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한국의 역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61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논문] 한국의 역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하는 미군함 포격
-草芝鎭 함락--唐城鎭 공격
魚在淵의 수비대 격전 패퇴
甲곧(갑구지)미군 격퇴
==대원군의 쇄국정책 강화(斥和碑 건립--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격퇴이유--유생의 척화론이 지지, 미국(남북전쟁후 서부개척 등 국내문제 주력), 프랑스(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가 자국의 사정으로 적극적인 대조선정책 이 없었음
.영국:인도경영, 러시아:연해주 개척
.일본:철종4년(1854)--영일조약
5년(1855)--미국과 수교
5년(1855)--로일화친조약
6년(1856)--네덜란드와 수교
==明治維新 단행(1868)--왕정복고--근대국가체제
.조선에 통보--수교요구, 대원군은 일본이 보낸 국서의 형식이 관례에 어긋남로 거절(서계의 문구:皇, 勅)
.1870년대--정한론 대두
.대원군의 의구심 깊어감--斥倭, 斥洋同一視
.대원군 정치의 평가
-긍정론:조선이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대원군 정권의 지도력과 민중의 반침략의지가 하나로 결집되었기 때문에 가능
반침략 투쟁은 나라를 식민지화의 위게에서 건져내고 자주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부정론:대원군 정권이 발휘한 반침략투쟁에서의 지도력은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봉건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타율적 개항을 맞아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됨
1894년의 농민전쟁
.농민의 동요
-조선후기:삼정의 문란--지주-전호간 대립관계--확대 심화
곡가앙등, 토착수공업의 위축--지주, 부농, 대상인 지위상승, 빈농, 영세수공업자, 영세상인, 도시빈민--몰락
-재정적자 심화--민중수탈의 강화
-민중--다양한 형태의 변혁운동 계속, 항쟁계속
농민봉기, 1894년 농민전쟁 직전 집중발생--전라도 지방
봉기의 주도층--부민층--소농, 빈논층
화적의 습격 빈번, 범위, 규모 확대
-농민항쟁:봉건체제의 전반에 대한 변혁 요구는 못함
국지적 일회적, 전국적 조직형성 없음
-농민항쟁을 전국적으로 통합시키는데는 동학의 포교조직이 중요 역할
-東學--심화되던 봉건체제의 모순과 열강의 침략 위기 속에 崔濟愚가 창시(1860)
-반봉건적 지향--봉건적 신분질서 부정(天心이 人心, 事人如天)
地上天國說(민중이 복을 누리고 지배층은 몰락)
-서학에 대항--반침략적 성격
-無爲而化:後天開闢 세상이 저절로 열린다.--인간의 실천적 노력을 중요시하지 않음
==지도원리 되기 어려움(민중의 힘을 혁명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는 한계)
교리의 반봉건, 반침략적 요소__농민에 급속히 파급
-교조 최제우의 사형으로 타격
-2대 교주 崔時亨--교세확장에 노력:包, 接 등 조직망 설치
경전 마련(東經大典, 龍潭遺事)
-동학의 교세확장--탄압 강화
-교조에 대한 신원과 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탄압금지 요구(1892년 11월 정라도 삼례)--충청, 전라감사
-1893년 교도대표 40명 복합상소
-충청도 보은, 금구에서 대규모 집회개최--2만여명 참가(1893,3)
--서장옥, 황하일, 전봉준 등 남접지도자:반봉건, 반침략투쟁으로 전환 시도--서울로 진격하여 탐관오리 축출계획
-탐관오리축출과 청왜척양의 정치적 내용 부각
-정부는 군대파견 움직임, 향리징벌 약속
-동학 금령 붕괴, 대규모 반봉건, 반침략투쟁 일어날 조짐
.농민전재의 전개과정
-전라도고부는 본건적 수탈이 심한지역, 쌀수출과 관련하여 일본상이늬 침탈이 심함
-수탈, 억압:수세 강제 징수, 균전에서의 부당한 소작료 징수, 전운의 폐단 , 방곡령 이용한 모리행위, 陣荒地, 災結에서의 징세, 대동미 부당징수 등:농민봉기의 조건제공
-금구집회 이후 남접지도자 세력 신장
-고부군수 趙秉甲의 농민 수탈--농민의 원성고조
萬石洑 수축에 농민 동원--고액의 수세 징수 착복
-全琫準 등의 남접지도자는 1893년 11월 말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 수 조병갑을 효수 한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한다, 등의 행동방침 결정, 봉기 준비
-1894년1월 10일 전봉준의 지도로 농민궐기
고부관아 습격 무기 탈취, 불법 징수 미곡을 주인에 돌려줌
만석보 아래 신축 둑 파괴
옥문 열고 무고한 백성 석방
-조직과 대오를 정비하여 말목장터 거쳐 백산으로 이동하여 진을 침
-고부의 농민봉기는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으로 진정기미
-농민전쟁의 확대계기--안핵사 이용태의 폭압
모든 책임 농민에 전가 (체포, 구타, 방화, 재화약탈)
-고부 농민 해산 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2차 봉기준비
-3월20일 재봉기, 고부관아 점령, 백산으로 진출, 각지농민 가세
-부대편성--대장에 전봉준, 부대장에 손화중, 김개남 선출--서울로 진출, 봉건지배층 타도, 외래침략자 축출, 행동목표:除暴救民, 輔國安民, 일반 대중과 하급관리 합세 호소
-4월 7일 黃土峴에서 전주 감영군 격파, 남진--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장성, 공략(관아 습격, 백성석방, 무기압수, 탐학관리, 양반, 지주, 부호 징계, 재물 빈민에 분배)
-4월23일--장성에서 초토사 홍계훈의 중앙군 선발대 격파 북상, 정읍, 태인, 금구거쳐 4월 27일 전주성에 무혈입성
-정부:청에 원병ㅇ청, 일본도 거류민 보호구실로 인천에 상륙 대립
-5월8일:전주화약 성립--청.일군의 출동, 민족적 위기, 농번기로 농민호응 어려움
내용
전결부담의 경감, 전운소 폐지, 균전 폐지, 고리대 징수 폐지, 미곡유출 금지, 외국상인의 내지침투 금지, 무명잡세 철폐 및 탐관오리 철폐, 민씨일파 제거 및 대원군의 옹립, 동학교도의 복권
==농민, 소상인의 자립, 발전 가로막던 봉건적 억압 철폐
외국자본주의 침략 물리칠 것,
대원군 정권의 성립
.전주화약으로 농민군 해산, 정부 약속 불이행
.농민군 직접 개혁 착수--53개군에 執綱所 설치(치안 및 행정 담당)
.집강소:집강 1인, 서기, 집사 등의 임원, 전주에 총본부인 대도소 있어 전봉준이 총지휘, 전라감사 김학진이 공식인정--폐정개혁 12개조 합의
.농민군의 세력확대--양반 유생, 이서층 가담 예 증가, 영세상인, 영세수공업자, 실업자 가담==급진적-과격행동:대지주, 중소지주(요호부민)약탈--부민층의 이탈 초래
.폐정개혁 12개조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원한을
  • 가격3,000
  • 페이지수61페이지
  • 등록일2005.10.16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59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