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회월 박영희
1) 박영희에 관하여...
2) 회월의 문단적 활동상 (3차례 방향전환)
3) 회월의 인간에 대한 평가
2. 낭만주의 문학기
1) 백조파 [白潮派]
2) 박영희의 낭만주의문학
3) 백조붕괴, 유미주의로부터의 탈피
3. 신경향주의
- 박영희적 경향, 최서해적 경향, 신경향적 문학으로서의 <산양개>
4. 프로문학운동
1)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朝鮮-藝術家同盟]
2) 카프문학으로서의 전환기
- 카프의 결성배경과 목적, 의의
- 카프의 주도세력으로서의 박영희
- 박영희의 다수의 작품이 김기진에게 비판받은 이유와 박영희의 반박
-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 형식논쟁
- 계급주의 문학과의 결별선언의 의유
5. 순수문학기
6. 친일문학기
7. 해방 후 납북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회월 박영희
1) 박영희에 관하여...
2) 회월의 문단적 활동상 (3차례 방향전환)
3) 회월의 인간에 대한 평가
2. 낭만주의 문학기
1) 백조파 [白潮派]
2) 박영희의 낭만주의문학
3) 백조붕괴, 유미주의로부터의 탈피
3. 신경향주의
- 박영희적 경향, 최서해적 경향, 신경향적 문학으로서의 <산양개>
4. 프로문학운동
1)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朝鮮-藝術家同盟]
2) 카프문학으로서의 전환기
- 카프의 결성배경과 목적, 의의
- 카프의 주도세력으로서의 박영희
- 박영희의 다수의 작품이 김기진에게 비판받은 이유와 박영희의 반박
-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 형식논쟁
- 계급주의 문학과의 결별선언의 의유
5. 순수문학기
6. 친일문학기
7. 해방 후 납북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월 20일부터 22일에 걸쳐 동경에서 벌어진 시국대응전국위원회(일명 전향자대회)에 권충일과 함께 참가한 것이었다. 여기서 회월은 경성지부간사로 촉탁되며 1939년 7월 15일 경성부내 4개 분회 중 제1분회의 분회장이 된다. 1939년 4월 17일부터 5월 13일까지 김동인 임학수 등과 황군 위문 작가단에 가담하여 북경 등 중국 각지를 다니며 일본군을 위문하는 위문여행을 하게 되는데 당시 그와 절친했던 {매일신보} 기자 백철은 그의 친일의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내게는 선배, 같은 평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와 나 사이는 가까웠던 편이어서 이 때의 그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춘원도 그렇지만 회월도 성격이 퍽 약하고 생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때문에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 정세에 대한 근시안적인 도취도 되기 쉬웠다. 회월이 종군을 떠나기 전날 나와 둘이서 점심을 부민관 식당에서 할 때에 그는 춘원이 내게 하던 이야기와 꼭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에는 먼저 해서 생색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의 특권을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그해 10월에 보고 ‘서인전선기행’을 수필로 엮어낸다. 게다가 1939년 10월 29일에 결성된 조선 문인 협회의 간사로 피선되며 1941년 8월 12일자로 간사장이 된다. 1941년 1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위원, 그 해 12월에 황도학회발기인 48명 중 하나가 되며 8명의 이사 가운데 1인으로 피선된다. 1941년 8월에 삼천리사 주최의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며 조선임전보국관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2월4일 동경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43년 4월 17일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의 총무국장에 피선된 뒤 1945년 8월 1일, 임원개편에 따라 평론부회장에 피선된다.
7. 해방 후 납북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출 사이도 없이 밀어닥친 해방 때문에 회월은 발 빠르게 과거의 행적을 점검해야 했다. 그의 발 빠른 행동은 초창기의 문단측면사와 현대조선문학사를 집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의 30년 동안의 문단생활은 현대조선역상운명과 더불어 실로 기구하였다. 일정시대의 말기에는 나는 지필을 내어던진 채 7,8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었다. 나는 이렇게 무료히 지나가는 동안자기의 길을 문학사를 초하려는 데서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리 하여 틈틈이 자료도 정리도 하여 보았으나 이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로에 내 자신이 있게 됨을 알게 될 때 나는 하는 수없이 이것조차 중지하고 말았다가 815를 당하게 되자 자유와 여가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시 펜을 잡았다. (중략) 우리는 이 새로운 출발에 앞서서 과거 40년 동안의 조선 문학을 정당히 이해하며 또 그 걸어온 자취에서 현재와 미래의 고귀한 전통을 만들기 위하야 현대조선문학사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새로이 내게 부여된 자유와 희망가운데서 남조선현대문학사를 기초할 의욕은 더욱 굳어졌다.
-현대조선문학사-
그리고 해방 후 보도연맹 사무국장이 되어 사상전향자 또는 좌익사상자들의 전향을 위해 활동하는 일도 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속죄양의식은 일종의 자아비판 글로 나타낸 전자의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의 문단 측면사나 현대조선문학사에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광복 이후 과거 친일 경력을 가진 박영희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라가게 되며 친일 시비와 좌우익의 혼란을 춘천으로 낙향하여 국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이후 서울로 돌아와 보도연맹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한 뒤 노상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로 끌려간 뒤 납북되어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8년 북조선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0년대 그곳에서 영화 및 시나리오 창작에 관여했다고 한다.
