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론
▣ 진시황의 출생과 성장
▣ 진시황의 통일에 대한 의의
▣ 진시황 그가 가진 불균형
▣ 맺는말 : 진시황의 업적과 중국사의 의의
▣ 진시황의 출생과 성장
▣ 진시황의 통일에 대한 의의
▣ 진시황 그가 가진 불균형
▣ 맺는말 : 진시황의 업적과 중국사의 의의
본문내용
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백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 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참고사항> 진시황제의 연표
B.C. 259 (01) 정월, 영정(진시황)이 조(趙) 나라 수도 한단에서 출생
B.C. 250 (10) 소왕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나, 3일 만에 죽음
B.C. 249 (11)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임명
B.C. 247 (13) 장양왕이 죽고 뒤를 이어 왕이 됨
B.C. 246 (14) 진시황릉(驪山陵墓)의 건설 시작
B.C. 238 (22) 기년궁에서 대관식 거행
B.C. 237 (23)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에서 파면(제거), 친정(직접통치)을 시작, 울요(尉)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
B.C. 230 (30) 한(韓) 나라를 멸함
B.C. 228 (32) 조(趙) 나라를 멸함
B.C. 227 (33) 연(燕) 나라 태자 단이 형가를 시켜 진시황을 암살하려 함
B.C. 225 (35) 위(魏) 나라를 멸함
B.C. 223 (37) 초(楚) 나라를 멸함
B.C. 222 (38) 연(燕) 나라를 멸함
B.C. 221 (39) 제(齊) 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시켜, 진시황이라 부르게 함.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B.C. 220 (40) 첫번째 전국 순시. 치도(馳道) 건설.
B.C. 219 (41) 두번째 전국순시. 태산에 오르고,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함, 서복(徐福)을 바다에 보내 신선을 만나도록 시킴, 아방궁(阿房宮) 건설.
B.C. 218 (42) 세번째 전국순시. 장량(張良)이 진시황을 죽이려했으나 실패함.
B.C. 215 (45) 네번째 전국순시. 몽념(蒙恬)에게 흉노를 북벌하라고 시킴, 노생에게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라고 명함.
B.C. 213 (47) 분서(焚書)를 명함.
B.C. 212 (48) 갱유(坑儒)를 명하여, 1,160여명을 생매장시킴.
B.C. 210 (50) 다섯번째 전국순시. 회계산(會稽山)에 오르고 7월 병으로 사구(沙丘)에서 죽음. 9월 여산(驪山)에 안장.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백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 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참고사항> 진시황제의 연표
B.C. 259 (01) 정월, 영정(진시황)이 조(趙) 나라 수도 한단에서 출생
B.C. 250 (10) 소왕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나, 3일 만에 죽음
B.C. 249 (11)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임명
B.C. 247 (13) 장양왕이 죽고 뒤를 이어 왕이 됨
B.C. 246 (14) 진시황릉(驪山陵墓)의 건설 시작
B.C. 238 (22) 기년궁에서 대관식 거행
B.C. 237 (23)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에서 파면(제거), 친정(직접통치)을 시작, 울요(尉)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
B.C. 230 (30) 한(韓) 나라를 멸함
B.C. 228 (32) 조(趙) 나라를 멸함
B.C. 227 (33) 연(燕) 나라 태자 단이 형가를 시켜 진시황을 암살하려 함
B.C. 225 (35) 위(魏) 나라를 멸함
B.C. 223 (37) 초(楚) 나라를 멸함
B.C. 222 (38) 연(燕) 나라를 멸함
B.C. 221 (39) 제(齊) 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시켜, 진시황이라 부르게 함.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B.C. 220 (40) 첫번째 전국 순시. 치도(馳道) 건설.
B.C. 219 (41) 두번째 전국순시. 태산에 오르고,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함, 서복(徐福)을 바다에 보내 신선을 만나도록 시킴, 아방궁(阿房宮) 건설.
B.C. 218 (42) 세번째 전국순시. 장량(張良)이 진시황을 죽이려했으나 실패함.
B.C. 215 (45) 네번째 전국순시. 몽념(蒙恬)에게 흉노를 북벌하라고 시킴, 노생에게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라고 명함.
B.C. 213 (47) 분서(焚書)를 명함.
B.C. 212 (48) 갱유(坑儒)를 명하여, 1,160여명을 생매장시킴.
B.C. 210 (50) 다섯번째 전국순시. 회계산(會稽山)에 오르고 7월 병으로 사구(沙丘)에서 죽음. 9월 여산(驪山)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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