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훈민정음이란?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
3. 훈민정음 창제 과정
4. 훈민정음 원리
5. 훈민정음 언해편 분석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
3. 훈민정음 창제 과정
4. 훈민정음 원리
5. 훈민정음 언해편 분석
본문내용
월에 몸소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냄으로써 유감없이 빛을 내었다. 세종 임금은 왕립 연구소라 할 집현전에 모아 기른 인재들 가운데 일부-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선로, 성삼문 등-를 궁중의 언문청 또는 정음청에 따라 모아 보좌를 받으면서 한글 만들기를 주도했다.
그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다.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 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사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통해 반포했다. 이 책의 머리에 실린 짧은 글을 통해서 세종 임금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은 모든 백성들이 쉽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애민정신과 우리 정신에 맞는 우리말을 가지도록 하는 주체정신 자주정신, 한자음의 정리와 통일된 표기를 위한 실용정신이다.
4. 훈민정음 원리
훈민정음은 중국 성운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음절에 대한 개념차이가 있다. 즉, 중국 성운학의 음절은 2분법으로 초성 자음과 중종성의 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훈민정음의 음절은 3분법으로 초성중성종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당시 한국어의 음운과 음성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훈민정음은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창제되었다. 자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소리값이 가장 여린 기본자를 만들고, 소리의 거센 정도에 따라 획을 더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모음은 상호 대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천(天)지(地)인(人)을 형상화하여 기본자를 만들고, 기본자를 결합하여 모음을 만들되 상호 대립적으로 구성되도록 만들었다.
자음은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으로 나누고, 각 음의 발음상태를 상형하여 만들었다. 아음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따서 \'ㄱ\'을 만들고, ㄱ보다 센 \'ㅋ\'을 만들었다. 설음은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따서 \'ㄴ\'을 만들고,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해 \'ㄷ\'과 \'ㅌ\'을 만들었다. 순음은 입술의 모양을 본따 \'ㅁ\'을 만들고, \'ㅂ\'과 \'ㅍ\'을 만들었다. 치음은 아랫이의 모양을 본따 \'ㅅ\'을 만들고, \'ㅈ\'과 \'ㅊ\'을 만들었다. 후음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따 \'ㅇ\'을 만들고, \'咬\'과 \'ㅎ\'을 만들었다. 자음 가운데 가획의 원리(획을 더하는 원리)로 만들지 않은 글자가 있는데, 아음의 \'胱\'은 후음의 \'ㅇ\'과 발음이 비슷하여 \'ㅇ\'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설음의 \'ㄹ\'과 치음의 \'壙\'은 설음의 기본자 \'ㄴ\'과 치음의 기본자 \'ㅅ\'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가획의 원리로 만든 글자는 아니다. 이렇게하여 자음 17자가 만들어졌다.
모음은 천(天)지(地)인(人)을 형상화하여 기본자 \'\', \'ㅡ\', \'ㅣ\'를 만들고, 와 ㅡ가 결합하여 \'ㅗ\', ㅣ와 가 결합하여 \'ㅏ\', ㅡ와 가 결합하여 \'ㅜ\', 와 ㅣ가 결합하여 \'ㅓ\'를 만들었다. 그리고, ㅣ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초출자(初出字)와 결합하여 재출자(再出字)를 만들었는데, ㅣ로 시작한 ㅗ는 ㅛ, ㅣ로 시작한 ㅏ는 ㅑ, ㅣ로 시작한 ㅜ는 ㅠ, ㅣ로 시작한 ㅓ는 ㅕ로 만들었다. 이렇게하여 모듬 11자가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모음은 상호 대립적으로 존재하는데, \'ㅗㅏㅛㅑ\'는 하늘()과 같은 종류로 합(闔) 즉, 원순모음이고, \'ㅜㅓㅠㅕ\'는 땅(ㅡ)과 같은 종류로 벽(闢) 즉, 비원순모음이다. \'ㅗㅏㅛㅑ\'의 동그라미()가 ㅡ의 위와 ㅣ의 밖(우측)에 놓인 것은 하늘()에서 생겨나서 양(陽)이 되기 때문이고, 이들 모음은 양성모음이 된다. \'ㅜㅓㅠㅕ\'의 동그라미()가 ㅡ의 아래와 ㅣ의 안(좌측)에 놓인 것은 땅(ㅡ)에서 생겨나서 음(陰)이 되기 때문이고, 이들 모음은 음성모음이 된다.
