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일반적인 봉건제의 개념과 사회구조
Ⅲ. 서유럽 및 중국의 봉건제
Ⅳ.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 및 붕괴원인
Ⅴ. 러시아 봉건제의 형성과 발전과정
Ⅵ. 러시아의 봉건제의 특징(서유럽 봉건제와의 차이점)
Ⅶ. 결 론
Ⅷ. 참 고 문 헌
Ⅱ. 일반적인 봉건제의 개념과 사회구조
Ⅲ. 서유럽 및 중국의 봉건제
Ⅳ.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 및 붕괴원인
Ⅴ. 러시아 봉건제의 형성과 발전과정
Ⅵ. 러시아의 봉건제의 특징(서유럽 봉건제와의 차이점)
Ⅶ. 결 론
Ⅷ.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시 다른 민족들에 의해 무너졌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러시아 땅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할거한 채 서로 싸웠다.
그 과정에서 동슬라브족이 가장 힘있는 민족으로 자리잡았는데, 그들의 언어를 기준으로 차차 대러시아 사람과 소러시아 사람으로 나뉘어갔다.이들이 바로 러시아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 가운데서도 대러시아 사람이 지배적인 민족이 된다.
슬라브 사람들이 러시아 땅에 세운 최초의 국가는 이른바 키예프 루시였다. 즉 원시 공동체가 해체되고 초기 봉건사회가 성립된 것이다. 루시라는 이름은 15세기 후반까지 쓰였으나, 모스크바 공국 시대인 이반 3세 때 러시아로 바뀌어 불리더니, 제정 러시아 시대인 1721년 표트르 1세(영어로는 Peter)에 의하여 러시아가 정식 이름으로 채택 되었다. 키예프 루시의 시작은 우리 역사의 후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 중엽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동슬라브 사람들이 세운 키예프 공국이었다. 그뒤 키예프 이웃의 여러 도시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공국들이 섰으며 그 수가 많을때는 10개에서 12개에 이르렀다. 이 공국들이 하나의 연합 국가 또는 복합 국가를 형성했으며 이것을 흔히 키예프 루시하고 불렀다.
2. 키예프 공국
최초의 러시아 국가, 키예프 공국의 기원이나 성격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키예프 공국의 기원에 관한 키예프 공국은 첫째, 사회적으로 볼 때 봉건체제를 유지했다. 주된 지배 계급은 보야르라고 불린 대귀족으로, 그들의 영지는 세습되었으며 어느 경우에는 친위대를 거느렸고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누렸다. 공국의 우두머리인 공후(公侯)로 하여금 보야르 두마 결정에 따르게 함으로써 공후를 자신들의 영향 아래에 둔 경우가 흔했다. 보야르 바로 아래에 상인 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갖가지 상업에 종사하면서 재부를 쌓았으며 고리대금업을 번성시키기도 했다. 그들 역시 지배계급이었다. 이들 아래에 수공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도공ㆍ피혁공ㆍ대장장이ㆍ무기공 등등의 구역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아래에 소농민들이 있었는데, 수공업자들과 더불어 지배받는 계급을 형성했다.
공국들은 거의 민회를 갖고 있었으나, 키예프 루시에서 두 번째로 큰 공국인 노브고로드 공국은 상인이 중심이 된 베체라는 이름의 민회를 발전시켜 민회의 주요 행정관들은 물론 공후까지도 뽑았다. 다른 한편으로, 농민이 중심이 된 지역 공동 협력체인 미르를 발전시킨 경우도 있었다.
둘째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키예프 루시의 6대 공후 블라디미르 대공이 989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 후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국가로 기독교의 한 지파인 그리스 정교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 종교를 믿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정교가 그 이후 러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다. 키릴 문자의 개발, 교육의 보급, 건축과 예술의 발전, 기존 법률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의 도입을 통한 법률의 진화등은 그리스 정교의 영향이었다.
