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선군정치의 등장과 기능
2. 선군정치의 등장
(1) 선군정치의 개념
(2)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3. 왜 선군인가?
(1) 군의 유용성
(2) 군에 대한 견제
4. 선군정치의 기능
(1) 정통성 확보 기능
(2) 경제난 극복의 기능
(3) 사회통합의 기능
(4) 외교적 기능
5. 선군정치의 강화
6. 결론
◎ 참고문헌
2. 선군정치의 등장
(1) 선군정치의 개념
(2)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3. 왜 선군인가?
(1) 군의 유용성
(2) 군에 대한 견제
4. 선군정치의 기능
(1) 정통성 확보 기능
(2) 경제난 극복의 기능
(3) 사회통합의 기능
(4) 외교적 기능
5. 선군정치의 강화
6.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르면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을 지지하는 정도는 김일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우영 『전환기의 북한 사회통제체제』(서울: 통일연구원, 1999), p61.
김일성이 항일빨치산시절부터 쌓아온 카리스마를 ‘상속자’인 김정일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부터 9년간 지속된 마이너스 성장으로 극심한 침체에 놓인 경제상황은 정치적 위기 못지 않게 김정일 시대의 개막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1995년 이후 100년만의 대홍수로 엄청난 수해까지 겹치면서 북한경제는 3난(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 3저(국제경쟁력저하, 노동의욕저하, 기술수준저하), 3악(제품조악, 생산환경열악, 기계설비낙후)과 『동아일보』1996년 2월 7일
같은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지도자로서 김정일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과제였다.
경제적 위기와 맞물려서 사회통합의 위기도 발생하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과 생필품의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공장과 기업소 등 국가재산에 대한 좀도둑질 또는 절취행위가 늘어났다. 이는 생산능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이것이 주민경제의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1994년 이후에 탈북자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군-인민이 하나의 생명체임을 강조하는 북한사회에서 사회일탈의 증가는 체제를 위협하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대외적으로도 김정일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고립무원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은 교역상대국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경제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핵문제로 인해 국제적인 신뢰가 더욱 실추됨에 따라 북한은 대외적으로 심각한 고립을 맞게 되었다.
김정일은 정치, 경제, 사회, 대외적으로 발생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틀어쥐고 군대에 의거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김일성 사후 퍼져나가던 ‘북한붕괴론’을 비웃으며 현재까지도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점에서 김정일의 선군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왜 선군인가?
(1) 군의 유용성
북한은 군의 혁명성, 우월성 때문에 군을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우는 ‘선군’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의 사상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한다. 이는 군인들이 남한과 외부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데, 당국이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데다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 우월성을 주입시키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아마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로부터 가장 소외된 집단이 인민군대일 것이라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식량난이 심화되어 사회 곳곳에서 굶어 죽었지만 군에서는 한동안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고 한다. 또한 경제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의식이 군대 내에 팽배해 있다고 한다. 이 역시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통제와 끊임없는 사상교육의 결과라고 보는데,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북한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군의 사상성 때문일 것이며, 인민군이 체제유지의 보루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선일보』2002년 1월 7일, 「좌담: 인민군, ‘살지 어려워도 사회주의 지켜야’」
탈북자들은 군의 사회경제적 역할에 대해서도 “보통 사회에서 사람들을 활용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군대는 비용이 덜 든다. 또 군대는 조직력이 좋기 때문에 일을 시키기에 매우 적당하며, 건강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활용하기 매우 좋은 조직이다. 북한에서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에 군대가 투입된다. 군대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구호는 ‘조국보위도 사회주의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이고 병사들이 일하는 사업장에는 ‘조국은 병사들을 잊지 않으리’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안영길(전 후방총국 양식국 참모)와의 대담, 『통일한국』1998년 11월호.
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상성과 조직력, 실천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어온 조선인민군은 위기를 맞아 가용자원이 부족했던 북한체제에서 활용 가능한 가장 유용한 집단이었다. 김정일이 북한 체제의 위기 상황에서 군을 선택한 것은 이처럼 군이 다른 조직에 비해 사상성과 조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특히 자본주의의 사상이 북한체제에 침투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바, 사상성이 가장 투철한 군을 믿고 위기 극복과 체제유지를 도모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군에 대한 견제
군의 유용성과 함께 김정일이 ‘선군’을 택한 것은 군의 양면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군의 유용성을 체감하면서도 군의 위험성 또한 체득했을 것이다. 먼저 그는 가용자원이 부족한 위기의 상황에서 조직력, 실천력, 규율성, 사상성이 그 어느 조직보다도 뛰어난 군을 이용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도 했지만, 한편 군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체제 변혁의 기로에서 군의 불개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이와 같은 역사의 경험을 통해 군이 체제유지의 보루이자 체제붕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했을 것이며, 때문에 선군정치를 행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군의 사상을 강화하는데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군에 대한 견제의식은 선군정치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철우의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에 잘 나타나 있다.
