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배경
사림정치시대
사림의 등장당쟁의 심화
영조의 탕평책
탕평론의 배경
영조의 노력
사도세자
2. 정조의 사상과 학문
정조의 탕평론
규장각과 초계문신제
문체반정과 문묘종사 사건
영남만인소 사건
외국 문물의 유입
3. 정조의 개혁정치
경제부문
경제개혁 실천의 의지
왕안석 논쟁
신해통공
경제개혁의 의의
4.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의
현륭원 조성
화성의 건설
5. 정치가로서의 정조
사림정치시대
사림의 등장당쟁의 심화
영조의 탕평책
탕평론의 배경
영조의 노력
사도세자
2. 정조의 사상과 학문
정조의 탕평론
규장각과 초계문신제
문체반정과 문묘종사 사건
영남만인소 사건
외국 문물의 유입
3. 정조의 개혁정치
경제부문
경제개혁 실천의 의지
왕안석 논쟁
신해통공
경제개혁의 의의
4.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의
현륭원 조성
화성의 건설
5. 정치가로서의 정조
본문내용
대한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솔선수범해야 하며 하급관리들이 미치는 영향을 하찮게 취급했다. 이에 정약용은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하급관리들을 잘 다루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정조는 개혁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의 주장도 수렴하고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후에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적극적 정치가로서 국왕의 역할을 재정립하려 노력했다. 이것은 정조가 늘 지향한 요, 순 성왕들의 정치 이념을 본받는 것이었지만 재위 기간 내에 반대 세력을 통합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정조 사후, 많은 개혁안들이 흐지부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낳게 되었다.
4.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의
현륭원 조성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죄인으로 사사되었기 때문에 그 유체는 초라한 곳에 매장되었다. 아직 즉위하기 전, 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산소를 이장하리라고 다짐했던 것 같다. 즉위 초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세세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론 벽파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실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공식적으로 영우원
(永祐園) 양주 배봉산에 위치하고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의 이장을 발표했다. 이장지는 수원의 화산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조는 이미 화성에 신도시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명칭도 영우원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변경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치장했다. 대소신료들은 이에 별 다른 반대의견을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조는 단순히 묘를 이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학문과 덕행을 찬양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정조의 정치적인 의도는 장용영 즉위 직후 만들어진 숙위소는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폐지되고 장용위가 신설되었다. 장용영은 이것이 개편된 것으로 외영은 화성에 설치되었다.
의 설치와 화성의 건설을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
화성의 건설
조선시대에 세워진 신도시 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바로 조선 건국과 한양천도(1394)로부터 정확히 400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거행된 행사이며 왕조 중흥의 역사적 사명의식,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본인의 효심, 정약용, 김홍도, 채제공, 조심태 등 여러 정파의 관료학자, 예술가들의 능력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루어낸 성과이다. 화성의 건설은 이 시기 실학자들의 기술적 지식을 선보일 수 있는 하나의 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축성 기술에 더해서 옹성과 벽돌 등 중국으로부터 배워온 ‘북학’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척화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실학자들의 주장. 영, 정조 대 이후에 이러한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의 성과도 적극 활용되었고 측우기를 이용한 강수 자료, 수차의 실험 이외에 축성 작업에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의 여러 가지 기계가 제작, 사용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을 추진한 목적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결과가 나와 있지만 크게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첫째로 도시의 입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이다. 이곳은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와 함께 유수부(留守府, 군사 요충지에 왕의 행궁을 지어놓은 도시)로 승격된다. 이는 개성, 강화와 함께 도성의 네 방향 모두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도시 건설 이후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전국 규모의 시장을 개설하고 인삼과 모자 등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한양의 부호와 상인들을 유치하고자 노력했다. 화성은 이후 전국적인 상업도시로 발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조가 화성을 상업도시로 성장시켜 정치 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양의 금난전권은 반대파인 노론 세력의 정치 자금줄로 매여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이로부터 독립된 시장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반대파의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완성한 화성을 정조는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1795년 화성행차는 화성의 정치적 의미를 확인시키고 정조의 정치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일이었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김홍도 작)’라는 그림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단순한 임금의 나들이가 아니라 상당한 의미가 부여된 큰 식전 행사였음이 분명하다.