3. 몽골 타타르 지배시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웠던 키예프 루시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 중기에 해당되던 시점에 분열과 해체의 징조들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났다. 몽골의 다양한 부족들, 그리고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생활하던 몽골족과 터키족의 혼혈인 타타르족을 모두 통합시켜 1206년에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아 몽골 제국의 첫 번째 칸이 된 테무진,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 및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는 유럽에 대한 원정을 계속하면서 키예프 루시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공격을 가했다. 키예프 루시는 몽골 장군들의 표현으로 독하고 끈질기며 용맹스럽게대항했으나 1240년에 마침내 바투의 대군 앞에 멸망하고 말았다.
바투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몽골제국의 한 부분으로서의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이제는 망국민이 된 키예프 루시 사람들을 가혹하게 지배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절연되었다. 첫째,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근대화를 촉진시킨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시대적 조류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의 발전 속도를 서유럽의 발전 속도에 비해 2세기나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대신에 몽골 제국을 특징지은 절대주의와 군국주의가 뿌리깊이 심어졌으며 몽골 특유의 호구 조사와 징세 및 화폐 등 몇가지 행정적 기술이 전해졌는데, 이것들은 그뒤 모스크바 대공국에,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이은 제정 러시아에 남게 되었다. 둘째, 북서부가 북유럽 사람들과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몽골 지배자들이 그 지역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 모스크바 대공국
1) 모스크바 대공국의 개창
다행히 몽골 타타르의 굴레 속에서도 러시아 사람들은 독립의 날을 기다리며 민족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 가운데, 키예프 러시아의 변경에 자리잡은 조그만 도시인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공국을 세워 몽골의 지배를 덜 받던 모스크바 공국이 이제는 원이라 불리는 몽골제국의 쇠망과 그 부분으로서의 킵차크 한국의 쇠망을 틈타 차차 힘을 길러나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성장하면서 러시아의 중심으로 자라났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지도자가 모스크바 공국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였다. 그뒤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과 같은 용기와 지혜를 함께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 1380년에 조국 루시를 몽골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구하기 위해뭉쳐 싸우자라는 구호아래 국민들을 궐기시켜 대항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곧 크렘린을 건축했다.
그뒤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영걸스런 통치자들이 계속 대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우선 이반 3세의 역할이 컸다. 외교와 전쟁의 두 수단을 통해 지난날 키예프 루시를 형성했던 지역들을 거의 모두 모스크바 대공국에 편입시킨 데 이어 킵차크 한국의 붕괴를 적절히 활용해 1480년에 몽골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아주 벗어났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이반 대제로 불렸다. 이때로부터 그는 [사모데르제츠]의 칭호를
그 과정에서 동슬라브족이 가장 힘있는 민족으로 자리잡았는데, 그들의 언어를 기준으로 차차 대러시아 사람과 소러시아 사람으로 나뉘어갔다.이들이 바로 러시아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 가운데서도 대러시아 사람이 지배적인 민족이 된다.
슬라브 사람들이 러시아 땅에 세운 최초의 국가는 이른바 키예프 루시였다. 즉 원시 공동체가 해체되고 초기 봉건사회가 성립된 것이다. 루시라는 이름은 15세기 후반까지 쓰였으나, 모스크바 공국 시대인 이반 3세 때 러시아로 바뀌어 불리더니, 제정 러시아 시대인 1721년 표트르 1세(영어로는 Peter)에 의하여 러시아가 정식 이름으로 채택 되었다. 키예프 루시의 시작은 우리 역사의 후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 중엽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동슬라브 사람들이 세운 키예프 공국이었다. 그뒤 키예프 이웃의 여러 도시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공국들이 섰으며 그 수가 많을때는 10개에서 12개에 이르렀다. 이 공국들이 하나의 연합 국가 또는 복합 국가를 형성했으며 이것을 흔히 키예프 루시하고 불렀다.
