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목 차례>
1. 서론 1
가. 배경. 1
나. 과거제도 이전의 관료선발 1
2. 당나라의 과거문화 2
가. 당나라 과거제도의 정착과 발전 3
나. 과거 응시생들의 여러 모습 4
3. 결론- 과거제도의 의의. 6
가. 긍정적 측면 6
나. 부정적 측면 6
4. *참고문헌 - 8
<표 차례>
<그림 차례>
<수식 차례>
1. 서론 1
가. 배경. 1
나. 과거제도 이전의 관료선발 1
2. 당나라의 과거문화 2
가. 당나라 과거제도의 정착과 발전 3
나. 과거 응시생들의 여러 모습 4
3. 결론- 과거제도의 의의. 6
가. 긍정적 측면 6
나. 부정적 측면 6
4. *참고문헌 - 8
<표 차례>
<그림 차례>
<수식 차례>
본문내용
史論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과거제도는 고도의 文과史의 지식과 소양을 가진 문관을 형성시켜 고대 중국은 매우 선진적인 정부 조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당대에는 중앙정부에 일상정무를 관할하는 6대부서 吏, 禮, 戶, 刑, 工, 兵 이 각각 예의, 재정, 사법, 건설, 군사 등을 관할했다.
가 만들어 졌고, 또 그아래 세밀한 편제까지 맞들어서 방대한 행정망이 구축되었다. 또한 당대 이전에 이미 정일품에서 정 구품에 이르는 문관 서열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서구의 봉건 영주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부정적 측면
유감스러운 것은 이상과 같은 중국문화에 대한 과거제도의 긍정적 측면이 동시에 상당한 부정적 측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 고대에는 과거제도로 선진적일 수 있었으나 근대에 와서는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지식인은 한 사회의 문화를 대표하는 계층인데 고대 중국의 과거제도는 이런 지식인계층의 거의 모든 힘을 과거제도에 귀속되게 함으로서 행정권력 지상주의를 낳았고 모든 부가 권력자들에게 돌아가게 했으며 그것 외에는 부에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지주나 상인들까지도 가문을 키우거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에 의지했다. 그래서 평등하게 길을 열어둔 과거제도에 끊임없이 진입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백발이 되도록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이것은 생산력에 기여할 백성들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사회의 생산력이나 과학기술을 침체에 빠뜨렸다.
과거제도는 극단적인 전제성을 부추겼다. 과거제도의 발전은 행정과 인재등용의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귀족이 실권을 장악하는 정치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귀족이 어느 정도 전제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과거제도는 이러한 기능을 제한했다. 과거출신 관료들이 의지했던 것은 세습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라 황제명의로 소집된 과거시험이었기에 그들의 지위를 박탈 할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군권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왕권이 강한 상황에서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사상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것이 전제정치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시험은 유가만을 인정하여 여타 학술사상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문장의 언어와 격식까지도 모두 엄한 규정이 있어서 내용에서 형식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벗어남을 용납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제한이 엄격해 질수록 지식들은 쉽게 그것에 길들여졌고 그들을 정치권력에 종속된 존재로서 비주체적이고 자아의식이 부족하며 시험에만 능한 사람이 되어갔다. 지식인의 문화적 창조력은 날이 갈수록 저하되었고 인재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만 못했다.
과거제도는 또한 중국 지식인의 도덕성을 타락시켰다. 공부를 해서 과거제도에 급제하는 것이 공맹의 도를 이해하고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주와 성 등 삶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키기 위한 것으로 점점 변해갔다. 송진종의 유명한 「권학문」에서는 “책 속에 황금으로 된 집이 있고, 옥같이 예쁜 여인이 있고 수레와 말들이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책 속의 이야기는 그저 교과서적인 입에 바른 말이었고 고대 문인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집들 속에 있는 민생과 국정을 걱정하는 우환의식은 충만해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신성인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점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중국 과거문화사』 진정 지음, 김효민 옮김, 동아시아
『중국 과거제도의 사회적 연구』 기평태 지음, 동국대학교 출판부
『과거제도와 (科擧制度) 동아시아 문학의 사회사 (社會史)』한국비교문학회 김태준
일찍이 당대에는 중앙정부에 일상정무를 관할하는 6대부서 吏, 禮, 戶, 刑, 工, 兵 이 각각 예의, 재정, 사법, 건설, 군사 등을 관할했다.
가 만들어 졌고, 또 그아래 세밀한 편제까지 맞들어서 방대한 행정망이 구축되었다. 또한 당대 이전에 이미 정일품에서 정 구품에 이르는 문관 서열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서구의 봉건 영주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부정적 측면
유감스러운 것은 이상과 같은 중국문화에 대한 과거제도의 긍정적 측면이 동시에 상당한 부정적 측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 고대에는 과거제도로 선진적일 수 있었으나 근대에 와서는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지식인은 한 사회의 문화를 대표하는 계층인데 고대 중국의 과거제도는 이런 지식인계층의 거의 모든 힘을 과거제도에 귀속되게 함으로서 행정권력 지상주의를 낳았고 모든 부가 권력자들에게 돌아가게 했으며 그것 외에는 부에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지주나 상인들까지도 가문을 키우거나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에 의지했다. 그래서 평등하게 길을 열어둔 과거제도에 끊임없이 진입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백발이 되도록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이것은 생산력에 기여할 백성들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사회의 생산력이나 과학기술을 침체에 빠뜨렸다.
과거제도는 극단적인 전제성을 부추겼다. 과거제도의 발전은 행정과 인재등용의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귀족이 실권을 장악하는 정치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귀족이 어느 정도 전제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과거제도는 이러한 기능을 제한했다. 과거출신 관료들이 의지했던 것은 세습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라 황제명의로 소집된 과거시험이었기에 그들의 지위를 박탈 할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군권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왕권이 강한 상황에서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사상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것이 전제정치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시험은 유가만을 인정하여 여타 학술사상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문장의 언어와 격식까지도 모두 엄한 규정이 있어서 내용에서 형식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벗어남을 용납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제한이 엄격해 질수록 지식들은 쉽게 그것에 길들여졌고 그들을 정치권력에 종속된 존재로서 비주체적이고 자아의식이 부족하며 시험에만 능한 사람이 되어갔다. 지식인의 문화적 창조력은 날이 갈수록 저하되었고 인재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만 못했다.
과거제도는 또한 중국 지식인의 도덕성을 타락시켰다. 공부를 해서 과거제도에 급제하는 것이 공맹의 도를 이해하고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주와 성 등 삶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키기 위한 것으로 점점 변해갔다. 송진종의 유명한 「권학문」에서는 “책 속에 황금으로 된 집이 있고, 옥같이 예쁜 여인이 있고 수레와 말들이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책 속의 이야기는 그저 교과서적인 입에 바른 말이었고 고대 문인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집들 속에 있는 민생과 국정을 걱정하는 우환의식은 충만해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신성인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점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중국 과거문화사』 진정 지음, 김효민 옮김, 동아시아
『중국 과거제도의 사회적 연구』 기평태 지음, 동국대학교 출판부
『과거제도와 (科擧制度) 동아시아 문학의 사회사 (社會史)』한국비교문학회 김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