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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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기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유래
2.종류별
(1)암기와
(2)수키와
(3)왕찌기와․토수․초가리기와
(4)망와․곱새기와
(5)치미․취두․용두
(6)잡상
3.시대별
(1)고구려
(2)백제
(3)신라
(4)고려, 조선

Ⅲ.결론

본문내용

이 출토예가 많은 편이다. 암키와의 표면에는 승석문, 격자문, 화문 등이 새겨지고 가끔 절 이름이 새겨진 문자기와도 약간씩 출토되고 있다. 반원막새는 고구려에서만 제작되고 있는 기와로 막새가 반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귀면, 두꺼비, 연화, 당초 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지고 있다.
(2) 백제
망새 부여 부소산절터 백제 7세기 높이 91.5cm
백제의 기와는 암, 수키와가 기본이 되고 있고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연화문이 배치된 수막새와 서까래기와가 대표적이며 이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암막새의 선행 형식인 단평와와 치미, 마루기와 등이 약간씩 제작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의 기와류 가운데 한성 및 웅진 도읍기에는 암, 수키와와 수막새의 사용에 한정된 듯하며 사비도읍기에 이르러 활발한 조와 활동을 전개시키면서 여러 종류의 기와가 함께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수막새는 한성도읍기에 고구려와 낙랑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듯한 약간의 기와를 통하여 초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가 있으나 단편적인 자료에 불과하다. 초기의 수막새는 서울의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초화문수막새 및 연화문수막새와 석촌동4호분에서 출토한 원문수막새 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웅진도읍기(475-538년)의 수막새는 공주의 공산성과 대통사지, 서혈사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성으로 왕궁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많은 수량의 기와가 출토되어 당신의 백제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시되고 있다. 공산성에서 출토한 수막새는 대부분 8엽의 연화문이 배치되고 있는데 연판의 볼륨이 낮고 그 끝이 융기하고 있는 반전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공주의 송산리6호분에서 발견된 명문전돌을 통하여 백제의 와전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한성도읍기의 수막새의 형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수막새는 웅진도읍기에 이르러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새로운 기와들이 한성도읍기에 제작된 초기의 수막새와 다른 차이를 보이면서 서로 단절된 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와들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백제적인 양실을 성립시키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사비도읍기(538-660년)에는 불교문화가 매우 융성하게 되어 도성의 내외에 많은 사원이 건립되게 됨으로써 기와의 제작이 더욱 본격화하게 된다. 수막새가 발견되는 곳은 사원터, 궁성터, 산성터 등지인데 6세기전반경의 수막새는 웅진도읍기의 와전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연판의 반전수법이나 자방의 형태가 약간씩 변화하기 시작하여 백제화된 새로운 형식들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사비도읍기의 수막새에는 서까래기와와 함께 대부분의 연화문이 장식되고 있는데 간혹 파문이나 무문의 것도 제작되고 있다. 연화문은 판수가 8엽으로 판내에 자엽이 거의 장식되지 않는 소판주의 단판양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각 연판의 형식은 그 끝이 융기하거나 반전되면서 삼각 돌기 또는 원형돌기 변화하는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그 끝이 갈라지기도 한다.
연꽃무늬수막새 부여 부소산 백제 6~7세기 지름 16.4cm
백제의 수막새는 7세기를 전후하여 채용된 파문이나 무문을 제외하고 초기부터 연화문이 주된 문양으로 장식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수막새와는 달리 그 색조가 연회색을 띠고 있어서 소성방법의 차이를 예견할 수가 있다. 또한 연판의 끝이 곡면을 이루면서 약간씩 반전되고 있고 전체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단아한 맛을 주고 있는 점이 주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와의 형식들은 당시 신라와 일본의 비조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새로운 유형을 낳기에 이른다.
한편 백제의 암, 수키와에는 그 표면에 문자나 기호를 도장으로 새겨 찍은 인명와가 많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인명와는 대부분이 사비도읍기에 제작된 것으로 간지와 지명이나 사명, 그리고 제작자명이나 제작소의 기호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와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백제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까래기와는 목조건축의 처마 끝에 나와 있는 서까래의 부식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되는 장식기와로 백제에서 매우 성행하여 이채롭다. 백제의 서까래기와는 둥글고 긴 연목에 쓰이는 원형의 것이 대부분이다. 서까래기와는 수막의 형태와 유사하지만 막새의 주연부가 생략되고 자방의 중심에 못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서까래기와에는 모두 연화문이 시문되고 있는데 수막새에 장식된 연화문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연판의 형식변화도 서로 유사하다. 그런데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한 녹유서까래기와는 삼국기의 와례 가운데 유일하게 녹유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7엽의 연판 안에 인동문자엽이 각각 정교하게 장식되고 있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서까래기와부여 군수리절터 백제 6세기 지름 12.0cm
(3)신라
신라에 기와가 언제 유입되었는지 정확히 밝힐 수 는 없다. 그러나 기원전 2-1세기에 한반도의 북반부에 기와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늦어도 기원후 4세기경부터는 금성이나 월성등의 궁궐에 암,수기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신라에서 연화문이 장식된 수막새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궁궐이나 사찰건축에 사용된 시기는 불교가 공인되고(528년)되고 흥륜사, 황룡사등의 큰 사원이 조영되기 시작한 6세기전반경부터이다. 신라는 이 무렵에 고구려와 백제의 기와제작술을 받아들여 형식적으로 서로 다른 두 계통의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6세기후반부터는 연판의 내부에 능선이 새겨지고 그 끝이 둥글게 마무리되었거나 융기하고 있는 독자적인 막새형을 개발하게 된다.
고신라시대에는 암, 수기와와 막새 그리고 사래기와와 치미, 구면와 등의 마루기와가 제작되었다.
단편양식의 연화문 수막새는 고구려계와 백제계, 신라 독자적인 막새형으로 구분되고 있어서 신라기와의 성립과정을 잘 살펴볼 수가 있다. 고구려계의 막새형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연판의 목이 좁고 그 끝이 날카로운 협판계인데 대개 6,7엽의 연판이 장식되고 있다. 백제계 막새는 연꽃잎의 폭이 비교적 넓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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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18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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