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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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도전,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 론
들어가면서.

본 론
Ⅰ. 정도전의 생애.
Ⅱ. 고려의 시대말 상황과 사상.
Ⅲ. 여말선초의 정치 세력.
Ⅳ. 신진사대부란 누구인가?
Ⅴ. 정도전과 정몽주.
Ⅵ. 정도전의 정치 사상.
Ⅶ. 정도전의 요동 정벌 계획.
Ⅷ. 정도전과 이방원.
Ⅸ. 정도전이 조선에 끼친 영향.

결 론

본문내용

적인 그의 능력이 주위사람을 소외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속성상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아니, 이성계에 의한 절대 권력의 부여가 오히려 그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비극으로 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정도전의 선조는 거의 시골 향리출신으로 부친 운경에 와서 벼슬다운 벼슬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이 격살된 후 장남 \'진\'은 삼족이 멸한다는 통설을 깨고 계속 벼슬길에 있으면서 공조. 형조판서를 역임한 경우로 태종 이방원의 인사정책의 단면을 볼 수 있다.
Ⅱ. 고려의 시대말 상황과 사상.
정도전이 출현했던 고려말을 살펴보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산적하고, 외세의 침략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권문세족이 친원파를 구성하면서 농장을 확대하고 중앙의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각종 개혁을 시행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를 하게되면서 고려사회의 모순은 점점 깊어져갔다. 따라서 이를 혁파하고 개혁할 요량으로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기존의 친원파와 새로운 나라로 들어서는 친명파를 갈라지는 고려의 세력 분화속에서 사상 또한 고려의 개국시에 교종이 아닌 선종이 사상의 주류로 등장했듯이 고려 또한 불교에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통치사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당시의 기득권이었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대립이라는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지방의 유력 계층이었던 신진사대부는 중앙의 권문세족에 대항하면 정계진출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고려의 개혁에 대하여 신진사대부는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나뉘었고,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정몽주와 정도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온건파를 살펴보면 고려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꿈꾸는 이들로 이상적인 성격이 강했고, 이와 반대로 급진 개혁파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등이 이어지면서 현실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체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원, 명 교체기를 틈타 요동 정벌을 꾀하였다. 그러나 최영을 비롯한 무인세력과 국왕권에서 추진한 요동 정벌은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흥 무인세력과 결탁한 급진개혁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우왕 - 창왕 - 공양왕을 거치게 된다. 이후 전제를 개혁하고 힘을 키워가면서 점차 기존의 온건개혁파를 제거하면서 마침내 조선 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상의 기조를 간단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고려말의 성리학은 훈구파라 불리움으로써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이는 사장과 관학을 중시하는 학파였다. 또한 자주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중시하여 조선후기의 사림파로 대표되는 성리학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의 훈구파는 단순히 성리학을 통치 이념에 적용시켰을 뿐이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의 초기에는 상당한 문화와 과학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훈구파와 반대되는 사림파는 세력 싸움에서 밀려 지방등으로 밀려왔고, 이는 온건파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지방의 중소 지주로 성장한 이들은 사원을 중심으로 급기야 세력을 형성하고중앙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활동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중시하였기에 경학과 예학을 다루며 성리학을 점차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각종 사화를 겪게 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하고 훈구파를 몰아냈으며 각 붕당으로 나뉘게 되는 형태의 붕당정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Ⅲ. 여말선초의 정치 세력.
▣ 고려말의 상황
우리 역사에서 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던 것은 신라 말기와 고려 말기, 그리고 조선 말기의 세 차례였다. 물론 오늘날처럼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불분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라 말기의 개혁대상은 진골 귀족이었고 개혁주체는 호족과 6두품 세력이었다. 고려말의 개혁대상은 권문세족이었고 개혁주체는 국왕과 신흥 사대부였다. 조선 말기의 개혁대상은 노론이었으며 개혁주체는 정조나 대원군 같은 개혁 군주세력 및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 남인 그리고 중인들이었다. 고려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국제 정세 또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에 힘을 입어 세력을 차지한 세력과 함께, 이를 개혁하려는 세력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근 100여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었다.
◇ 권문세족 ◇
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군(郡)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 할을 내야 한다.
◇ 신진 사대부 ◇
신흥사대부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 고려의 개혁주체 세력은 국왕이었다. 개혁 시대의 초기 고려의 왕들은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돼 개혁대상과의 투쟁에 나섰다. 당시 개혁대상, 즉 고려의 정치경제적 특권을 한 손에 쥐었던 권문세족의 수는 불과 60­70여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려의 왕들은 매우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개혁대상이 소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무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혁파하기 위해여 국왕은 새롭게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는 신진 사대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두 세력은 성리학과 반원 정책을 통하여 각기 나름의 고려 사회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 국왕 ◇
△충선왕
1928년에 즉위하여 30여 개항의 교서를 발표하고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명출납, 군국기밀을 담당한 밀질사를 광정원으로 개칭하였고, 사림원과 자정원을 설치하였다. 또한 재정확충책으로 소금전매정책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염법을 제정 시행하였으나 곧 기존 권문 세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이듬해 8월에 폐위됨으로써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충숙왕
1313년에 즉위하여 1318년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하기 위하여 제폐사목소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으로 고쳐 다시 설치하였다. 그러나 곧 원에 압송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충목왕
1344년에 즉위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1271년 원종(12)부터 시행되던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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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6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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