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명장 기마유신
(김유신의 출생배경이야기....)
(김유신의 청년기....)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김유신과 김춘추의 목숨을 건 맹세)
(전쟁터에서)
(비담의 난과 김유신의 활약)
(김유신의 전성기)
(김유신의 노년기...)
(김유신의 가족들)
(김유신의 인품)
(잊혀지지 않는 영웅....)
우리가 알아야 할 김유신 설화
※ 유신의 탄생설화
어릴적부터 보인 영웅의 기개
※ 추남설화
※ 명장 김유신
※ 충신 김유신
※ 선견지명을 보인 김유신
※ 신라 통일에 기여
원술설화
<생각해보기....>
* 왜 김유신은 그의 아들 원술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 신라의 세속오계
천관녀 설화(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1. 만남
2. 천관녀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3. 맺어질 수 없는 인연
<생각해보기>
* 과연 사랑에 장벽이 있었을까?
국가제사(천관녀가 여사제라는 증거)
☞ 불교(신라의 불교 전래과정)
(김유신의 출생배경이야기....)
(김유신의 청년기....)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김유신과 김춘추의 목숨을 건 맹세)
(전쟁터에서)
(비담의 난과 김유신의 활약)
(김유신의 전성기)
(김유신의 노년기...)
(김유신의 가족들)
(김유신의 인품)
(잊혀지지 않는 영웅....)
우리가 알아야 할 김유신 설화
※ 유신의 탄생설화
어릴적부터 보인 영웅의 기개
※ 추남설화
※ 명장 김유신
※ 충신 김유신
※ 선견지명을 보인 김유신
※ 신라 통일에 기여
원술설화
<생각해보기....>
* 왜 김유신은 그의 아들 원술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 신라의 세속오계
천관녀 설화(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1. 만남
2. 천관녀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3. 맺어질 수 없는 인연
<생각해보기>
* 과연 사랑에 장벽이 있었을까?
국가제사(천관녀가 여사제라는 증거)
☞ 불교(신라의 불교 전래과정)
본문내용
항상 강박관념처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되는데 당시 하급 귀족에 불과했던 천관녀와 만약 혼인을 하게 된다면 이건 반전시킬 수 없는 추락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법흥왕때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신라 사회엔 불교가 공인되게 된다. 그리고 김유신이 살던 진평왕때에 와서는 화랑에도 불교신앙이 뿌리내리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이 이끌던 낭도들의 무리인 용화향도다. 이는 불교의 미륵신앙을 추구하던 단체다. 이런 분위기에서 토착신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사제와 만난다는 건 반신라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김유신이 상당히 정치적으로 출세하고 그러면서 차츰 고유신앙보다 불교가 그당시 사회에서 주류가 되면서 부모입장에서는 김유신이 종래의 토착이나 고유신앙에 가깝게 지내는거보다는 사회여론이나 종교계 비난에 대해서 기존의 토착신앙과는 결별하고 불교적인 그런 쪽으로 하기위해서 둘을 갈라놓은게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지난 98년 이후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평생 홀로 살며 김유신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친 천관녀를 위해 매년 11월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생각해보기>
* 과연 사랑에 장벽이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천관녀 역시 고유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에서 희생되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사랑한다고 해서 혼인이 허락하는 사회가 아니였습니다. 김유신 역시 몰락한 금관 가야의 왕족 출신으로서 신라 사회의 중심에 서기 위해 천관녀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골품제가 행해지던 신라 사회에서는 기득권 보호를 위해 특수한 신분을 상정하여 결혼 대상에 제한을 두었다.)
국가제사(천관녀가 여사제라는 증거)
노년에 접어든 김유신이 자신을 그리워하다 죽어간 여인을 위해 지었다는 천관사지
"황량한 펄판위에 절의 흔적들만 남아 있어 쓸쓸하기만 하다."
남성이 사회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풍요와 안녕을 상징하는 여성의 역할은 오래도록 면면히 이어졌다. 가령 김유신이 활동한 7세기에도 경주 인근 주요 산의 호국신은 여신이었다. 그리고 각지의 여자 농업신은 불교 수용이후 불교적으로 윤색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경우,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 사례가 나온다. 제2대 차차웅이 시조묘(始祖廟)를 세운다음 누이 동생인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시조묘는 왕실뿐 아니라 국가의 중심적 제사처였다. 아로는 왕실 나아가 국가 전체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에 어떤 학자는 아로와 같이 'ar' 발음을 가진 신라 초기 왕비나 왕매(王妹)는 왕실 제사를 주관하던 여사제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왕비들은 여사제로서 왕과 함께 정치의 한축을 이루었던 셈이다. 이와같이 국가 성립 초기에도 여성은 여전히 농업신이나 국가 수호신으로 모셔졌고, 국가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남성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하더라도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여성의 근원적인 생산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삼국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불교(신라의 불교 전래과정)
신라에서는 5세기 전반에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처음 소개된 후, 백여년이 흐른 법흥왕 15년(528)무렵에 국가 종교로 정식 인정 받았다. 천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기고 있던 삼국에서 부처라는 이방의 신을 받드는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뜻한다. 특히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피를 수반하는 진통을 겪기까지 하였다.
