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신재효의 일반적인 소개(개요)
1.1 신재효
1.2 신재효 선생에 대하여
1.3 신재효 1812(순조 12)~1884(고종 21)
2. 신재효의 활동
2.1 신재효와 판소리
2.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2.3 단 잡가 창작가로서의 신재효
2.4 사설 개작자 또는 집성자 혹은 창작자로서의 신재효
3. 신재효 생가
3.1 신재효 고택
3.2 신재효 선생의 생가
4. 신재효 활동의 현대적 의의
1.1 신재효
1.2 신재효 선생에 대하여
1.3 신재효 1812(순조 12)~1884(고종 21)
2. 신재효의 활동
2.1 신재효와 판소리
2.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2.3 단 잡가 창작가로서의 신재효
2.4 사설 개작자 또는 집성자 혹은 창작자로서의 신재효
3. 신재효 생가
3.1 신재효 고택
3.2 신재효 선생의 생가
4. 신재효 활동의 현대적 의의
본문내용
같이 유교주의적 덕목인 忠 孝 烈 友愛를 주제로 삼고있음은 주목할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설개작과정에서 양반이 지향하는 의식세계를 의식했고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합리성과 논리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우침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특히 그는 광대들의 중심인물로서 위치를 거듭 생각했다. 이미 당시 광대중의 일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양반과 매우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평민보다 상층들을 더 의식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신재효로서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사설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설을 전아하고 품위 있게 고쳐 양반의 입맛과 취향에 고쳐나간 일은 신재효 개인의 사정과 함께 당대 광대들이 처한 미묘한 입장을 암시해주는 셈이다.
그러나 판소리사에서 신재효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판소리 사설의 정착과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나누어 부르게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재효는 창과 인물에 따른 배역분담이 필요함을 스스로 터득했고 이를 사설에 적극 반영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사설의 개작을 통해 이른바 상층과 하층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매우 고심했던 것으로 비친다. 그의 앞 시대의 사설이 골계와 비속함으로 흘러갔다면 그는 거기에다 비장함과 전아함이 깃들게 하여 판소리 사설의 균형감을 살리는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판소리 사설의 개작의 의미는 민중과 양반의 대립적 의식을 없애 계층과 신분을 떠나 보다 많은 이가 판소리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 뜻을 두었다. 이는 그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직접 광대를 지도하고 뒷바라지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높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2.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http://shinj.com.ne.kr/gamun/sinjehyo1.htm
신재효가 명실상부한 판소리의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그런데, 신재효가 판소리의 후원자였다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나, 후원자이면서 지도자, 다시 말하면, 광대들의 교육도 담당했다고 보는 견해에는 학계에서 많은 이의와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재효는 자신이 창을 하는 광대가 아니었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창을 지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판소리의 지도자로 볼 수 있는 소위 지도의 수준과 내용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지도를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것과 같은 창악의 구체적인 지도만을 가리킨다면, 신재효는 지도자로서는 자격미달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지도는 당시 동리정사에 초빙되었던 몇몇 8명창들이 수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소리를 예술의 반열에 등록시키는 자로서 그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광대가 갖추어야할 법례를 마련하는 한편, 지적인 소산으로 그 바탕인 사설을 개작하는 등,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지도를 함으로서 당대의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는 분명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가 만약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자였다면, 유파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서편을 아우르는 판소리 후원과 지도는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어떤 동기로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사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판소리 지원동기를 막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세기에 이르면 중인층 출신 예술애호가들이 예술사의 주동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도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동기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지원하게 된 동기가 생기가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재효는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고창 지방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창자를 포함한 예능인과 기생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차차 판소리에 심취해 갔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세심하게 여러 자료와 현지민들의 증언을 살펴 볼 때,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를 조심스럽게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려고 대단히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을 넓히며 고창향반의 일부와 사귀었고, 신분동요라는 사회적 현실과 공명첩발부라는 당대적 조처에 힘입어 명목상으로는 신분상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가 쌓은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은 그가 판소리 사설을 가다듬을 때 판소리 창자들이 소리하기엔 너무 뜻이 센것으로 바꾸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 그가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여 포상받은 일은 그로 하여금 향리라는 직임이 일반적으로 지니게 마련인 부정적인 평판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판소리를 지원하고 양반사대부와 사귀는 일을 신분에 비해 지나친 일이라는 비난에서 빠져나가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효가 그의 신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은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집안의 통혼권이 향리 가문에 국한되었던 사실이며, 그의 집 기둥 생김새가 신분에 벗어났다고 암행어사 어윤중에게 지적당했다는 일화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신재효의 의식에는 신분상승의지와 이를 제약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에 못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잘 한다 과거할까.