5. 정치가로서의 정조
정조가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주였다는 사실은 여러 분야에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그의 치세 하에서만 어느 정도 효력을 거두었을 뿐이다. 정조 사후, 정국은 수구적 조치와 반대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의 정치로 접어들고 만다. 역사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순조 대부터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정조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모든 사안에 간섭하는 경향이 있었고 너무 세세한 업무까지 간섭해서 신하들의 원성을 샀다. 또는 정조는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는 등 결단성이 부족했다고도 한다. 결국 그는 신중하고 영명한 군주였으나 정치가로서는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정치, 경제적 개혁과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했으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정조의 뜻이 후대에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던 것이다.
정조의 정치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사림 정치의 틀을 무너뜨리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2} 동방미디어, 2000
이이화.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길사, 1994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2. 조선 후기의 정치} 1997
정종실록
정조는 개혁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의 주장도 수렴하고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후에 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적극적 정치가로서 국왕의 역할을 재정립하려 노력했다. 이것은 정조가 늘 지향한 요, 순 성왕들의 정치 이념을 본받는 것이었지만 재위 기간 내에 반대 세력을 통합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정조 사후, 많은 개혁안들이 흐지부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낳게 되었다.
4.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의
현륭원 조성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죄인으로 사사되었기 때문에 그 유체는 초라한 곳에 매장되었다. 아직 즉위하기 전, 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산소를 이장하리라고 다짐했던 것 같다. 즉위 초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세세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론 벽파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실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공식적으로 영우원
(永祐園) 양주 배봉산에 위치하고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의 이장을 발표했다. 이장지는 수원의 화산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조는 이미 화성에 신도시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명칭도 영우원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변경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치장했다. 대소신료들은 이에 별 다른 반대의견을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조는 단순히 묘를 이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학문과 덕행을 찬양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정조의 정치적인 의도는 장용영 즉위 직후 만들어진 숙위소는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폐지되고 장용위가 신설되었다. 장용영은 이것이 개편된 것으로 외영은 화성에 설치되었다.
의 설치와 화성의 건설을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
화성의 건설
조선시대에 세워진 신도시 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바로 조선 건국과 한양천도(1394)로부터 정확히 400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거행된 행사이며 왕조 중흥의 역사적 사명의식,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본인의 효심, 정약용, 김홍도, 채제공, 조심태 등 여러 정파의 관료학자, 예술가들의 능력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루어낸 성과이다. 화성의 건설은 이 시기 실학자들의 기술적 지식을 선보일 수 있는 하나의 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축성 기술에 더해서 옹성과 벽돌 등 중국으로부터 배워온 ‘북학’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척화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실학자들의 주장. 영, 정조 대 이후에 이러한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의 성과도 적극 활용되었고 측우기를 이용한 강수 자료, 수차의 실험 이외에 축성 작업에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의 여러 가지 기계가 제작, 사용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을 추진한 목적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결과가 나와 있지만 크게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첫째로 도시의 입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이다. 이곳은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와 함께 유수부(留守府, 군사 요충지에 왕의 행궁을 지어놓은 도시)로 승격된다. 이는 개성, 강화와 함께 도성의 네 방향 모두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도시 건설 이후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전국 규모의 시장을 개설하고 인삼과 모자 등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한양의 부호와 상인들을 유치하고자 노력했다. 화성은 이후 전국적인 상업도시로 발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조가 화성을 상업도시로 성장시켜 정치 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양의 금난전권은 반대파인 노론 세력의 정치 자금줄로 매여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이로부터 독립된 시장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반대파의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완성한 화성을 정조는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1795년 화성행차는 화성의 정치적 의미를 확인시키고 정조의 정치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일이었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김홍도 작)’라는 그림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단순한 임금의 나들이가 아니라 상당한 의미가 부여된 큰 식전 행사였음이 분명하다.
5. 정치가로서의 정조
정조가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주였다는 사실은 여러 분야에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그의 치세 하에서만 어느 정도 효력을 거두었을 뿐이다. 정조 사후, 정국은 수구적 조치와 반대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의 정치로 접어들고 만다. 역사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순조 대부터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정조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모든 사안에 간섭하는 경향이 있었고 너무 세세한 업무까지 간섭해서 신하들의 원성을 샀다. 또는 정조는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는 등 결단성이 부족했다고도 한다. 결국 그는 신중하고 영명한 군주였으나 정치가로서는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정치, 경제적 개혁과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했으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정조의 뜻이 후대에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던 것이다.
정조의 정치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사림 정치의 틀을 무너뜨리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2} 동방미디어, 2000
이이화.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길사, 1994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2. 조선 후기의 정치} 1997
정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