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중록」의 역사적 배경
2. 「한중록」의 작품 개요
(1) 基一 (한중록 1, 4)
(2) 基二 (한중록 5)
(3) 基三 (한중록 6)
(4) 基四 (한중록 2, 3)
3. 「한중록」과 혜경궁 홍씨의 삶
(1) 「한중록」基一의 성격
(2) 영조 재위시의 혜경궁 홍씨의 삶
① 세계와의 조화
② 부조화와 갈등
(3) 정조 재위시의 혜경궁 홍씨의 삶
① 성취와 갈등
② 화합과 조화의 세계
4. 「한중록」에 나타난 혜경궁 홍씨의 태도
(1) 효와 충
(2) 예와 연민, 두려움과 체념의 복합성
(3) 모정과 굴신
5. 「한중록」의 문예적 가치
(1) 국문학사적 가치
(2) 문학적 가치
(3) 궁중풍속의 만화경
․참고문헌
․참고자료
2. 「한중록」의 작품 개요
(1) 基一 (한중록 1, 4)
(2) 基二 (한중록 5)
(3) 基三 (한중록 6)
(4) 基四 (한중록 2, 3)
3. 「한중록」과 혜경궁 홍씨의 삶
(1) 「한중록」基一의 성격
(2) 영조 재위시의 혜경궁 홍씨의 삶
① 세계와의 조화
② 부조화와 갈등
(3) 정조 재위시의 혜경궁 홍씨의 삶
① 성취와 갈등
② 화합과 조화의 세계
4. 「한중록」에 나타난 혜경궁 홍씨의 태도
(1) 효와 충
(2) 예와 연민, 두려움과 체념의 복합성
(3) 모정과 굴신
5. 「한중록」의 문예적 가치
(1) 국문학사적 가치
(2) 문학적 가치
(3) 궁중풍속의 만화경
․참고문헌
․참고자료
본문내용
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여 탕평책을 정책의 신조로 하고, 영조의 탕평책을 계수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는데 힘썼다.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형(文衡)의 상징적인 존재로 삼고, 홍문관 수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정권의 핵심으로 키워나갔다. 또한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서적편찬에도 힘을 기울였고, 특히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제도를 신설하고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수용, 발전시켰으며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또한 정조의 치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의 정책을 시행하여 새로이 대두하는 지식인을 등용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하는 탕평책의 추진과 문화정책을 구현하려는데 있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시대의 풍조에 청신한 격려를 주려고 하는 새로운 시책의 일환이었다.
찬수(撰修)에는 《팔자백선(八子百選)》, 《주서백선(朱書百選)》, 《오경백선(五經百選)》과 문집으로 《홍재전서(弘齋全書)》가 있으며 능(陵)은 수원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 순조 : 1790(정조 14)~1834(순조 34). 이름은 이공(李柴),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로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제 23대 왕이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고, 비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로서 11세에 즉위하였다.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이 세도하던 시대로 시(時) 벽(僻)의 당파가 서로 모략하여 조정이 문란하였고, 지방은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를 틈타 1811년에 난 난이 일어나는 등 많은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천재지변이 잦아 나라가 불안하였다. 한편 왕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사부수권(四部手圈)》, 《대학유의(大學類義)》 등을 간행하게 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세자(익종, 翼宗)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능은 인릉(仁陵)으로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 홍봉한 : 1713(숙종 39)~1778(정조 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이며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5세손이고, 수재(守齋) 홍현보(洪鉉輔)의 아들로서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의 형이며,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11년(1735)에 생원이 되고, 음서(蔭敍)로 참봉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냈다. 1743년 딸이 세자빈(혜경궁 홍씨)으로 뽑힌 뒤 이듬해 정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1745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특진되었고,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케 되면서 누진(累進)하여 다음해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오르고 이어 예조 참판으로 연접 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냈다. 영조 28년(1752)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撰進)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勾管堂上)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고,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에 인책한 이천보(李天輔) 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1762년 세자가 서인(庶人)으로 되고 뒤주에 갇히자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방관적인 태도로 세자의 아사(餓死)를 묵인하고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한강에 나가 여러 대신들과 선유(船遊)를 즐겼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아사사건을 뉘우치고 시호를 내리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케 한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수의편(垂義篇)》을 찬술(撰述)하여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어 반대파인 벽파(僻派) 탄압의 구실로 이용했다.