불교는 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유용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법흥왕이 집권한 시기에 6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왕은 육부의 우두머리를 대표하는 정도의 인물이었지, 모든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지배자는 아니었다. 법흥황은 어떻게든 지배층 내부의 관행과 사고를 뜯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불교는 귀족들의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천신의 권위를 위축시키는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불교 공인 이후 신라 사회는 크게 변화되어 갔다. 당장에 두드러진 것은 왕권강화였다. 한편 불교는 신라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윤희전생의 불교적 내세관이 신라 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거대한 무덤에 막대한 부장품을 집어넣는 관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참고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7(삼국의 정치와 사회 Ⅲ - 신라, 가야)』, 1997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96
3.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 피평사, 2000
4.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5. 김부식, 『삼국사기』, 박광순(역해), 하서, 1999
6. 김부식, 『標點 校勘本삼국사기』, 한국사 사료연구소(편역), 한글과 컴퓨터, 1996
7. 김진영, 안영훈 역주. 『김유신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8. 서거정, 『동국통감 Ⅰ,Ⅱ』,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96
9. 손영목(편), 『삼국왕조야록』, 오늘, 1999
10.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90
11.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1990
12. 이기동, 『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 보문당, 1984
13. 이기동, 『신라사회사 연구』, 보문당, 1997
14. 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0
15, 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일조각, 1999
16. 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의 이야기』, 김영사, 2000
17. 일연,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리상호(역), 조운찬(교열), 까치글방, 1999
18.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 실록』, 들녘, 1998
19. 이이화, 「삼국의 세력 다툼과 중국과의 전쟁」,『한국사 이야기3』, 한길사, 1998
20. 역사편찬 신문위원회, 『역사신문 1권』, 사계절, 1995
21. 최재석, 「신라시대의 골품제」,『한국고대사회사연구』, 일지사, 1987
2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인물대사전』, 중앙일보 M&B
23.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서경문화사, 1997
24.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7
지난 98년 이후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평생 홀로 살며 김유신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친 천관녀를 위해 매년 11월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생각해보기>
* 과연 사랑에 장벽이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천관녀 역시 고유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에서 희생되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사랑한다고 해서 혼인이 허락하는 사회가 아니였습니다. 김유신 역시 몰락한 금관 가야의 왕족 출신으로서 신라 사회의 중심에 서기 위해 천관녀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골품제가 행해지던 신라 사회에서는 기득권 보호를 위해 특수한 신분을 상정하여 결혼 대상에 제한을 두었다.)
국가제사(천관녀가 여사제라는 증거)
노년에 접어든 김유신이 자신을 그리워하다 죽어간 여인을 위해 지었다는 천관사지
"황량한 펄판위에 절의 흔적들만 남아 있어 쓸쓸하기만 하다."
남성이 사회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풍요와 안녕을 상징하는 여성의 역할은 오래도록 면면히 이어졌다. 가령 김유신이 활동한 7세기에도 경주 인근 주요 산의 호국신은 여신이었다. 그리고 각지의 여자 농업신은 불교 수용이후 불교적으로 윤색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경우,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 사례가 나온다. 제2대 차차웅이 시조묘(始祖廟)를 세운다음 누이 동생인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시조묘는 왕실뿐 아니라 국가의 중심적 제사처였다. 아로는 왕실 나아가 국가 전체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에 어떤 학자는 아로와 같이 'ar' 발음을 가진 신라 초기 왕비나 왕매(王妹)는 왕실 제사를 주관하던 여사제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왕비들은 여사제로서 왕과 함께 정치의 한축을 이루었던 셈이다. 이와같이 국가 성립 초기에도 여성은 여전히 농업신이나 국가 수호신으로 모셔졌고, 국가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남성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하더라도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여성의 근원적인 생산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삼국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불교(신라의 불교 전래과정)
신라에서는 5세기 전반에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처음 소개된 후, 백여년이 흐른 법흥왕 15년(528)무렵에 국가 종교로 정식 인정 받았다. 천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기고 있던 삼국에서 부처라는 이방의 신을 받드는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뜻한다. 특히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피를 수반하는 진통을 겪기까지 하였다.
불교는 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유용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법흥왕이 집권한 시기에 6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왕은 육부의 우두머리를 대표하는 정도의 인물이었지, 모든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지배자는 아니었다. 법흥황은 어떻게든 지배층 내부의 관행과 사고를 뜯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불교는 귀족들의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천신의 권위를 위축시키는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불교 공인 이후 신라 사회는 크게 변화되어 갔다. 당장에 두드러진 것은 왕권강화였다. 한편 불교는 신라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윤희전생의 불교적 내세관이 신라 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거대한 무덤에 막대한 부장품을 집어넣는 관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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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96
3.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 피평사, 2000
4.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5. 김부식, 『삼국사기』, 박광순(역해), 하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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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진영, 안영훈 역주. 『김유신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8. 서거정, 『동국통감 Ⅰ,Ⅱ』,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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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일조각, 1999
16. 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의 이야기』, 김영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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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 실록』, 들녘, 1998
19. 이이화, 「삼국의 세력 다툼과 중국과의 전쟁」,『한국사 이야기3』, 한길사, 1998
20. 역사편찬 신문위원회, 『역사신문 1권』, 사계절, 1995
21. 최재석, 「신라시대의 골품제」,『한국고대사회사연구』, 일지사, 1987
2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인물대사전』, 중앙일보 M&B
23.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서경문화사, 1997
24.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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