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1. 여론조작의 개념
2. 북풍은 북에서 불지 않는다.
3. 접근 틀
4. 배경
본 론
Ⅰ.첫 번째 사례 : “총풍” 사건
1. 북풍 공작의 진실
2. 성공한 아젠다(agenda)와 실패한 아젠다
3. ‘총풍’, 섣부른 여론조작?
4. 현 정권의 실수
<이하 총풍 관련 동아일보 98년 10월 1일 특종 보도 기사>
①“大選 직전 北에 판문점 총격 요청”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자 1면 (종합)
〈3면에 관련기사〉
②97대선 직전 北에 판문점 총격 요청/사건 전말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 03면 (종합) 기획. 연재
5.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의 전개
6. ‘총풍’의 한계
7. ‘태산 명동에 서일필’
Ⅱ. 두 번째 사례 :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정말 신 북풍인가?
1. 문제 제기
2. 햇볕정책과 베를린 선언, 그리고 新 북풍
◎“베를린 선언 총선에 이용하지 않겠다.”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3일자
◎“국민 73.5% 베를린 선언지지”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4일자
◎[한나라당] 이 총재 "베를린 선언은 신 북풍"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4일자
3. 남북정상회담 발표와 4.13 총선
4. 남북정상회담 발표는 일종의 여론조작이다?-접근방법
5.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관련 보도를 통한 접근
6. 성공한 아젠다로서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결 론
1. 여론조작의 개념
2. 북풍은 북에서 불지 않는다.
3. 접근 틀
4. 배경
본 론
Ⅰ.첫 번째 사례 : “총풍” 사건
1. 북풍 공작의 진실
2. 성공한 아젠다(agenda)와 실패한 아젠다
3. ‘총풍’, 섣부른 여론조작?
4. 현 정권의 실수
<이하 총풍 관련 동아일보 98년 10월 1일 특종 보도 기사>
①“大選 직전 北에 판문점 총격 요청”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자 1면 (종합)
〈3면에 관련기사〉
②97대선 직전 北에 판문점 총격 요청/사건 전말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 03면 (종합) 기획. 연재
5.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의 전개
6. ‘총풍’의 한계
7. ‘태산 명동에 서일필’
Ⅱ. 두 번째 사례 :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정말 신 북풍인가?
1. 문제 제기
2. 햇볕정책과 베를린 선언, 그리고 新 북풍
◎“베를린 선언 총선에 이용하지 않겠다.”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3일자
◎“국민 73.5% 베를린 선언지지”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4일자
◎[한나라당] 이 총재 "베를린 선언은 신 북풍"
한겨레신문 2000년 3월 14일자
3. 남북정상회담 발표와 4.13 총선
4. 남북정상회담 발표는 일종의 여론조작이다?-접근방법
5.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관련 보도를 통한 접근
6. 성공한 아젠다로서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결 론
본문내용
있다. 남한의 인민들은 거의 반강제적인 세뇌를 통해 전 인민이 레드 콤플렉스에 걸려 있었고 이는 매 선거 때마다 민생관련 정책이나 국부 창출 등의 쟁점이 의제화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권력이 기만적으로 내세우는 안보, 반공논리에 언론이 놀아나고(물론 언론으로서는 이를 보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겠으나 어쨌건 여권의 의제를 언제나 쟁점화 시켜 왔다)인민들은 이에 현혹되어 마치 여당에 표를 던지지 않으면 머리에 뿔이 나고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는 공산괴뢰도당에 의해 자랑스런 자유대한민국이 오늘 내일에라도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다음은 80년대 중반 이후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북풍에 관한 요약이다.
지난 87년 13대 대선을 불과 18일 앞두고 터진 KAL기 폭파사건은 북풍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파괴력도 컸다. 사건 발생 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정당 자체의 여론조사는 노태우 후보가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다소 뒤진 것으로 나왔으나 사건이 터진 뒤 노태우 후보는 전세를 역전해 승세를 굳혔다.
92년 14대 대선 때는 선거일을 3개월 앞두고 안기부가 발표한 김낙중 간첩사건과 거물간첩 이선실의 조선노동당 사건이 김대중 민주당 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간첩사건으로 김대중 후보의 개인비서가 구속됐고, 김 후보는 선거기간 내내 김영삼 민자당 후보로부터 색깔론 공세를 받아야 했다.