자신의 심경을 잘 노래하고 있는 자서가의 일부인 위의 작품에서 신재효는 그의 신분상승의지를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 앞에 서 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욕구를 판소리 지원활동을 통하여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행동을 통하여 양반사대부적 풍류를 과시하고, 판소리를 지원하는 활동을 통하여 후덕한 대인의 도량을 내보임으로써, 명분을 앞세워 허세를 부렸던 향반보다 우월한 생활태도를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향반세력이 다른 지방보다 드셌다는 고창 지방에서 들
그러나 판소리사에서 신재효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판소리 사설의 정착과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나누어 부르게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재효는 창과 인물에 따른 배역분담이 필요함을 스스로 터득했고 이를 사설에 적극 반영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사설의 개작을 통해 이른바 상층과 하층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매우 고심했던 것으로 비친다. 그의 앞 시대의 사설이 골계와 비속함으로 흘러갔다면 그는 거기에다 비장함과 전아함이 깃들게 하여 판소리 사설의 균형감을 살리는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판소리 사설의 개작의 의미는 민중과 양반의 대립적 의식을 없애 계층과 신분을 떠나 보다 많은 이가 판소리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 뜻을 두었다. 이는 그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직접 광대를 지도하고 뒷바라지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높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2.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http://shinj.com.ne.kr/gamun/sinjehyo1.htm
신재효가 명실상부한 판소리의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그런데, 신재효가 판소리의 후원자였다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나, 후원자이면서 지도자, 다시 말하면, 광대들의 교육도 담당했다고 보는 견해에는 학계에서 많은 이의와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재효는 자신이 창을 하는 광대가 아니었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창을 지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판소리의 지도자로 볼 수 있는 소위 지도의 수준과 내용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지도를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것과 같은 창악의 구체적인 지도만을 가리킨다면, 신재효는 지도자로서는 자격미달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지도는 당시 동리정사에 초빙되었던 몇몇 8명창들이 수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소리를 예술의 반열에 등록시키는 자로서 그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광대가 갖추어야할 법례를 마련하는 한편, 지적인 소산으로 그 바탕인 사설을 개작하는 등,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지도를 함으로서 당대의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는 분명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가 만약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자였다면, 유파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서편을 아우르는 판소리 후원과 지도는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어떤 동기로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사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판소리 지원동기를 막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세기에 이르면 중인층 출신 예술애호가들이 예술사의 주동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도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동기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지원하게 된 동기가 생기가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재효는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고창 지방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창자를 포함한 예능인과 기생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차차 판소리에 심취해 갔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세심하게 여러 자료와 현지민들의 증언을 살펴 볼 때,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를 조심스럽게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려고 대단히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을 넓히며 고창향반의 일부와 사귀었고, 신분동요라는 사회적 현실과 공명첩발부라는 당대적 조처에 힘입어 명목상으로는 신분상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가 쌓은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은 그가 판소리 사설을 가다듬을 때 판소리 창자들이 소리하기엔 너무 뜻이 센것으로 바꾸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 그가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여 포상받은 일은 그로 하여금 향리라는 직임이 일반적으로 지니게 마련인 부정적인 평판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판소리를 지원하고 양반사대부와 사귀는 일을 신분에 비해 지나친 일이라는 비난에서 빠져나가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효가 그의 신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은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집안의 통혼권이 향리 가문에 국한되었던 사실이며, 그의 집 기둥 생김새가 신분에 벗어났다고 암행어사 어윤중에게 지적당했다는 일화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신재효의 의식에는 신분상승의지와 이를 제약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에 못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잘 한다 과거할까.
자신의 심경을 잘 노래하고 있는 자서가의 일부인 위의 작품에서 신재효는 그의 신분상승의지를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 앞에 서 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욕구를 판소리 지원활동을 통하여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행동을 통하여 양반사대부적 풍류를 과시하고, 판소리를 지원하는 활동을 통하여 후덕한 대인의 도량을 내보임으로써, 명분을 앞세워 허세를 부렸던 향반보다 우월한 생활태도를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향반세력이 다른 지방보다 드셌다는 고창 지방에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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