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론
Ⅰ. 델로스동맹의 성립배경
Ⅱ. 델로스 동맹의 性格과 活動
1) 동맹의 성격
2) 동맹의 초기 활동
Ⅲ. 아테네의 帝國化
1) 同盟國들의 反亂
2) 同盟國에 대한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
■ 결론
Ⅰ. 델로스동맹의 성립배경
Ⅱ. 델로스 동맹의 性格과 活動
1) 동맹의 성격
2) 동맹의 초기 활동
Ⅲ. 아테네의 帝國化
1) 同盟國들의 反亂
2) 同盟國에 대한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
■ 결론
본문내용
스파르타의 장군들은 테르모퓔라이(Thermopylae), 플라타이아(Plataea), 살라미스(Salamis), 미칼레(Mycale)등의 주요 전투에서 그리스 군을 총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탁월한 지도력으로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을 통해, 그리스 내부에서 스파르타의 위상은 한층 증폭되었고, 한마디로 플라타이아 전투 이후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의 수증에 놓여 있는 듯했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을 지휘하였던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상당히 앞서 있던 스파르타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그에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폐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권력은 대대로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고, 사회 구조의 뿌리 깊은 불안정성으로 인해 펠로폰네소스 반도 영역 밖에서의 군사적 활동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있어 해군의 창설은 페르시아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사고로 간주되었다. 사실상 그리스의 지리적, 경제적 여건상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 수 있는 국가는 불가피하게 바다를 기반으로 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계 국가들이 페르시아의 영향 하에 있고, 에게海 동부 지역이 페르시아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조건하에서만, 스파르타는 그리스 본토에서의 제한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판도가 아시아 연안과 트라케(Thrace)까지 확장된다면, 스파르타가 강한 해상국가가 되지 않는 이상 그렇게 넓은 영역에서 온전한 지배권을 확립하기는 힘들었다. 김경아,『델로스(Delos) 동맹의 초기 성격에 대한 연구』고려대학교대학원, 1996, P.8.
즉 현실에 있어서 스파르타인들은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수행할 만한 기제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던 중 480-79년(B.C.) 두 해 동안의 전쟁 승리는 거의 해상 전 에서 달성된 것이었다. 살라미스(Salamis)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은 철저하게 패배하여 다시 에게 海서 해상 전을 치르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으며, 이후의 미칼레(Mycale) 전투가 비록 육지에서 치러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레오티키다스(Leotychidas)가 그리스의 함대를 소아시아 연안에 배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련의 전투들은 해군력의 위상을 높여 주었고, 그것은 곧 그리스 함대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아테네의 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범그리스동맹’의 지휘국은 스파르타였고, 아테네는 단지 일개 회원국가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관계는 더 이상 현실적인 세력 균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었다.
그 후 479년(B.C.), 페르시아의 공격을 피해 아티카(Attica) 지방에서 피신했던 아테네인들이 다시 돌아왔고, 폐허가 된 도시와 성벽을 再건축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외의 지역에 요새화된 성벽과 항구가 존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에 다른 핑계를 대며 아테네의 武裝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아테네의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계략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성벽은 완성된다. 그는 아테네의 바다에서의 취약성이 마라톤 원정에서 거의 파멸을 가져올 뻔 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군사전략을 밀고 나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는 육군의 희생이 있더라도 海軍力을 강화해야 하고 육지에서는 방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테네로서는 처음으로 스파르타의 권위에 반항한 것이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스파르타인들이 이에 대해 다소 모멸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공개적으로 아테네에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같은 해 겨울 ‘범그리스동맹’병력은 새로운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헬레스폰트 (Hellespont)지역으로 나아갔고, 아비도스(Abidos)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철수하게 되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아테네가 처음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리스 병력의 지도국으로 부상한 사건으로, 델로스 동맹의 결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헬레스폰트 원정에서, 당시 아테네의 입장은 다른 동맹국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테네는 일찍부터 흑해 북부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해 왔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아테네로서는 헬레스폰트 원정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케르소네소스(Chersonesos) 지역이 갖는 의미는 스파르타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아티가 지역은 곡물 재배에 적합한 동지가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곡물에 의존하는 공동체로서는 그 공급로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외부 세력에 대해 늘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종의 ‘생명선’인 곡물 공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그 유통로를 따라 무력을 갖춘 ‘거점’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 점이 곧 아테네로 하여금 해상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게 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김경아, 앞의 논문,1996, P.10.
