이 행하여져 372년 동진에 조공하여 백제왕이 동진의 관작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줄곧 남조측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침류왕 때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까지 전래되었으며, 백제인의 일본진출도 이 시기를 중심으로 특필할 만한 것이 많으니, 정치적으로 일본과 결호(結好)함과 아울러 궁월군,아직기,왕인,주군등의 명인 등이 진출하여 한학지세(漢學地勢)의 분야를 개발하였으며 만(萬)으로 헤아리게 되는 인중이 집단적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신천지를 개척하는 등 당시 백제인의 진취적인 면을 발휘하였다.
이는 모두 해상활동이 왕성하였던 당년의 백제국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김상기, 위의 글, pp428.
Ⅶ. 結 論
이상으로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요서 진출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비판과 중국 남조측 사료 등 여러 사료등을 바탕으로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근거가 있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부족하고 짐작이지만 백제가 왜 요서 지역을 진출하려 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지만 요서 진출의 시기 및 요서에서의 존속기간, 요서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본 발표문은 요서 경략에 관한 여러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비판하였듯이 백제의 요서 경략을 부정하는 입장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역사를 탐구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적인 기록 중 어느 한곳에서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꼼꼼히 따져 보아 야 함은 당연한 것인데 본 발표문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것이다. 본 조에서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백제가 요서 지방에 진출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다.
본 발표문을 마무리하면서 백제의 요서 진출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 진출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등을 규명하는 것이 남은 과제라는 생각을 해보며 더욱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보다 확실한 사실로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서술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 문헌
이기백, 이기동, 『한국사 강좌 〔고대편〕』, 1981, 일조각
김상기, 『동방사 논총-「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하여」』1984, 서울대학교출판부
문정창, 『백제사』1988, 인간사
김천준, 『한국고대사회연구』1990, 서울대학교출판사
최몽룡, 『백제사의 이해』,1993, 학연문화사
유원재,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Ⅱ-백제』,1995, 국사편찬위원회
박현숙, 『(잊혀진 우리역사)백제 이야기』, 1998, 대한교과서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1998,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