96년 411 총선 때는 북한군이 선거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비무장지대에 무장병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의 무력시위는 며칠째 계속 이어지면서 당시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의 비리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신한국당을 기사회생케 하는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97년 대선 직전의 북풍은 정권교체로 인해 그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났는데 월북한 오익제와 북한의 고위간부 김병식이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에게 보낸 편지가 선거 직전 공개됐고, 윤홍준이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를 용공분자로 몰아세우는 기자회견을 했다. 선거 뒤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97년 대선 와중에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윤홍준에게 공작금을 건네주었다는 이른바 ‘아말렉 작전’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최초로 북풍공작의 일단을 드러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살펴볼 때, 역대 선거에서 북풍의 파괴력이 컸고, 항상 집권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한겨레신문 2000년 4월 10일 기사 “역대 선거 북풍 파괴력 컸다” 참조)
이와 같은 일련의 북풍 공작은 노태우 정권의 말기에 3당 야합을 통해 기만적으로 태동한 문민정부-이 어휘도 일본식 표기이므로 사실상 민간정부라는 단어가 더 타당하다는 국어학계의 요구를 언론은 묵살하고 있다-에서도 마치 교과서인양 그대로 답습했다. 그것이 이른바 ‘총풍’사건으로 드러난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며 이는 아무리 민간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 태생부터가 군사정권과의 야합으로 태어났으며 그 통치 방식이나 선거전략을 그대로 답습한 데서 김영삼 정권의 한계를 보여준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 일어났던 판문점 총격 요청을 통한 북풍 조작 의도 또한 이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이회창과 당시 여권인 민자당이 몰랐다고 인정해 줄지라도 당시 3인방이 그러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한 것은 마땅히 김영삼 정권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96년 4.11총선 때의 북한군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도 진상이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정황적인 증거를 볼 때 총선 직후 밀가루 북송이 있었고 이를 담당한 기업들 중 하나가 진로 그룹이었으며 총풍의 한성기 또한 진로그룹 고문이었다. 당시 밀가루 북송의 실무를 담당한 오정은이 총풍 사건에서도 청와대 행정관으로서 한기석과 모든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이러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96년 총선의 북한군 판문점 무력시위와 97년 대선의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그들만의 단독행위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많으며 이회창이나 김영삼이 연루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권력 핵심부까지 상당한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자신들이 태어난 군부 쪽의 태를 끊으려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그 방법론적인 면은 군사정권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하여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온갖 위법행위-수구세력이 그토록 철폐를 하지 않으려는 국가 보안법을 의미한다-를 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김대중 정권의 북풍은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연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북풍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으리라 파악되지만 그 본질적 의도야 어쨌건 간에 발표 시기상의 문제는 다분히 여론조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거의 모든 북풍(북한 관련 사건)은 총선이나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현 정부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북풍의 외형이 바뀌었을 뿐 총선에 이용하려는 의도는 동일했던 것이고 오히려 온풍이라는 화려한 포장아래 가장 의심을 받을 시기인 총선 3일전에 그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온풍의 효과는 야당으로 하여금 오히려 적극적 공세의 한계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포장되어짐으로서 야당이 적극적 비판을 못하게 하는 구실을 하였으며 그 동안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했던 과거 정권의 행태를 알면서도 유권자들로 하여금 민족 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을 제공함으로써 오해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도 새로운 북풍의 또 다른 특징인 것이다.
이는 총풍 사건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현 정권이 예전의 그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엿보인다. 어떤 쟁점을 섣불리 의제화시키는 것은 예기치 못한 효과(side effect)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권 초기에 절실히 느낀 현 정권은 모든 것이 확실하게 마무리된 후에 언론에 대한 철저한 엠바고를 전제로 남북정상회담을 터뜨림으로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끝-
다음은 80년대 중반 이후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북풍에 관한 요약이다.
지난 87년 13대 대선을 불과 18일 앞두고 터진 KAL기 폭파사건은 북풍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파괴력도 컸다. 사건 발생 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정당 자체의 여론조사는 노태우 후보가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다소 뒤진 것으로 나왔으나 사건이 터진 뒤 노태우 후보는 전세를 역전해 승세를 굳혔다.
