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소설의 발전적인 모습들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기독교 소설의 발전적인 모습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기독교 문학론 - 네 가지 관점에 의한
1. 모방이론과 기독교문학
2. 독자중심이론과 기독교문학
3. 표현이론과 기독교문학
4. 객관이론과 기독교문학

Ⅱ. 횡보의 다성적 소설 「사랑과 죄」
1. 머리말
2. 다성소설론에 대한 일반적 고찰
3. 다성적 성향의 소설-「사랑과 죄」
4. 텍스트의 주요인물 분석
5. 텍스트와 관련한 다성소설 논의
6. 맺음말

Ⅲ. 김동리의 「을화」에 관하여

나의 생각...

Ⅳ. 기독교 소설의 발전적인 모습들
- 이신현의 「구도자」 및 현길언의 단편소설들
나의 생각...

본문내용

좌우하게 된다. 을화는 결과적으로 두 선배 무당의 영향을 받아왔다. 하나는 빡지무당이요, 또 하나는 태주할미다. 전자에게서는 직접적으로, 후자에게서는 간접적으로....또 전자는 긍정적인 면의 정신적 지주로, 후자는 부정적인 면의 한 짝으로...그런데 을화가 잣실 마을에서 살면서 빡지무당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입을 때까지는 그래도 그녀의 무업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데가 없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을화가 그 마을을 떠나 이곳 성밖 동네의 귀신집으로 옮겨오면서부터 그녀는 태주할미의 보이지 않는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악연이라면 악연일 것이다. 결국 을화는 태주할미의 비극적 전철을 그대로 밟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전에 뱃집에서 태주할미와 같이 거주하던 남자가 어디론가 거처도 없이 사라져 버렸듯이, 이 집에서 을화와 같이 동거하던 남자 역시 거처도 알리지 않고 그 곳을 떠나 버린다. 결국 그 집에는 결국 무당여인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전에 도사가 그 곳에서 훌훌 떠나버린 데에는 도사가 도사로만 남을 수 없게 만드는 태주할미의 부정적 역할이 없지 않았으리라. 을화 자신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그 집을 이사를 했겠지만, 그 자신 역시도 그 곳에서 더 큰 문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전에 도사가 없어진 뒤 아이를 죽였던 그 큰일이 태주할미에게 닥쳤던 것처럼 이제는 성 박사가 사라진 뒤에 그 큰 일이 을화에게도 닥쳐왔던 것이다. 명도점의 효험을 위해 무고한 어린아이(기호)를 죽였던 태주할미의 끔찍한 일이 이제 그 뱃집에서 재판 형식으로 다시 벌어졌던 것이다. 귀가한 아들 영술의 가슴에다 결국 식칼을 들이댐으로써 을화는 그녀 자신의 아들을 절망케 한 매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두 무당에게 법적 책임은 지워지지 않는다. 정부자집 마누라는, 뱃집에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자기 눈앞에 있었지만, 관가에 넘기지 않고 그녀를 방면해 버리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을화도 비속(卑屬)치사 사건을 일으켰으나 그녀를 관가로 넘겨주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김동인의 「명문」의 주인공 전 주사가 그의 모친 살해로 인해 처형당한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고 하겠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성방돌이 나타나 월희를 그 집에서 데리고 떠나버린다. 그대로 그 집에 놔두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영술이도 을화의 손에 죽고, 자신의 친딸인 월희마저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을화는 이제 정말 쓸쓸히, 온전히 혼자만 남아 그 귀신집에서 살게 되었다. 을화의 이러한 불행은 그녀의 자유의지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신적 의지에 의해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평론가 이태동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그 착안이 필자와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아들의 가슴을 찌르게 되었다는 것은 을화의 자유의지, 또는 적극적인 의지가 발동하여 아들을 찌른 것은 아니라는 뜻일 터이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제 정신에 아들을 칼로 찌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진범은 자연히 ‘접신을 한 끝에’라는 표현 속의 바로 그 ‘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때의 신은 그 귀신집을 지배하고 있는 바로 그 귀신이다. 그러므로 이태동은 앞서의 표현을 통하여 정면에서는 을화를 옹호해 준 셈이지만, 실제로 이면에서는 바로 그 을화를 지탄한 것이 되고 말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아무리 그녀가 자기의 뜻대로 한 행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녀로 하여금 그런 행위를 무의식적으로라도 할 수 있도록 조종한 힘은 바로 그녀가 지금껏 믿어온 그 귀신이겠기 때문이다. 자기의 교(敎)외의 세력을 적대 세력으로 몰아 ‘사망’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 신이라면 그 신은 ‘생의 구경(究竟)의 의미’를 구현하는 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의 구경적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하는 작가 김동리의 변은 전혀 설득력을 잃은, 말하자면 일종의 자가당착을 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문학자 이정숙이, 월희가 그곳을 벗어나게 되는 데에서 제 3인간주의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옳은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제3휴머니즘 사상 자체의 가치 여부에 대해서는 배제하고서라도, 김동리가 예의 그 제3휴머니즘을 바로 그 『을화』의 샤머니즘 자체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음이 사실일진대, 그녀의 딸 월희가 무교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생부 방돌네 집으로 가게 된 데에서 제 3인간주의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바지에 가서 월희가 을화를 떠난 것은 결국 무교 세계에 대한 희망이 약화되고 그 세계 자체의 구원의 긍정가치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의도의 오류’로 인하여 이 작품은 무교의 세계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세계가 훨씬 더 우월한 종교세계로 작품상에 드러나게 되었음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정숙은 아무 저항없이 성서방에게 이끌려 무녀의 집을 떠나는 을희에게서 양쪽 세계의 공존을 통한 조화의 가능성을 보게 그러나 이 역시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무교와 기독교 세계의 공존과 조화라는 것이 어미의 곁은 떠난 월희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양 쪽 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은 영술이 살아 있을 때 기울여져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도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사후에 그 일이 도모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가망성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을희를 통해 무교와 기독교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어떤 제 3의 세력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는 거의 없을 것으로 확신된다. 다음으로, 양 세력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은 그 세력 모두에 대한, 아니라면 그 중 어느 한 쪽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도 있을 때라야만 기울여질 수 있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거 기성집단을 대표하는 무녀가 신흥 집단의 총아를 거세함으로써 재래 종교의 승리가 이루어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5.05.26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881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