5. 훈민정음 언해편
世·솅宗御·엉製·
그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다.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 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사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통해 반포했다. 이 책의 머리에 실린 짧은 글을 통해서 세종 임금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은 모든 백성들이 쉽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애민정신과 우리 정신에 맞는 우리말을 가지도록 하는 주체정신 자주정신, 한자음의 정리와 통일된 표기를 위한 실용정신이다.
4. 훈민정음 원리
훈민정음은 중국 성운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음절에 대한 개념차이가 있다. 즉, 중국 성운학의 음절은 2분법으로 초성 자음과 중종성의 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훈민정음의 음절은 3분법으로 초성중성종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당시 한국어의 음운과 음성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훈민정음은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창제되었다. 자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소리값이 가장 여린 기본자를 만들고, 소리의 거센 정도에 따라 획을 더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모음은 상호 대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천(天)지(地)인(人)을 형상화하여 기본자를 만들고, 기본자를 결합하여 모음을 만들되 상호 대립적으로 구성되도록 만들었다.
자음은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으로 나누고, 각 음의 발음상태를 상형하여 만들었다. 아음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따서 \'ㄱ\'을 만들고, ㄱ보다 센 \'ㅋ\'을 만들었다. 설음은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따서 \'ㄴ\'을 만들고,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해 \'ㄷ\'과 \'ㅌ\'을 만들었다. 순음은 입술의 모양을 본따 \'ㅁ\'을 만들고, \'ㅂ\'과 \'ㅍ\'을 만들었다. 치음은 아랫이의 모양을 본따 \'ㅅ\'을 만들고, \'ㅈ\'과 \'ㅊ\'을 만들었다. 후음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따 \'ㅇ\'을 만들고, \'咬\'과 \'ㅎ\'을 만들었다. 자음 가운데 가획의 원리(획을 더하는 원리)로 만들지 않은 글자가 있는데, 아음의 \'胱\'은 후음의 \'ㅇ\'과 발음이 비슷하여 \'ㅇ\'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설음의 \'ㄹ\'과 치음의 \'壙\'은 설음의 기본자 \'ㄴ\'과 치음의 기본자 \'ㅅ\'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가획의 원리로 만든 글자는 아니다. 이렇게하여 자음 17자가 만들어졌다.
모음은 천(天)지(地)인(人)을 형상화하여 기본자 \'\', \'ㅡ\', \'ㅣ\'를 만들고, 와 ㅡ가 결합하여 \'ㅗ\', ㅣ와 가 결합하여 \'ㅏ\', ㅡ와 가 결합하여 \'ㅜ\', 와 ㅣ가 결합하여 \'ㅓ\'를 만들었다. 그리고, ㅣ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초출자(初出字)와 결합하여 재출자(再出字)를 만들었는데, ㅣ로 시작한 ㅗ는 ㅛ, ㅣ로 시작한 ㅏ는 ㅑ, ㅣ로 시작한 ㅜ는 ㅠ, ㅣ로 시작한 ㅓ는 ㅕ로 만들었다. 이렇게하여 모듬 11자가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모음은 상호 대립적으로 존재하는데, \'ㅗㅏㅛㅑ\'는 하늘()과 같은 종류로 합(闔) 즉, 원순모음이고, \'ㅜㅓㅠㅕ\'는 땅(ㅡ)과 같은 종류로 벽(闢) 즉, 비원순모음이다. \'ㅗㅏㅛㅑ\'의 동그라미()가 ㅡ의 위와 ㅣ의 밖(우측)에 놓인 것은 하늘()에서 생겨나서 양(陽)이 되기 때문이고, 이들 모음은 양성모음이 된다. \'ㅜㅓㅠㅕ\'의 동그라미()가 ㅡ의 아래와 ㅣ의 안(좌측)에 놓인 것은 땅(ㅡ)에서 생겨나서 음(陰)이 되기 때문이고, 이들 모음은 음성모음이 된다.
5. 훈민정음 언해편
世·솅宗御·엉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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