1763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 시무(時務)6조(條)로 당면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환곡의 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國庫)의 충실과 백성 부담의 절감을 기했다. 1771년 벽파(僻派)가 사도세자의 두 아들의 관작을 삭탈하고 세손(世孫)까지 해하려 할 때, 이를 막다가 삭직(削職)되고 청주(淸州)에 부처(付剔8되었으나, 기민한 수습으로 시파(時派)가 승리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정사휘감(正史彙鑑)》이 있으며,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 홍인한 : 1722(경종 2)~1776(영조 5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여(定汝)이다. 판서 홍보현(洪輔鉉)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29년(175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정언(正言) 교리(校理) 헌납 등을 거쳐 1757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承旨)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대사헌 도승지 호조 예조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1774) 좌의정(1775)에 이르렀다.
그는 봉한(鳳漢)의 아우로서 혜경궁 홍씨의 종조(從祖)였으나 세손인 정조(正祖)와 사이가 나빠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즉위를 반대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형(文衡)의 상징적인 존재로 삼고, 홍문관 수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정권의 핵심으로 키워나갔다. 또한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서적편찬에도 힘을 기울였고, 특히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제도를 신설하고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수용, 발전시켰으며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또한 정조의 치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의 정책을 시행하여 새로이 대두하는 지식인을 등용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하는 탕평책의 추진과 문화정책을 구현하려는데 있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시대의 풍조에 청신한 격려를 주려고 하는 새로운 시책의 일환이었다.
찬수(撰修)에는 《팔자백선(八子百選)》, 《주서백선(朱書百選)》, 《오경백선(五經百選)》과 문집으로 《홍재전서(弘齋全書)》가 있으며 능(陵)은 수원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 순조 : 1790(정조 14)~1834(순조 34). 이름은 이공(李柴),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로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제 23대 왕이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고, 비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로서 11세에 즉위하였다.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이 세도하던 시대로 시(時) 벽(僻)의 당파가 서로 모략하여 조정이 문란하였고, 지방은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를 틈타 1811년에 난 난이 일어나는 등 많은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천재지변이 잦아 나라가 불안하였다. 한편 왕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사부수권(四部手圈)》, 《대학유의(大學類義)》 등을 간행하게 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세자(익종, 翼宗)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능은 인릉(仁陵)으로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 홍봉한 : 1713(숙종 39)~1778(정조 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이며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5세손이고, 수재(守齋) 홍현보(洪鉉輔)의 아들로서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의 형이며,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11년(1735)에 생원이 되고, 음서(蔭敍)로 참봉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냈다. 1743년 딸이 세자빈(혜경궁 홍씨)으로 뽑힌 뒤 이듬해 정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1745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특진되었고,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케 되면서 누진(累進)하여 다음해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오르고 이어 예조 참판으로 연접 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냈다. 영조 28년(1752)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撰進)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勾管堂上)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고,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에 인책한 이천보(李天輔) 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1762년 세자가 서인(庶人)으로 되고 뒤주에 갇히자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방관적인 태도로 세자의 아사(餓死)를 묵인하고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한강에 나가 여러 대신들과 선유(船遊)를 즐겼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아사사건을 뉘우치고 시호를 내리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케 한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수의편(垂義篇)》을 찬술(撰述)하여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어 반대파인 벽파(僻派) 탄압의 구실로 이용했다.
1763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 시무(時務)6조(條)로 당면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환곡의 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國庫)의 충실과 백성 부담의 절감을 기했다. 1771년 벽파(僻派)가 사도세자의 두 아들의 관작을 삭탈하고 세손(世孫)까지 해하려 할 때, 이를 막다가 삭직(削職)되고 청주(淸州)에 부처(付剔8되었으나, 기민한 수습으로 시파(時派)가 승리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정사휘감(正史彙鑑)》이 있으며,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 홍인한 : 1722(경종 2)~1776(영조 5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여(定汝)이다. 판서 홍보현(洪輔鉉)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29년(175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정언(正言) 교리(校理) 헌납 등을 거쳐 1757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承旨)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대사헌 도승지 호조 예조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1774) 좌의정(1775)에 이르렀다.
그는 봉한(鳳漢)의 아우로서 혜경궁 홍씨의 종조(從祖)였으나 세손인 정조(正祖)와 사이가 나빠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즉위를 반대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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