92년 14대 대선 때는 선거일을 3개월 앞두고 안기부가 발표한 김낙중 간첩사건과 거물간첩 이선실의 조선노동당 사건이 김대중 민주당 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간첩사건으로 김대중 후보의 개인비서가 구속됐고, 김 후보는 선거기간 내내 김영삼 민자당 후보로부터 색깔론 공세를 받아야 했다.
96년 411 총선 때는 북한군이 선거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비무장지대에 무장병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의 무력시위는 며칠째 계속 이어지면서 당시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의 비리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신한국당을 기사회생케 하는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97년 대선 직전의 북풍은 정권교체로 인해 그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났는데 월북한 오익제와 북한의 고위간부 김병식이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에게 보낸 편지가 선거 직전 공개됐고, 윤홍준이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를 용공분자로 몰아세우는 기자회견을 했다. 선거 뒤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97년 대선 와중에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윤홍준에게 공작금을 건네주었다는 이른바 ‘아말렉 작전’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최초로 북풍공작의 일단을 드러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살펴볼 때, 역대 선거에서 북풍의 파괴력이 컸고, 항상 집권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한겨레신문 2000년 4월 10일 기사 “역대 선거 북풍 파괴력 컸다” 참조)
이와 같은 일련의 북풍 공작은 노태우 정권의 말기에 3당 야합을 통해 기만적으로 태동한 문민정부-이 어휘도 일본식 표기이므로 사실상 민간정부라는 단어가 더 타당하다는 국어학계의 요구를 언론은 묵살하고 있다-에서도 마치 교과서인양 그대로 답습했다. 그것이 이른바 ‘총풍’사건으로 드러난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며 이는 아무리 민간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 태생부터가 군사정권과의 야합으로 태어났으며 그 통치 방식이나 선거전략을 그대로 답습한 데서 김영삼 정권의 한계를 보여준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 일어났던 판문점 총격 요청을 통한 북풍 조작 의도 또한 이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이회창과 당시 여권인 민자당이 몰랐다고 인정해 줄지라도 당시 3인방이 그러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한 것은 마땅히 김영삼 정권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96년 4.11총선 때의 북한군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도 진상이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정황적인 증거를 볼 때 총선 직후 밀가루 북송이 있었고 이를 담당한 기업들 중 하나가 진로 그룹이었으며 총풍의 한성기 또한 진로그룹 고문이었다. 당시 밀가루 북송의 실무를 담당한 오정은이 총풍 사건에서도 청와대 행정관으로서 한기석과 모든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이러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96년 총선의 북한군 판문점 무력시위와 97년 대선의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그들만의 단독행위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많으며 이회창이나 김영삼이 연루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권력 핵심부까지 상당한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자신들이 태어난 군부 쪽의 태를 끊으려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그 방법론적인 면은 군사정권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하여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온갖 위법행위-수구세력이 그토록 철폐를 하지 않으려는 국가 보안법을 의미한다-를 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김대중 정권의 북풍은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연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북풍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으리라 파악되지만 그 본질적 의도야 어쨌건 간에 발표 시기상의 문제는 다분히 여론조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거의 모든 북풍(북한 관련 사건)은 총선이나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현 정부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북풍의 외형이 바뀌었을 뿐 총선에 이용하려는 의도는 동일했던 것이고 오히려 온풍이라는 화려한 포장아래 가장 의심을 받을 시기인 총선 3일전에 그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온풍의 효과는 야당으로 하여금 오히려 적극적 공세의 한계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포장되어짐으로서 야당이 적극적 비판을 못하게 하는 구실을 하였으며 그 동안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했던 과거 정권의 행태를 알면서도 유권자들로 하여금 민족 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을 제공함으로써 오해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도 새로운 북풍의 또 다른 특징인 것이다.
이는 총풍 사건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현 정권이 예전의 그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엿보인다. 어떤 쟁점을 섣불리 의제화시키는 것은 예기치 못한 효과(side effect)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권 초기에 절실히 느낀 현 정권은 모든 것이 확실하게 마무리된 후에 언론에 대한 철저한 엠바고를 전제로 남북정상회담을 터뜨림으로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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