1989년 12월 21일 로므니아(루마니아)에서 <개혁>, <개편> 바람을 타고 반정부소요가 일어 났다. 챠우쉐쓰꾸 대통령은 다음날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위상 밀레아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부는 불복종하였다. 군인들 속에서 동요가 일어 났다. 총 쥔 군인들은 데모행렬속에 끼여 든 반동들에게 총부리를 내리우고 말았다. 거꾸로 대통령이 체포되고 처형당했으며 당도 사회주의 정권도 다 무너지게 되었다. 쏘련방에서도 군대가 1991년 8월사변 당시 사회주의 배신자들에게 징벌을 가할데 관한 소련방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대로 사회주의배신자 옐찐의 반혁명의 도구로 전락되여 사회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김일성이 항일빨치산시절부터 쌓아온 카리스마를 ‘상속자’인 김정일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부터 9년간 지속된 마이너스 성장으로 극심한 침체에 놓인 경제상황은 정치적 위기 못지 않게 김정일 시대의 개막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1995년 이후 100년만의 대홍수로 엄청난 수해까지 겹치면서 북한경제는 3난(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 3저(국제경쟁력저하, 노동의욕저하, 기술수준저하), 3악(제품조악, 생산환경열악, 기계설비낙후)과 『동아일보』1996년 2월 7일
같은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지도자로서 김정일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과제였다.
경제적 위기와 맞물려서 사회통합의 위기도 발생하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과 생필품의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공장과 기업소 등 국가재산에 대한 좀도둑질 또는 절취행위가 늘어났다. 이는 생산능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이것이 주민경제의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1994년 이후에 탈북자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군-인민이 하나의 생명체임을 강조하는 북한사회에서 사회일탈의 증가는 체제를 위협하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대외적으로도 김정일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고립무원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은 교역상대국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경제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핵문제로 인해 국제적인 신뢰가 더욱 실추됨에 따라 북한은 대외적으로 심각한 고립을 맞게 되었다.
김정일은 정치, 경제, 사회, 대외적으로 발생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틀어쥐고 군대에 의거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김일성 사후 퍼져나가던 ‘북한붕괴론’을 비웃으며 현재까지도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점에서 김정일의 선군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왜 선군인가?
(1) 군의 유용성
북한은 군의 혁명성, 우월성 때문에 군을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우는 ‘선군’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의 사상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한다. 이는 군인들이 남한과 외부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데, 당국이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데다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 우월성을 주입시키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아마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로부터 가장 소외된 집단이 인민군대일 것이라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식량난이 심화되어 사회 곳곳에서 굶어 죽었지만 군에서는 한동안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고 한다. 또한 경제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의식이 군대 내에 팽배해 있다고 한다. 이 역시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통제와 끊임없는 사상교육의 결과라고 보는데,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북한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군의 사상성 때문일 것이며, 인민군이 체제유지의 보루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선일보』2002년 1월 7일, 「좌담: 인민군, ‘살지 어려워도 사회주의 지켜야’」
탈북자들은 군의 사회경제적 역할에 대해서도 “보통 사회에서 사람들을 활용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군대는 비용이 덜 든다. 또 군대는 조직력이 좋기 때문에 일을 시키기에 매우 적당하며, 건강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활용하기 매우 좋은 조직이다. 북한에서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에 군대가 투입된다. 군대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구호는 ‘조국보위도 사회주의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이고 병사들이 일하는 사업장에는 ‘조국은 병사들을 잊지 않으리’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안영길(전 후방총국 양식국 참모)와의 대담, 『통일한국』1998년 11월호.
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상성과 조직력, 실천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어온 조선인민군은 위기를 맞아 가용자원이 부족했던 북한체제에서 활용 가능한 가장 유용한 집단이었다. 김정일이 북한 체제의 위기 상황에서 군을 선택한 것은 이처럼 군이 다른 조직에 비해 사상성과 조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특히 자본주의의 사상이 북한체제에 침투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바, 사상성이 가장 투철한 군을 믿고 위기 극복과 체제유지를 도모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군에 대한 견제
군의 유용성과 함께 김정일이 ‘선군’을 택한 것은 군의 양면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군의 유용성을 체감하면서도 군의 위험성 또한 체득했을 것이다. 먼저 그는 가용자원이 부족한 위기의 상황에서 조직력, 실천력, 규율성, 사상성이 그 어느 조직보다도 뛰어난 군을 이용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도 했지만, 한편 군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체제 변혁의 기로에서 군의 불개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이와 같은 역사의 경험을 통해 군이 체제유지의 보루이자 체제붕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했을 것이며, 때문에 선군정치를 행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군의 사상을 강화하는데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군에 대한 견제의식은 선군정치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철우의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에 잘 나타나 있다.
1989년 12월 21일 로므니아(루마니아)에서 <개혁>, <개편> 바람을 타고 반정부소요가 일어 났다. 챠우쉐쓰꾸 대통령은 다음날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위상 밀레아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부는 불복종하였다. 군인들 속에서 동요가 일어 났다. 총 쥔 군인들은 데모행렬속에 끼여 든 반동들에게 총부리를 내리우고 말았다. 거꾸로 대통령이 체포되고 처형당했으며 당도 사회주의 정권도 다 무너지게 되었다. 쏘련방에서도 군대가 1991년 8월사변 당시 사회주의 배신자들에게 징벌을 가할데 관한 소련방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대로 사회주의배신자 옐찐의 반혁명의 도구로 전락되여 사회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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