이후 델로스 동맹 결성의 직접적이 단초가 되는 사건들은 487년(B.C) \'범그리스동맹‘함대의 비잔티움 점령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사건은 당시 점령군의 총지휘관이었던 파우사니아스의 非行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의하면, 파우사니아스는 승리자의 영웅심에 도취되어 갈수록 거만해졌고, 급기야 ’범그리스동맹‘국가들-특히 이오니아-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오니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서 미칼레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관심의 촛점은 그리스를 지원한 이오니인들의 처리에 모아졌다, 이는 이오니아 국가들을 ‘범그리스동맹’의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동맹 가입을 허락한다는 것은 곧 동맹이 이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지는 것을 의미했는데, 동맹 회의는 이오니아 내륙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보호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사모스(Samos), 키오스(Chios), 레스보스(Lesbos) 등의 몇 몇 島嶼지
즉 현실에 있어서 스파르타인들은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수행할 만한 기제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던 중 480-79년(B.C.) 두 해 동안의 전쟁 승리는 거의 해상 전 에서 달성된 것이었다. 살라미스(Salamis)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은 철저하게 패배하여 다시 에게 海서 해상 전을 치르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으며, 이후의 미칼레(Mycale) 전투가 비록 육지에서 치러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레오티키다스(Leotychidas)가 그리스의 함대를 소아시아 연안에 배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련의 전투들은 해군력의 위상을 높여 주었고, 그것은 곧 그리스 함대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아테네의 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범그리스동맹’의 지휘국은 스파르타였고, 아테네는 단지 일개 회원국가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관계는 더 이상 현실적인 세력 균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었다.
그 후 479년(B.C.), 페르시아의 공격을 피해 아티카(Attica) 지방에서 피신했던 아테네인들이 다시 돌아왔고, 폐허가 된 도시와 성벽을 再건축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외의 지역에 요새화된 성벽과 항구가 존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에 다른 핑계를 대며 아테네의 武裝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아테네의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계략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성벽은 완성된다. 그는 아테네의 바다에서의 취약성이 마라톤 원정에서 거의 파멸을 가져올 뻔 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군사전략을 밀고 나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는 육군의 희생이 있더라도 海軍力을 강화해야 하고 육지에서는 방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테네로서는 처음으로 스파르타의 권위에 반항한 것이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스파르타인들이 이에 대해 다소 모멸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공개적으로 아테네에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같은 해 겨울 ‘범그리스동맹’병력은 새로운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헬레스폰트 (Hellespont)지역으로 나아갔고, 아비도스(Abidos)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철수하게 되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아테네가 처음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리스 병력의 지도국으로 부상한 사건으로, 델로스 동맹의 결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헬레스폰트 원정에서, 당시 아테네의 입장은 다른 동맹국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테네는 일찍부터 흑해 북부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해 왔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아테네로서는 헬레스폰트 원정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케르소네소스(Chersonesos) 지역이 갖는 의미는 스파르타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아티가 지역은 곡물 재배에 적합한 동지가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곡물에 의존하는 공동체로서는 그 공급로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외부 세력에 대해 늘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종의 ‘생명선’인 곡물 공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그 유통로를 따라 무력을 갖춘 ‘거점’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 점이 곧 아테네로 하여금 해상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게 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김경아, 앞의 논문,1996, P.10.
이후 델로스 동맹 결성의 직접적이 단초가 되는 사건들은 487년(B.C) \'범그리스동맹‘함대의 비잔티움 점령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사건은 당시 점령군의 총지휘관이었던 파우사니아스의 非行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의하면, 파우사니아스는 승리자의 영웅심에 도취되어 갈수록 거만해졌고, 급기야 ’범그리스동맹‘국가들-특히 이오니아-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오니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서 미칼레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관심의 촛점은 그리스를 지원한 이오니인들의 처리에 모아졌다, 이는 이오니아 국가들을 ‘범그리스동맹’의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동맹 가입을 허락한다는 것은 곧 동맹이 이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지는 것을 의미했는데, 동맹 회의는 이오니아 내륙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보호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사모스(Samos), 키오스(Chios), 레스보스(Lesbos) 등의 몇 몇 島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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