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요서 경략설의 의미와 사료속의 요서 경략
2. 요서 경략설의 검토
1)요서 경략설의 인정 견해
2)요서 경략설의 부정 견해
3. 소결론
2. 요서 경략설의 검토
1)요서 경략설의 인정 견해
2)요서 경략설의 부정 견해
3. 소결론
본문내용
배하의 산둥지방을 원정하였고, 동진으로부터 산둥 이남의 강소 절강 지방의 주 군을 빼앗은 것이라 했다. 정인보는 시기적으로 이를 소급하여 34세기의 교체기인 책계왕 분서왕 때에 이미 백제가 산둥지방에 진출하였고, 246년에는 부여를 공격한 여세를 몰아 전연 지배하의 요서 지방에 진출, 그 이후 이 지방을 경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서 진평 두 군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요서 경략설의 부정 견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서 경략설을 긍정하는 주장은 일단 사료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 의문을 품고서 백제의 대륙진출을 불신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백제가 군현을 설치했다는 진나라 때는 3세기 후반 ~ 5세기 초엽에 해당한다. 이 기간의 전반기에는 아직 백제가 해외에 군현을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후반기에도 4세기 중엽부터 황해도 지방을 놓고 고구려와 줄곧 전쟁을 치르느라 요서지방까지 진출할 군현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또 요서지방까지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함과 뛰어난 항해설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당시의 백제 사정상 생각하기 어렵다. 요컨대 당시 국제정세의 대세로 볼 때, 백제의 대륙진출을 전하는 이러한 기록을
2) 요서 경략설의 부정 견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서 경략설을 긍정하는 주장은 일단 사료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 의문을 품고서 백제의 대륙진출을 불신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백제가 군현을 설치했다는 진나라 때는 3세기 후반 ~ 5세기 초엽에 해당한다. 이 기간의 전반기에는 아직 백제가 해외에 군현을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후반기에도 4세기 중엽부터 황해도 지방을 놓고 고구려와 줄곧 전쟁을 치르느라 요서지방까지 진출할 군현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또 요서지방까지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함과 뛰어난 항해설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당시의 백제 사정상 생각하기 어렵다. 요컨대 당시 국제정세의 대세로 볼 때, 백제의 대륙진출을 전하는 이러한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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