Ⅲ. 결론
회월(懷月) 박영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는 유명한 글귀일 것이다. 카프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 스스로 이데올로기만 얻고 예술 자체를 잃어 버렸다고 선언함으로써 프로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을 감행하고 전향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 친일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가 부족하고 친일문학으로 전향하여 작가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격랑 속에 미처 자신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불행한 역사의 불운한 선구자라는 한 사람의 평가처럼, 시대에 희생되어버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박영희 그를 비판 하기 앞서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주변상황의 이해가 먼저 연구 되어지고, 그의 문학에 대하여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친일파로만 알았던 박영희의 말할 수 없는 그 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민족운동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남보다 확실한 친일 행각을 보였던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인간으로서 생존의 위협을 느껴보지 못한 우리는 그의 행동을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도 한 명의 인간이고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막다른 길에 섰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목숨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부양해야 하는 가족,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께 실망시켜 드릴 수 없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영희와 같은 길을 갈 수도 있는 일이다. 문인의 길을 걷던 그에게 민족운동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고 또한 친일은 운명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박영희를 예전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 참고문헌
<박영희 연구>, 김윤식, 열음사, 1989
<박영희 전집>, 박영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박영희 연구 - 사상전향을 중심으로>, 노상래, 한민족어문학회, 1994
<전향과 친일의 한 좌표 - 박영희론>, 이상갑, 현대문학이론학회, 2004
그는 내게는 선배, 같은 평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와 나 사이는 가까웠던 편이어서 이 때의 그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춘원도 그렇지만 회월도 성격이 퍽 약하고 생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때문에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 정세에 대한 근시안적인 도취도 되기 쉬웠다. 회월이 종군을 떠나기 전날 나와 둘이서 점심을 부민관 식당에서 할 때에 그는 춘원이 내게 하던 이야기와 꼭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에는 먼저 해서 생색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의 특권을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그해 10월에 보고 ‘서인전선기행’을 수필로 엮어낸다. 게다가 1939년 10월 29일에 결성된 조선 문인 협회의 간사로 피선되며 1941년 8월 12일자로 간사장이 된다. 1941년 1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위원, 그 해 12월에 황도학회발기인 48명 중 하나가 되며 8명의 이사 가운데 1인으로 피선된다. 1941년 8월에 삼천리사 주최의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며 조선임전보국관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2월4일 동경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43년 4월 17일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의 총무국장에 피선된 뒤 1945년 8월 1일, 임원개편에 따라 평론부회장에 피선된다.
7. 해방 후 납북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출 사이도 없이 밀어닥친 해방 때문에 회월은 발 빠르게 과거의 행적을 점검해야 했다. 그의 발 빠른 행동은 초창기의 문단측면사와 현대조선문학사를 집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의 30년 동안의 문단생활은 현대조선역상운명과 더불어 실로 기구하였다. 일정시대의 말기에는 나는 지필을 내어던진 채 7,8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었다. 나는 이렇게 무료히 지나가는 동안자기의 길을 문학사를 초하려는 데서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리 하여 틈틈이 자료도 정리도 하여 보았으나 이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로에 내 자신이 있게 됨을 알게 될 때 나는 하는 수없이 이것조차 중지하고 말았다가 815를 당하게 되자 자유와 여가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시 펜을 잡았다. (중략) 우리는 이 새로운 출발에 앞서서 과거 40년 동안의 조선 문학을 정당히 이해하며 또 그 걸어온 자취에서 현재와 미래의 고귀한 전통을 만들기 위하야 현대조선문학사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새로이 내게 부여된 자유와 희망가운데서 남조선현대문학사를 기초할 의욕은 더욱 굳어졌다.
-현대조선문학사-
그리고 해방 후 보도연맹 사무국장이 되어 사상전향자 또는 좌익사상자들의 전향을 위해 활동하는 일도 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속죄양의식은 일종의 자아비판 글로 나타낸 전자의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의 문단 측면사나 현대조선문학사에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광복 이후 과거 친일 경력을 가진 박영희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라가게 되며 친일 시비와 좌우익의 혼란을 춘천으로 낙향하여 국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이후 서울로 돌아와 보도연맹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한 뒤 노상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로 끌려간 뒤 납북되어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8년 북조선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0년대 그곳에서 영화 및 시나리오 창작에 관여했다고 한다.
Ⅲ. 결론
회월(懷月) 박영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는 유명한 글귀일 것이다. 카프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 스스로 이데올로기만 얻고 예술 자체를 잃어 버렸다고 선언함으로써 프로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을 감행하고 전향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 친일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가 부족하고 친일문학으로 전향하여 작가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격랑 속에 미처 자신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불행한 역사의 불운한 선구자라는 한 사람의 평가처럼, 시대에 희생되어버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박영희 그를 비판 하기 앞서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주변상황의 이해가 먼저 연구 되어지고, 그의 문학에 대하여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친일파로만 알았던 박영희의 말할 수 없는 그 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민족운동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남보다 확실한 친일 행각을 보였던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인간으로서 생존의 위협을 느껴보지 못한 우리는 그의 행동을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도 한 명의 인간이고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막다른 길에 섰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목숨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부양해야 하는 가족,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께 실망시켜 드릴 수 없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영희와 같은 길을 갈 수도 있는 일이다. 문인의 길을 걷던 그에게 민족운동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고 또한 친일은 운명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박영희를 예전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 참고문헌
<박영희 연구>, 김윤식, 열음사, 1989
<박영희 전집>, 박영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박영희 연구 - 사상전향을 중심으로>, 노상래, 한민족어문학회, 1994
<전향과 친일의 한 좌표 - 박영희론>, 이상갑, 현대문학이론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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