2. 키예프 공국
최초의 러시아 국가, 키예프 공국의 기원이나 성격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키예프 공국의 기원에 관한 키예프 공국은 첫째, 사회적으로 볼 때 봉건체제를 유지했다. 주된 지배 계급은 보야르라고 불린 대귀족으로, 그들의 영지는 세습되었으며 어느 경우에는 친위대를 거느렸고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누렸다. 공국의 우두머리인 공후(公侯)로 하여금 보야르 두마 결정에 따르게 함으로써 공후를 자신들의 영향 아래에 둔 경우가 흔했다. 보야르 바로 아래에 상인 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갖가지 상업에 종사하면서 재부를 쌓았으며 고리대금업을 번성시키기도 했다. 그들 역시 지배계급이었다. 이들 아래에 수공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도공ㆍ피혁공ㆍ대장장이ㆍ무기공 등등의 구역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아래에 소농민들이 있었는데, 수공업자들과 더불어 지배받는 계급을 형성했다.
공국들은 거의 민회를 갖고 있었으나, 키예프 루시에서 두 번째로 큰 공국인 노브고로드 공국은 상인이 중심이 된 베체라는 이름의 민회를 발전시켜 민회의 주요 행정관들은 물론 공후까지도 뽑았다. 다른 한편으로, 농민이 중심이 된 지역 공동 협력체인 미르를 발전시킨 경우도 있었다.
둘째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키예프 루시의 6대 공후 블라디미르 대공이 989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 후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국가로 기독교의 한 지파인 그리스 정교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 종교를 믿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정교가 그 이후 러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다. 키릴 문자의 개발, 교육의 보급, 건축과 예술의 발전, 기존 법률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의 도입을 통한 법률의 진화등은 그리스 정교의 영향이었다.
3. 몽골 타타르 지배시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웠던 키예프 루시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 중기에 해당되던 시점에 분열과 해체의 징조들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났다. 몽골의 다양한 부족들, 그리고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생활하던 몽골족과 터키족의 혼혈인 타타르족을 모두 통합시켜 1206년에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아 몽골 제국의 첫 번째 칸이 된 테무진,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 및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는 유럽에 대한 원정을 계속하면서 키예프 루시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공격을 가했다. 키예프 루시는 몽골 장군들의 표현으로 독하고 끈질기며 용맹스럽게대항했으나 1240년에 마침내 바투의 대군 앞에 멸망하고 말았다.
바투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몽골제국의 한 부분으로서의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이제는 망국민이 된 키예프 루시 사람들을 가혹하게 지배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절연되었다. 첫째,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근대화를 촉진시킨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시대적 조류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의 발전 속도를 서유럽의 발전 속도에 비해 2세기나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대신에 몽골 제국을 특징지은 절대주의와 군국주의가 뿌리깊이 심어졌으며 몽골 특유의 호구 조사와 징세 및 화폐 등 몇가지 행정적 기술이 전해졌는데, 이것들은 그뒤 모스크바 대공국에,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이은 제정 러시아에 남게 되었다. 둘째, 북서부가 북유럽 사람들과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몽골 지배자들이 그 지역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 모스크바 대공국
1) 모스크바 대공국의 개창
다행히 몽골 타타르의 굴레 속에서도 러시아 사람들은 독립의 날을 기다리며 민족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 가운데, 키예프 러시아의 변경에 자리잡은 조그만 도시인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공국을 세워 몽골의 지배를 덜 받던 모스크바 공국이 이제는 원이라 불리는 몽골제국의 쇠망과 그 부분으로서의 킵차크 한국의 쇠망을 틈타 차차 힘을 길러나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성장하면서 러시아의 중심으로 자라났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지도자가 모스크바 공국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였다. 그뒤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과 같은 용기와 지혜를 함께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 1380년에 조국 루시를 몽골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구하기 위해뭉쳐 싸우자라는 구호아래 국민들을 궐기시켜 대항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곧 크렘린을 건축했다.
그뒤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영걸스런 통치자들이 계속 대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우선 이반 3세의 역할이 컸다. 외교와 전쟁의 두 수단을 통해 지난날 키예프 루시를 형성했던 지역들을 거의 모두 모스크바 대공국에 편입시킨 데 이어 킵차크 한국의 붕괴를 적절히 활용해 1480년에 몽골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아주 벗어났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이반 대제로 불렸다. 이때로부터 그는 [사모데르제츠]의 칭호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