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각축과 일제의 한반도 독점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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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러일각축과 일제의 한반도 독점 전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장 서론

제2장 청일전쟁 후 한국문제를 둘러싼 국제관계(1895-1898)
1. 일본세력의 한국 점거
2. 러시아 세력의 한국 점거
3. 러일 공존과 한반도 현상유지

제3장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이권획득 외교
1. 불평등조약체제와 일본의 이권 침탈
2. 제2차 개항기의 열강의 이권획득
3. 아관파천 직후의 열강의 이권침탈
4. 1900년 이후의 열강의 이권침탈
5. 열강의 이권침탈의 귀결

제4장 러일전쟁과 한국문제
1. 러일의 만한정책
2. 영일동맹
3. 전쟁의 원인과 양상
4. 강화외교
5. 국권의 상실

제5장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울의 경비가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속에서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로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아관파천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은 급변하였다. 일본세력은 한국에서 완전히 구축되어가는 반면 러시아의 영향력은 끝없이 강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는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내부적 요인과 민비시해의 야만적 국가테러리즘에 자극받은 국제 여론이 반일로 흐른 외부적 요인으로 한국에서의 러시아 세력은 쉽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① 동아시아 정책의 대상은 중국 특히 만주지방 ② 시베리사횡단철도 완성 전까지 일본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겠다는 기본 방침으로 한국 정부의 요구에 확답을 기피하였다.
서구열강이 중국 침략을 위해 새롭게 전개한 조차지(租借地) 획득방식에 따라 러일 양국사이에는 세 차례의 협정 1896년 경성의정서, 모스크바의정서, 1898년 니시-로젠협상.
이 맺어진다. 경성의정서를 통해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을 일본으로부터 최초로 공식 양해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민비시해사건을 인정하였으며 반일내각이 국왕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임명된 합법적인 내각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모스크바의정서를 통해 한국에서 러시아의 우위는 뚜렷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 태도는 불신만을 갖게 하여 친러보다 친일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3. 러일 공존과 한반도 현상유지
1) 니시(西)-로젠 협상(1898. 4. 25)
러시아는 여순, 대련만 조차가 단행되면서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로 한국을 양보하기로 고려하였다. 일본 역시 내정상의 문제로 러시아와 타협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러시아의 강압에 따라 배러(拜露) 의식이 높아졌고 러시아의 훈련교관 및 재정고문은 철수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고 한국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통보하였고, 이런 타협으로 외무장관 니시와 로젠 사이에 니시-로젠 협상을 체결하였다. 이 협상은 형식적으로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였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에게 한국에서의 경제적 우위만 인정해 줄뿐 정치적 우위는 러시아가 계속 누리겠다는 속셈이였고, 이러한 상태를 ‘한반도 현상유지’라 일컫는다.
2) 한반도 현상유지(Status quo)
열강의 이기적인 이해관계등으로 현상유지는 결코 영구적이지 못하였다.
한반도 현상유지가 진행되는 동안, 러일간에 한국문제 해결방안으로서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과 한반도 중립화안이 부각되었다. 만한교환론은 일본의 국내 상황이 위약하여 신중한 대러 타협책으로써 제시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을 포기할 뜻이 없었고 이에 따라 니리-로젠 협상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서의 평화적 침투를 지속하였고, 점점 조선에서의 러시아 세력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점 이후부터는 만한교환론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일본도 만주를 필수적인 세력확대 범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현상유지는 지속될 수 없었다.
제3장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이권획득 외교
역사적으로 보면 이권(利權, Concession)은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과정으로서의 세계체제 형성과정에서 완전식민지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한 나라가 독립된 후진적 약소국가로 있을때나 반식민지 상태에 있을때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 한국에서 자행된 열강의 이권획득, 침탈의 경쟁외교는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1876년 2월부터 1882년 7월까지의 단계로서 일본이 조일수호조규의 불평등조약 체계에 의하여 이권을 독점적으로 침투한 것이 특징이다.
제2단계는 1882년 8월부터 1896년 1월까지의 단계로서 청일 양국의 이권획득경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과 청국은 대자본의 투자가 소요되지 않는 부문의 이권침탈에 집중했으며, 서양 열강들도 광산조사 등을 행하면서 이권침탈의 기회를 노렸다.
제3단계는 1896년 2월부터 1898년 12월까지의 단계로서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이 다투어 가면서 이권을 침탈하였다. 즉 이 단계는 서양 열강을 중심으로 한 이권획득의 다국경쟁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제4단계는 1899년 1월부터 1905년 11월까지의 단계로서 주로 러시아와 일본이 치열한 이권침탈의 경쟁외교를 전개한 이권획득경쟁 단계라 할 수 있으며, 1904년 러일 전쟁 도발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러시아 이권침탈은 종결되고 모든 이권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 불평등조약체제와 일본의 이권 침탈
조선은 일본에 굴복하여 1876년 2월 27일 불평등조약으로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을 시작으로 조일수호조규부록(朝日修好條規附錄)과 무역규칙(貿易規則)을 체결하여 부산, 원산, 인천의 3항구를 개방함으로써 개방체계에 들어갔다.
이 불평등조약 중 매우 크고 중요한 이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권으로 인식되지 못해온 것이 바로 개항장의 개방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치외법권지역으로서의 일본전관조계(專管租界) 조계(租界)란 일정한 지역범위 안에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을 정하여 그곳의 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을 말함.
를 설치한 위에, 조일수호조규부록과 무역규칙 체결에 의해 획득한 불평등 특권으로서의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행하여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부산, 원산, 인천의 3개항장에 조선왕조의 통치권이 행사되지 않는 이러한 특징의 일본전관조계를 설치하고 일본관리가 일본정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행정을 하며 일본영사가 일본법에 의거 영사재판을 하면서, 일본화폐를 통용케 하고, 무관세 무역을 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침투를 추진하는 거점을 만든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일본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으로서의 조일수호조규는 그 후 조선왕조가 각국과 체결한 수호조약의 선례가 되어 한국근대사에서 불평등조약체제가 지배하도록 만든 근원이 되었다.
2. 제2차 개항기의 열강의 이권획득
개항 후 일본세력이 독점적으로 조선에 침투하자 청국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한다는 뜻으로, 중국이 큰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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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04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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